불교나 힌두교와 같은 계열인 천부경은 일시무시일(一始無始一)로 시작한다. 무(無)를 모든 것의 근본으로 보는 내용이다. 천부경이나 동양 종교, 심지어 성경까지 강의하는 한 강의자는 이 무(無)를 '텅 빔'으로 일컬으면서, 무(無)는 스스로 완벽한 존재로서 모든 만물의 존재의 근거라고 가르친다.
힌두교 철학서인 우파니샤드에는 다음과 같은 한 비유가 있다.
"아들아, 바냔나무의 열매를 가져오너라."
"여기 있습니다. 아버지"
"얘야, 그걸 쪼개보거라. 그 안에 무엇이 보이느냐?"
"아주 작은 씨들이 보입니다."
"그 씨들 중 하나를 쪼개보거라"
"쪼갰습니다"
"그 안에 무엇이 보이느냐?"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말했다.
"아들아 네가 볼 수 없는 그 씨의 본질로부터 이렇게 큰 바냔나무가 나온거란다."
"아들아, 내 말을 잘 듣고 믿어라. 보이지 않는 신비로운 본질이 바로 이 전 우주의 영(Spirit)이란다. 이것이 실체이고 이것이 아트만(Atman)이다. 그것이 바로 너란다."
범신론에서 아트만(Atman)은 각 사람의 본질을 의미하는데, 우주의 본질을 의미하는 브라만(Braman)과 동일시한다. 그러므로 내가 우주인 것이고 우주가 하나님이므로 내가 곧 하나님일 뿐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란 말이다.
환언하면 하나님이 아닌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니, 만일 존재한다면 그건 '마야(maya)' 즉 허상이라고 여긴다. 브라만은 내가 우주와 하나가 되어감에 의해 일치를 이루고 신성을 깨닫는 것이므로, 어떤 것이든 독립적이고 구별되는 대상은-너와 나, 저것과 이것-허상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이 범신론은 우주는 보이지 않지만, 본질적으로 우주와 동일한 제일의 원리나 힘인 비인격적인 신(神)에 의존해 있다는 믿음 체계이다.
이에 반해 기독교의 우주관은 보이지 않지만 빛들의 아버지인 인격 신인 창조주 하나님이 능력의 말씀으로, 우주 만물을 창조하고 붙들고 계시다는 믿음 체계이다(히 1:3).
범신론에서는 인식적이고 존재적인 차원에서 창조자와 피조물의 구분이 없고, 주체와 객체와의 관계도 모호하다. 반면 기독교는 피조물인 인간과 경배의 대상인 창조주와의 구분이 분명하고 성자/성령과 인간, 인간과 대상과의 관계 또한 그러하다.
창조주 하나님은 주체적으로 첫 사람 아담을 대상으로 생기(生氣)를 불어 넣으셨으며, 또한 인간에게 다른 자연계 피조물을 대상으로 주체적으로 다스릴 것을 명하셨다.
예수께서는 부활 후 제자들을 대상으로 성령을 받으라고 하셨으며 오순절에 위로부터 부어지는 능력의 성령이 제자들을 대상으로 임하시는 역사가 일어났다.
이렇게 기독교는 인간 편에서 성자와 성령을 보내시고 생사(生死)와 화복(禍福)을 허락하시는 주체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존재론적 인식이 명확하다.
또한 성령이 개인에게 임할 때, 즉 성령에 감동돼 이상, 계시, 묵시등 초자연적 성령 역사를 경험할 때도 자신의 개체적 자아감이나 주체적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는다.
이렇듯 신자 각인의 개체적 자기 인식성과 전인적 명료성은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선 더 없이 소중한 것이다.
반면 천부경 강의자의 설명을 들어보면, 우주의 중심인 내가 개체적 자아감, 즉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오감을 버리고 한두 시간 "모른다"나 "아버지(기독교 흉내를 내는 듯)" 또는 "나무 아미타불" 같은 걸 반복하게 되면(만트라) 자신을 잊는 순간이 오는데, 그때 내가 우주 즉 신(神)이 된다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감만 있고 자기 인식이 없는 이런 태극(太極) 상태에서 에너지가 끊어지면 무극(無極)에 가까워지는데(멸진정 상태), 아직 완벽한 무극은 아닌 셈이다.
이들은 주장하길 실제 무극은 자신 안에 있는 텅 빈 자체로서, 우리의 마음의 중심은 텅빈 공적(空寂)한데서 나왔고, 텅빈 공(空)이 근본이라는 것이다. 터무니없이 허황된 발상이다.
이들은 신(神)의 상태를 텅 빈 상태로 규정하므로, 인간이 무극 상태로 진입함은 하나님 상태로 진입함과 같은 것이 된다고 믿는다.
즉 내가 신(神)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고, 따라서 천지 만물도 다 내 마음의 뿌리에서 나온 것이 된다(천부경의 '인중천지일'). 결국 내가 우주를 낳는 신(神)이 되는 셈이다.
생각컨대 범신론의 보이지 않는 무(無)나 공(空)의 개념은 천지창조 때에 지구를 덮고 있었던 흑암이나 공허(창 1:1), 그리고 온 우주의 빈자리를 채우고 있다는 암흑과도 통하는 것이다.
결국 범신론적인 이론 체계는 저들이 빛들의 아버지인 창조주 하나님을 외면한 텅 빈 자리, 즉 빛에 반응하지 않는 공허한 암흑 에너지로 꽉 찬 빈 자리에 교묘히 구축해 놓은 것이다.
그들은 선전하길 이 자리가 진짜 하늘이며 하나님의 본체 자리요 허허공공 (虛虛空空)의 존재로서, 온 우주에 꽉 차 있다(삼일신고, 무부재무불용(無不在 無不容))며, 이것이 무형의 진리인 법신불(法身佛)이라 주장한다.
반면 기독교의 하나님은 텅 빈 상태가 아닌 의와 사랑으로 충만하신 분이며, 영광의 빛으로 종들을 비추시고(계 21:23; 22:5),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우리를 충만케 하시는 스스로 온전히 충만하신 분이시다(엡 3:19; 1:23).
그런데 자신들의 존재의 뿌리가 되는 영적 아버지를 모르는 고아와 같은 범신론자들은 거짓의 아비의 속임수에 속아 자신들의 개체적 자아감과 정체성을 송두리째 잃도록 유도되어, 유리하는 별처럼 텅빈 흑암과 혼돈의 블랙홀로 미혹되고 있는 것이니 그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이들의 표현을 들어보자.
"나의 현존이 아버지의 다른 이름이다."
"내 존재 그 자체가 신성 아버지다."
"하느님은 내 안의 양심이고 성령이다"
유감스럽게도 범신론자들이 보이지 않는 우주의 신비로운 본질을 생각할 때, 영적 실체에 대한 성경적 지식과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에 저들은 스스로 이렇게 반문하고 있는 것이다.
"각자의 혼(魂)은 개인적 영(靈)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렇게만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없다는 건방진 말이 아닌가? 그러므로 각자의 영혼의 본질은 성령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라고.
범신론자들이 말하는 영혼의 본질이나 성령은 물론 양심을 지칭하는 것으로서, 저들은 양심만을 맹신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양심이야말로 이들에겐 사랑이고 진리고 부처이고 예수이므로, 양심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빛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안의 양심은 마귀를 멸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우리를 사신 창조주 앞에 우리가 가까이 서 있을 때만, 창조주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어 선하고 깨끗해 질 수 있다.
이럴 때 톨스토이의 말대로 양심의 소리는 신(神)의 음성이 되는 것이고, 토마스 아 켐피스의 말대로 깨끗한 양심 안에서 만족과 평안을 얻을 수 있다.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딤전 1:19)".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딤전 4:1-2)".
박현숙 목사
인터넷 선교 사역자
리빙지저스, 박현숙TV
https://www.youtube.com/channel/UC9awEs_qm4YouqDs9a_zCUg
서울대 수료 후 뉴욕 나약신학교와 미주 장신대원을 졸업했다. 미주에서 크리스천 한인칼럼니스트로 활동해 왔다.
시집으로 <너의 밤은 나에게 낯설지 않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