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 이종인 역 | 열린책들 | 308쪽

척박한 자연 앞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태풍 지나간 자리에 다시 씨앗 뿌리는
장애물 앞에서 멈추지 않고 전진하는

극 지방에서부터 적도까지. 사막과 광야를 거쳐, 바닷가에도. 어디에나 사람이 살고 있다. 해발 4,000m가 넘는 네팔에도, 해수면보다 더 낮은 땅을 가진 네덜란드에도 사람은 살아간다. 사람은 척박한 자연 앞에서도 무기력하게 포기하지 않는다.

때로는 태풍과 해일, 지진과 폭우 앞에서 한없이 무기력해 보인다. 그러나 해일이 지나간 자리에 다시 집들이 들어서고,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 다시 씨앗을 뿌리는 것이 사람이다.

사람은 장애물 앞에서 멈춰서지 않는다. 장애물을 넘고 전진한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전진하는 힘을 주셨다. 시련과 아픔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다. 잠시 후퇴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전진한다.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의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는 노인이 낚시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이 전진하는 이야기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산티아고'라는 한 늙은 어부가 낚시하는 이야기다. 산티아고는 84일 동안 물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물고기를 잡지 못한 날이 40일이 지나자 노인은 혼자가 되었다.

그 전까지는 노인과 함께 배를 타던 마놀린이라는 소년이 있었다. 마놀린의 부모는 계속 고기를 잡지 못하는 노인을 불운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소년을 다른 배를 타게 했다. 그렇게 늙은 어부 산티아고는 혼자가 되었고, 84일 동안 고기를 잡지 못했다.

85일째 되던 날, 늙은 어부 산티아고는 평소보다 더 먼 곳으로 배를 몰아갔다. 산티아고의 배는 5m가 안 되는 작은 배다. 그 배를 이끌고 육지의 해안선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멀리 나갔다.

85일째, 드디어 미끼를 물었다. 5m 넘는 청새치다. 너무 커서 낚싯줄을 당길 수가 없었다. 낚싯줄이 끊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물고기를 놓칠 수는 없다.

일단 청새치가 끌고 가는 데로 내버려 두었다. 그렇게 이틀 동안 더 먼 바다로 끌려가기만 했다. 낚싯줄을 놓치지 않으려고 온몸으로 지탱하면서 밤낮을 버텼다.

3일째 되던 날 지친 청새치는 보트 주변을 돌기 시작했고, 노인은 3일 만에 청새치를 잡을 수 있었다. 보트에 바짝 붙은 청새치를 작살로 찔러 죽이고, 배에 묶었다. 물고기의 크기는 18피트. 배보다 2피트나 더 큰 물고기였다. 배보다 더 긴 청새치를 배 옆에 단단히 묶어두고 배를 돌렸다.

돌아가는 길이 평탄하지 않았다. 상어들의 공격 때문이다. 첫 번째로 나타난 청상아리를 작살로 죽였다. 그러나 청상아리의 공격은 시작에 불과했다. 그날 밤 작살과 칼로 다섯 마리의 상어를 더 죽였지만, 청새치를 지키지는 못했다.

상어들은 집요하게 공격했고, 청새치는 뼈만 남아버렸다. 노인은 그렇게 덩그라니 뼈만 남은 청새치를 배에 달고 해안으로 돌아왔다. 해안에 도착한 노인은 집으로 돌아가 깊은 잠에 빠져들고, 사람들은 배에 묶인 커다란 뼈를 보며 놀란다.

희망 잃지 않고 전진하는 한 사람
어떤 시련에도 포기 않는 당당함
여전히 힘과 생기 있어 도전한다
부정적인 말이 한 마디도 없었다

처음 <노인과 바다>를 접했을 때가 20여년 전이었다. 그때는 혼자 물고기를 잡으면서 독백만 하는 이 소설이 무슨 내용인지도 잘 몰랐다.

그 후 다시 읽었을 때도 전성기 지난 늙은 어부의 사투로만 보였다. 늙은 어부는 84일 동안 물고기를 잡지 못한다. 사람들에게도 이미 잊혀진 존재다. 무리해서 먼 곳까지 고기를 잡으러 가야 했다.

물고기를 잡는 과정도 처절하기만 하다. 그 끝에 승리가 기다리고 있지도 않다. 물고기는 잡았지만, 이내 상어들에게 다 먹히고 만다. 외면당하는 불운한 노인. 소득 없이 돌아온 사투. 그것이 이 소설의 핵심 키워드라고 생각했다.

서평을 쓰기 위해 다시 읽은 <노인과 바다>는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다시 읽은 소설 속에, 전성기 지난 노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희망을 잃지 않고 전진하는 한 사람이 있었다.

어떤 시련에도 포기하지 않고 전진하는 당당한 사람이었다. <노인과 바다>는 늙은 노인의 실패한 낚시 이야기가 아니다. 시련에 굴복하지 않고 전진하는 사람 이야기다.

영화 <노인과 바다> 중 한 장면.
영화 <노인과 바다> 중 한 장면.

헤밍웨이는 늙은 어부 산티아고 모습을 초라하게 보지 않았다.

"모든 게 늙어 보였으나 두 눈만은 그렇지 않았다. 두 눈은 바다와 똑같은 색이었고, 쾌활한 불패의 기색이 감돌았다."

"이상한 어깨였다. 나이가 아주 많이 들었지만, 여전히 힘이 넘쳤다. 목도 여전히 튼튼했고, 노인이 잠들어 고개를 앞으로 숙였기 때문에 주름살도 그리 깊어 보이지 않았다."

헤밍웨이가 바로 본 산티아고 노인은 결코 실패한 노인이 아니다. 여전히 힘이 있고, 여전히 생기가 있는, 도전하는 노인이었다.

산티아고가 하는 말 속에도, 부정적인 말이 한 마디도 없었다. 84일 동안 고기를 잡지 못했을 때도 노인은 이렇게 말한다.

"85는 행운의 숫자야. 내일이 85일째 되는 날이니까."

자기 배보다 큰 물고기와 싸우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난 인간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견딜 수 있는지 보여줄 거야. 저 놈에게 말이야."

노인의 배에는 변변찮은 장비도 없다. 노인을 도와줄 소년도 없다. 오래도록 낚싯줄을 쥐고 있던 왼손은 이미 쥐가 나서 제대로 쓸 수가 없다. 그래도 노인은 이렇게 말한다.

"나쁘지 않아. 고통은 인간에게 아무것도 아니야."

청새치가 힘이 다 빠져 배 가까이로 왔지만, 노인 역시 힘이 빠져 제대로 물고기를 잡을 수 없었다. 그의 양손은 무감각했고, 눈도 잘 보이지 않았다. 그때도 노인은 실패를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렇게 중얼거린다.

"좋아. 또 한 번 시도하는 거야."

또 다시 시도했으나 결과는 같았다. 이제 몸은 기절할 것 같았지만 이렇게 중얼거린다.

"그래도 한 번 더 시도할 거야."

인간은 패배하기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인간은 파괴될 수 있지만 패배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시련, '84일'이 있다

첫 번째 상어가 공격을 막아내고, 노인은 이렇게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꼽는 <노인과 바다>의 가장 명대사다.

"인간은 패배하기 위해서 태어나지 않았다. 인간은 파괴될 수는 있지만 패배하지는 않는다."

84일간의 헛수고. 늙어버린 세월. 이제 가진 것도 얼마 없는 현실. 자신을 신뢰하던 소년도 곁에 없는 외로움. 게다가 사투 끝에 잡은 청새치는 뼈만 남았다. 상황은 그 어느 것 하나 긍정적이지 않다.

그러나 노인은 한 번도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았다.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도전했고, 다시 전진했다.

마지막 집으로 돌아와서 깊이 잠든 노인. 자고 있는 노인을 보며 헤밍웨이는 소설 마지막을 이렇게 끝맺는다. "노인은 사자 꿈을 꾸고 있었다."

삶은 시련이다. 시련 없는 삶은 없다.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84일'이 있다. 고통스러운 기다림의 시간을 견뎌야 한다. 누구에게나 놓쳐버린 세월이 있다. 누구에게나 혼자 남겨진 시간이 있다. 아무도 나를 기대하지 않는 순간이 있다.

하나님의 사람들도 그렇다.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시련이 피해가지 않는다. 성도는 시련이 없는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시련을 이겨내는 사람이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간 요셉. 형들에게도 버림받고, 직장에서도 누명을 썼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시련으로 끝나지 않는다. 함께하시는 하나님을 붙들고 이겨낸다. 결국 총리가 된다.

골리앗을 쓰러뜨린 다윗. 그에게는 열광하는 백성들도 있었지만 시기하는 왕도 있었다. 장군이 되었지만, 도망 다녀야 했다. 시련의 세월이다.

다윗은 그 시련 속에 무너지지 않았다. 시련을 이겨내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시련과 아픔은 있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성도는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현실을 이겨낼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한다.

"하나님께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이 보화를 담아주셨습니다. 이것은 그 엄청난 능력이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보여주시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짓눌려도 찌부러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으며, 궁지에 몰려도 빠져 나갈 길이 있으며, 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언제나 예수의 죽음을 몸으로 경험하고 있지만 결국 드러나는 것은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 안에 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고린도후서 4장 7-10절, 공동번역)."

인생은 장애물 달리기다. 장애물 달리기 선수는 장애물 앞에 멈춰 서지 않는다. 돌아가지도 않는다. 단지 뛰어 넘을 뿐이다. 장애물은 멈추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제 점프하라는 의미다. 그리고 계속 전진하라는 말이다.

성도에게도 장애물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힘도 있다. 그래서 장애물을 만나면 힘껏 점프한다.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이겨낸다. 하나님의 사람 은 언제나 전진한다.

박명수 목사 / 사랑의침례교회 담임, 저서 《하나님 대답을 듣고 싶어요》

출처: 아트설교연구원(대표 김도인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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