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제국을 건설한 프로이센의 정치인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말하길, "역사의 무대에서 신의 옷자락 소리가 나면 길을 비켜주어야 한다."라고 직고하였다. 불가능이란 단어의 말소를 외치던 나폴레옹도 "사람은 필연적으로 운명에 따라 산다."라고 하였다. 그 의미가 무엇인가. 사람의 생애가 사고와 행동과는 무관한 넓은 영역을 인정한 말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듯이 꿈과 계획도 필요하지만 인지 영역 밖에 있는 운명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도 중요하다.
정리하면 인간사는 두가지로 되어 있다. 하나는 인간의 지식와 의지로 발전한다는 사상이다. 둘째는 운명론적인 피안의 세계 앞에 굴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둘을 모두 인정해야 한다. 세속사와 구속사가 함께 동반된 인간사는 이원론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즉 어둠과 빛의 영역이다. 창세기에 나온 바와 같이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 역사는 그렇게 시작이 되었고 지금도, 미래에도 동일하게 계속 될 것이다. 기독교의 역사는 발전사관이나 진보사관이 아니다. 처음과 나중이 함께 있고 선과 악이 공존하는 구조이다.
선과 악, 인간의 의지와 운명,세속사와 구속사 모두가 하나님의 손에 있다. 이런 요소들은 마치 여러개의 톱니바퀴가 서로 맞물려 돌아가듯이 합력하여 하나님의 선을 이룬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을 별개로 취급하지 않으셨다. 이것이 교회가 역사 안에서 세상과 적대해서 살 수 없는 이유이다. 구조악 속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사역이 함께 있고, 역사 속에서 종말이 함께 있다. 구약의 종말론은 두가지인데 하나는 예언자적인 종말론과 묵시적 종말론이다. 전자는 역사 저 너머에서 다가오는 종말이며 후자는 역사 속에서 이미 실현된 종말이다. 이 사실은 성경과 인간의 모든 역사 무대가 진행과 결론이 함께 존재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장차 올 하나님의 나라와 이미 우리 속에 실현된 하나님의 나라는 신앙인의 삶 속에 이원적이면서도 일원적이다.
토마스 모어는 헨리 8세에 의해 단두대에 이슬로 사라지면서까지 사형집행관에게 금화를 주면서 이렇게 웃으며 말했다. "그대가 1초라도 빨리 나를 하늘나라에 보내주는 사람이야." 이 말은 냉소도 아니고 스토익적 설파도 아니었다. 그의 신앙이었다. 죽음과 생명이 함께 공존하는 순간에 그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운명을 지극히 자신의 삶의 필수적인 영역으로 받아들이는 자유함이었다.
세속사와 구속사의 차이는 없어졌다. 기독교는 이 역사에 목적이 있고 그것이 하나님에 의해서 주재되고 있슴을 확신하다. 역사의 애매성이란 불만은 좁은 시야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독교 신앙은 확실히 민족사나 개인사에 새로운 비젼과 희망을 준다. 어둠,패배,불의,가난,슬픔,아픔,실패, 수치 속에서도 거대한 자유를 경험하고 누리며 찬송할 수가 있고, 그 자유와 감사가 흑암을 극복하고 초극해 나가는 역사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 역사에서 필요한 것이 바로 이러한 탄력성이다. 이 힘이 바로 우리를 이데올로기의 굴종에서 해방시키고 현재의 고착된 문제들에 얽매이는 예속에서 튀어나와 희망을 가지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독교는 어떤 체제에 대해서도 자유로워야 하며 타협의 유혹을 받아서도 안된다. 다만 세상의 악과 어둠에 대해서는 높은 차원, 즉 영적인 하나님의 메시지로 그들의 행동과 사고의 구조를 바꿀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기독교의 역사관은 개인의 신앙관에도 매우 중요한다. 상처받는 삶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 상처는 치유를 위한 것이며 그 과정에서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이 땅에 끊이지 않는 어둠과 악에 대해 불평하지 말라. 이를 통해 우리의 구원과 영혼 소생의 목적을 이루신다. 고통이 죽을 때까지 그대를 떠나지 않거들랑 이 사실을 잊지말라. 하나님의 하시는 일, 즉 나를 향한 빛과 영생의 길을 늘 비춰주신다는 사실을 말이다. 인간의 고통은 하나님이 이 땅의 역사를 끝내실 때 끝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