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4월을 잔인한 달이라고 했던가? 오늘도 어김없이 봄의 향기가 우리의 삶 속으로 진하게 전해지는 4월이다. 이 시기에는 모든 거리의 풍경이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는 것 같다. 그저 바라기는 우리네 삶의 현장 또한 온전한 분홍빛으로 그저 그리스도 구원의 실존적 증거를 나타내는 곳이길 바랄 뿐인데, 이 시대는 어느새 화석화된 교리가 주된 자리를 차지하고 잘 조직화된 교회만이 부흥하는 곳으로 변해가고 있다. 미가서 6:8절이 말하고 있는 '겸손하게 주님과 함께 걸어가자'는 담백한 모토가 삶의 현장에서 실현된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4차 산업시대에 들어서 더욱 두드러지는 현상은 교회의 위기론이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현란하고 빠르게 진행되는 세상적인 가치관이 어느새 기독교인들의 문화 가운데 깊숙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위기와 변화의 시기에 과연 우리는 무엇을 붙잡고 나아가야 할 것인가? 아마도 단 한 문장 즉 '예수처럼 섬겨라'는 것만이 필요한 것 같다. 이 삶의 자세를 빼고서는 어떠한 것도 혼돈의 시대를 지나고 있는 지금의 교회와 우리의 삶의 위기를 헤쳐 나갈 수는 없는 것 같다.
진정한 섬김은 어떠한 특징을 가지고 있을까? 아마도 최소한의 조건은 '겸손'과 '존중' 일 것이다. 이것은 개인적인 차원을 넘어 조직 또한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는 '섬김의 단체'로서 세워져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유대 문화는 가부장적인 특징이 두드러진 서열의 문화다. 한국으로 말하면 조선시대의 양반 문화를 생각해보면 거의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지금같은 교통수단이 없었던 그리고 특유의 기후 때문에 당시에는 간단한 외출에서 다녀와도 신발을 신은 부분은 늘 흙먼지로 덥히게 마련이다. 그래서 집에 들어서면 그 집안의 종들은 주인의 발을 씻어주곤 하였다.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던 그 종들의 모습 그대로 수건을 허리에 두르신 후 제자들의 발 앞에 무릎을 꿇으신 분이 있으니 그가 바로 주님이시다.
이것이 바로 섬김의 리더십인 것이다. '섬김'은 변혁 그 자체이며, 참된 리더십인 것이다. 특히 다른 구성원들의 입장을 공감하고 그들의 눈높이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며, 권위보다는 격려를 통하여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하는 것을 '섬김' 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섬김의 리더는 기존의 구성원들에 대한 고정관념이나 편견을 저버리고 그들의 상황을 가슴으로 받아 드리려는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 때 조직의 구성원들은 숨어 있던 자신들의 잠재력을 발견하게 되고 리더의 비전에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된다. 이런 가운데서 조직이 성숙해지지 않겠는가?
건강한 가정과 교회는 분명 그 조직을 이끄는 리더가 어떠한 리더십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유교문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한국교회와 같은 권위적인 구조에서는 더더욱 섬김의 리더십이 요구될 수 밖에 없다. 과거에는 교회가 카리스마적인 영성으로 인해 성장했다면, 지금은 섬김과 존중에서 성장하는 구조로 변화되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는 수직적인 질서를 중요시하던 과거의 상황을 완전히 뒤엎어 지금은 수평적이고 낮은 자세로 섬김을 더 강조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부터 왕이나 권력자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았다. 그분은 누울 자리가 없어서 구유에서 태어났으며 (눅2:7), 멸시를 당하고 귀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사 53:3) 종의 모습으로 처음부터 오신 것이었다. 그러했기에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그리고 먼지 날리는 험한 길을 다니시면서 천국복음을 전파하고, 친히 병들고 연약한 자들의 친구가 되신 것이다. 이렇게 주님은 온 생애를 종의 모습으로 그리고 섬김의 삶으로 몸소 사셨던 것이었다. 이런 그가 거짓된 섬김의 자세로 제자들의 발을 씻겼다고 생각하는가?
오늘 당신이 섬김의 리더십을 실천하고자 한다면 꼭 응답해야 할 질문이 있다. 그것은 바로 "누구와 함께 이 험난한 인생의 길을 걸어 갈 것인가?" 라는 질문이다. 물론 이에 대한 대답은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라"는 미가서 6:8절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행하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할라크'로서 '걷는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즉 자신의 길을 오만과 교만이 아닌,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가운에서 걸어가라는 것이다. 크리스천이라 불리는 당신, 무엇을 두려워 하는가? 어서 그분의 손을 붙잡고 이 혼돈의 세상을 당당하게 헤쳐 나가길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