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지난 14일 불교 조계종을 방문했을 당시, 불교의 근본 가르침과는 거리가 먼 세속 불교의 단면을 보았다.
황교안 대표가 조계종 총무원장 승려와의 만남에서 합장을 하지 않은 사실을 가지고 불교 언론들에서 연일 문제를 삼은 것이다. 불교는 본래 강요의 종교가 아니다.
후에 들려오는 수행원들의 전언은 더욱 경악을 금할 수 없게 했다.
황교안 대표가 조계종에 당도하자, 승려들이 대웅전으로 먼저 가서 참배할 것을 요구하는 바람에 반배(半拜)를 하게 되었다는 전언이다.
정당 대표가 방문했을 때 그런 식의 강요는 전례가 없던 일이라며, 만약 그런 동선이 있다면 미리 사전에 협의를 거친다는 것이다.
게다가 승려들이 "로마에 왔으면 로마법을 따라야 한다"고까지 말했다는 것은, 필경 황교안 대표를 한 정당의 대표 정치인으로 대한 것이 아니라, 공공연하게 알려진 그의 기독교 정체성을 표적으로 겨냥한 것이라는 점을 상기할 때, 기습적인 폭력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서 더한 폭력은 기독교인 자신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황교안 대표가 반배를 했다는 사실에 분개하며, 가히 저주에 가까운 논평들을 연일 쏟아낸 것이다.
그런 논평을 접하고 있자니 황교안 대표를 중세 교회의 교황 정도로 생각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기독교 선교문화권에서 통용되는 두 개의 중요한 술어 및 개념이 있다. 하나는 '미시오 크리스티(missio Christi)', 다른 하나는 '미시오 데이(missio Dei)'.
황교안 대표의 반배에 상처받았을 분들을 위해서는, 우리가 할 수만 있다면 이교도와 함께 식사도 안 하고 상거래도 안 하는 그런 성지를 창설해 찾아갈 수만 있다면 좋겠다. 이런 지향성의 선교를 '미시오 크리스티'라 규정하면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만약 어렵사리 국밥집을 개업한 가난한 성도를 축복하고자 심방했을 때, 눈에 띈 메뉴판 속의 술을 가리키며 차마 "술을 왜 파십니까? 당장 금하십시오!"라고 할 수 없는 현실에, 옹색하나마 미시오 데이를 부여하는 것은 그리 그릇된 정의는 아닐 것이다.
'미시오 크리스티'는 한 마디로 '나 자신', 타자에게 적용하기 전에, 그릇된 상황을 발견할 수 있는 눈을 가진 성도로서 성숙한 나 자신에게 엄격하게 적용함으로써, 타자를 변화시키는데 그 선교적 본질이 있다 할 것이다.
이런 역사를 회고해 본다.
자고로 요셉은 야곱에게 장자권을 받은 인물이나 창세기 이후 그 이름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 건, 그가 이족혼을 했을 뿐 아니라 사실상 이집트 귀화인인 까닭이다.
다니엘이 본토 방향으로 늘 기도를 했지만 정작 포로 귀환 때 못 온 건 그가 늙어(죽어)서라기보다는, 이교도 제국 환관이었던 까닭이다.
먹고 살기 어려워 이교도 제국의 천한 궁녀로 보내버릴 땐 언제고, 멸족을 당해 다 죽게 생기니깐 이제 와서 "에스더, 네가 왕비 된 게 이때를 위함인 줄 누가 아느냐." 하더니만, 그 이후에는 '에스더서'의 정경성에 회의를 품는 것도 다 이들이 겪고 있는 비애이다.
이들 셋은 자신의 정체성을 훼손해가며 자기 민족을 보호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스러져간 인물의 예시이다.
이런 정치적 순교가 없었다면 3·1만세운동이란 것도 없었을 것이다.
이영진 교수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과 주임교수. '기호와 해석의 몽타주(홍성사)', '영혼사용설명서(샘솟는기쁨)',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홍성사)', '자본적 교회(대장간)' 등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