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 돌아와서도 주일학교에 다니다
고향이라고 홍천에 가서 보니 집은 폭격을 맞아 불타 없어지고 그 자리에는 쑥대만 키 높이로 자라고 있었다. 잿더미를 헤치고 집을 짓겠다고 했으나 자재가 없어 그도 못하고 전쟁에서 용케 살아남은 집에서 방 한 칸을 세내어 살 수밖에 없었다.
그때 어느 여 전도사가 옆방에 세를 들어오면서 또레 아이들을 모아다가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나는 바로 옆방에서 모이는 그 예배당에 단골이자 귀한 신자가 되어 신나게 열심히 다녔다. 몇 해가 지나자 홍천감리교회라는 이름으로 옛날의 향교 밑에 집 한 채를 세를 내어 교회를 개척하여 그 전도사와 함께 그곳에서 열심히 어린이 예배를 드렸다.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ㄴ’자 집인데 여자들이 한쪽에, 남자들이 다른 한쪽에, 남녀가 각각 구별된 자리에서 예배를 드렸다. 예부터 내려오는 ‘남녀칠세부동석’의 전통 때문이었다. 어느 추수감사절 날에는 ‘기쁘도다 오늘은 추수감사절’ 이란 노래를 나에게 독창을 시켰는데 처음으로 많은 어른들 앞에서 부르는 것이라 겁도 나고 얼어붙어서 가사를 잊어버렸다. 허겁지겁 두 번, 세 번 풍금에 맞추어 다시 노래를 부르면서 벌벌 떨었던 기억이 새롭다.
국민학교(초등학교) 6학년 때는 성탄절에 연극을 하였는데 그 내용이 북한군에 의해 교회가 박해를 받는 내용이었다. 전쟁 중에 북한 괴뢰군들이 쳐들어와 교회를 쓰겠으니 내 놓으라고 겁박하여 예배를 못 드리고 쫓겨날 판에 교회를 지키던 장로가 “나를 죽일 테면 죽여라! 나는 죽어도 교회를 내 줄 수 없다!”고 공산군에게 맞서다 그들의 총에 맞아 순교하는 내용이다. 그때 장로 역을 맡은 나는 몸에 맞지도 않는 큰형의 옷을 입고 연극을 했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극 중의 장로로 목숨을 걸고 교회를 지키다가 순교를 했던 내가 43세에 남서울교회에서 장로가 되었으니 참으로 하나님의 섭리가 오묘함을 깨닫게 되었다.
지나간 일들이 주마등처럼, 아니 영화의 스크린처럼 빠르게 스치며 지나간다.
홀어머니가 어렵사리 불타버린 터전의 시골에서 허물어지는 집의 재목들을 싸게 구입하여 형님이 끄는 우마차에 실어와 집을 지으셨다. 처음에는 초가지붕이었으나 나중에 함석으로 바꾸고 붉게 도색을 하여 빨간 집이 되었으니 그야말로 동화 속의 꿈만 같았다.
전쟁이 막 끝나고 휴전선에서 가까운 양구와 인제에 있는 부대의 군인들이 휴가나 제대를 하면서 이동할 때 유숙할 적당한 집이 없어 어머니는 무허가 하숙을 운영하셨다. 처음에는 수입이 괜찮았으나 나중에는 무허가라고 단속이 심했고 벌금형도 받았다. 심지어 어머니가 구류도 살아야 하는 어려운 생활이었지만 억척으로 우리 삼형제를 키우셨다.
나는 초등학교를 졸업할 당시에 홍천군에서 단 한 명만 받는 강원도지사 상을 받았다. 졸업하는 날 어머니께서는 막내가 최고의 도지사상을 받으니까 기분이 좋으셔서 중국집에서 자장면도 사 주셨다. 초등학교 때 전교 어린이 회장, 중학교 때 학도호국단 조직의 학생회장을 맡았고 사범학교 때는 대학교 약학과에 가려고 아무것도 맡지 않고 자칭 공부벌레가 되어 공부에만 열중했다.
사범학교로 진학하다
예전에는 흔히들 공부는 잘하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은 사범학교에 간다고들 했다.
내가 중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성적이 좋아야만 사범학교 입학원서를 써주었다. 그래도 다행히 성적이 괜찮아 사범학교에 입학원서를 낼 수 있었다. 홍천중학교에서 6명이 원서를 내고 함께 시험을 치러 춘천에 갔다. 시험당일에 학교 교정에 수험생들이 모였는데 200명 모집에 2,000명은 넘게 온 것 같았다.
사범학교는 초등학교 교사를 양성하는 것이 목표여서 남녀 공히 50명씩 4개 반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합격자 발표는 학교 게시판에 붙이지만 춘천방송국에서 합격자 발표를 먼저 했다. 아침 식사를 하는데 형이 윗방에서 라디오를 듣고는 “운길아! 너 합격했다!”라고 소리쳤다. 기쁜 마음을 금할 길 없었지만 애써 당연하게 생각하고 학교에 가서 합격증을 받아왔다.
사범학교 교육은 그야말로 전인교육이었다. 일반 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과목은 물론 이고 교사가 되기 위하여 교육에 관한 각종 과목이 있고 음악, 미술, 체육, 심지어 무용까지도 골고루 가르쳤다.
특히 1학년 땐 2주간 부속초등학교에 가서 교생실습을 하고 2학년 때는 한 달간 부속초등학교에 가서 교생실습을 했으며, 3학년 땐 한 달간 자신이 원하는 초등학교에 가서 실제로 학급을 맡아 수업을 하며 학급담임교사가 평가해주는 실습점수를 학교에다 제출해야 했다.
누구나 오르간과 피아노를 학교가 정하는 수준까지 처야 하는데 사범학교는 오르간과 피아노 교실이 50개가 넘었다. 졸업 때는 김영돈 교장선생님 앞에서 애국가를 4부로 연주해서 합격을 해야 졸업할 수가 있었다. 특별활동도 특별히 강조되어 초등학교에 가면 그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도록 열심히 공부해야 했다.
나는 1학년 때는 밴드부에 들어가서 내가 중학교 밴드부에서 불었던 클라리넷을 불지 않고 트럼본을 불었고 2학년 3학년 때는 약학대학 진학을 목표로 약학에 유용할 화학 반에서 실험 실습에 열중했다.
특이할 만한 것은 역시 학생들이 우수하다는 사실이다. 모두들 공부를 잘했다. 그리고 각자의 특기를 살려 초등학교의 교사가 되면 어떤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낼 것인가가 거의 결정지어 졌다. 만약에 내가 처음부터 약학대학에 가서 약사가 되고 싶었다면 사범학교에 오지 말고 일반 인문고등학교에 갔어야 했다. 그러나 가정형편이 어려워 우선 정부에서 학자금을 받아서 공부하기 위해 사범학교를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꿈을 접지 않고 계속 대학진학 공부를 한 것이다. 졸업을 앞두고 국가에서 대입 자격고시와 같은 당시 국가고사인 약학과 시험을 쳐서 합격증을 받았다.
그러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 대학에 갈 처지가 못 되어 진학을 포기하고 3년 동안 가정교사를 했다. 학생을 가르친 그 가정의 부모가 당시 5.16 혁명정부의 시책으로 전 공무원들이 코르덴기지로 된 재건복을 입어야 함을 알고는 재건복 한 벌을 맞추어 주었다. 나는 그것을 입고 사범학교 동기생 8명과 함께 1962년 3월 17일 강원도교육위원회의 발령을 받고 홍천군 교육청 교육장님 앞에 섰다.
하늘 아래 첫 동네에서 초등학교 훈장을 하다
8명의 교사 초년생들에게 교육장께서 ‘사령장’이라고 하는 교사 발령장을 주면서 “홍천군에서 가장 교육이 낙후된 내면으로 8명의 교사들을 전원 발령하였으니 가서 벽지 학생들에게 최신의 교육을 해 주기를 바란다.”고 훈시를 하셨다.
산간벽지로 발령을 받은 신출내기 햇병아리 선생 7명은 하루에 한번만 다니는 금강운수 버스를 타고 갔지만 나는 그 버스를 타지 않고 큰형님의 친구가 운전하는 트럭에 간단한 이삿짐을 싣고 희망에 부풀어 임지로 갔다. 동생을 오지에 내려놓고 돌아서는 형은 마치 딸을 시집보내고 돌아서는 친정아버지의 심정이었다고 나중에 술회하셨다.
하늘아래 첫 동네라고 불리는 산간벽지학교인 강원도 홍천군 내면 광원 2리에 있는 광원초등학교 원당분교는 ‘울고 왔다가 울고 간다’는 말 그대로 당시 가장 환경이 궁벽한 곳이었다. 앞산과 뒷산이 개울 하나를 사이로 붙어있어 아침에 세면도 개천에서 한다. 분교라고 해서 본교보다 더 벽지로 알고 갔는데 실제로 가서 보니 본교는 분교보다 20리 더 멀리 떨어져있고 학생 수도 본교는 80여명인데 분교는 140여명으로 배나 더 많았다. 본교보다 더 큰 분교에서 초년병 선생이라 5,6학년 담임을 맡고 두 학년 30명이 함께 공부하는 복식수업을 해야 했다. 그렇지만 벽지에 사는 가여운 어린이들을 잘 가르치겠다는 의욕으로 즐겁게 열심히 가르쳤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 원당 분교가 8명이 발령받은 학교들 중에 가장 가운데 위치해 있었다. 그래서 8명의 신출내기들이 주말에는 할 일이 없어서 처음에는 매 주 토요일이면 학교에 모여 재미있게 놀다 헤어졌는데, 그것도 시들해져서 나중에는 두 주에 한 번씩, 그러다가 한 달에 한 번씩 모였다.
우리들이 하나같이 근무를 잘 한다는 것을 교육청에서 알았는지 1년 만에 다들 좋은 학교로 발령을 받게 되었는데 나는 그 중에서도 제일 좋다는 나의 모교인 홍천초등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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