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가장 주목을 끌었던 뉴스는 단연 두 가지, 즉 아프가니스탄에 인질로 잡혀 있던 단기선교단원들이 풀려났다는 뉴스와 테레사 수녀의 진솔한 번민을 담고 있는 편지가 공개되었다는 뉴스였습니다.

풀려난 인질들의 프로필을 보니, 한 가족의 남매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 남매의 부모는 얼마나 고통이 심했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아렸습니다.

한 편, 20세기의 성자로 추앙받고 있던 테레사 수녀의 사적인 편지들이 공개되면서, 밖으로 드러난 그의 모습과는 달리,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신의 존재에 대해 끊임없이 번민을 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많은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이 사실을 두고, 한 편에서는 “거, 봐라! 종교는 다 허구란 말이다!”라고 반기는가 하면, 다른 한 편에서는 어거스틴의 <고백록> 이후에 나온 가장 심오한 고백록이 될 것이라고 반기고 있습니다.

이 뉴스를 읽는 제게는, 몇 주일 전에 예배 시간에 드렸던 목회기도가 생각났습니다. 아프간에 인질로 잡혀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저는 이렇게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주님을, 저희는 '창조주'라고 부르며, '역사의 주인'이라고 부릅니다. 하지만 때로 그게 진실이 아닌 것처럼 느껴집니다. 학교에서 가르치듯, 세상이 우연히 생겨난 것 같이 느껴질 때가 있고, 인간의 역사는 우연의 연속인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렇게 믿는 것이 더 합리적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 속에서 주님의 손길을 찾아보기 어려울 때, 저희는 이런 의혹에 빠집니다. 아프간 사태를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느끼고 있습니다. 주님, 저희의 믿음을 붙들어 주옵소서. 창조주의 손길을 육안으로 확인하고 싶어 하고, 주님이 역사의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TV 뉴스에서 확인하고 싶어 하는 저희의 불신앙을 고쳐 주옵소서.”

누군가 이 기도문을 두고서, “김영봉 목사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그의 믿음을 믿을 수 없다”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 날, 많은 분들이 이 기도에 감화를 받으셨습니다. 한 교우께서는 예배 후에 인사를 하면서 “기도문의 원고를 얻을 수 없겠습니까?”라고 물으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목사도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것과 같은 번민과 질문을 가지고 씨름한다는 사실에 위로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믿음이 좋다는 말은 결코 아무 의심 없이, 모든 것을 100% 믿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믿음의 속성 상, 100%의 믿음이란 불가능합니다. 누군가 그런 믿음을 가졌다고 주장한다면, 그는 속이고 있거나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 제게, “나는 95%가 믿어지지 않지만, 믿어지는 5% 때문에 믿고 있다”고 고백한 적이 있는데, 공감이 갔습니다.

육신을 입고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어서 영이신 하나님의 존재(existence)와 현존(presence)은 늘 ‘잡히지 않는 현실’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때는 그것이 너무도 분명하다가도, 또 어떤 때는 다 거짓말인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 ‘영혼의 밤’을 통과해야만 생명의 땅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테레사 수녀는 우리와는 다른 ‘성녀’가 아니었습니다.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한 인간이었고, 우리가 싸우는 번민을 그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길에 서서 “나에게 와서 빛이 되어 주세요”라는 부름에 끝까지 응답했다는 것에 그분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이 사실에 큰 위로를 얻고, 또한 용기를 얻습니다. (2007년 9월 2일)

글/ 김영봉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