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에서 소위 '종교적(양심적) 병역거부'에 대해 '정당한 병역거부 사유'에 해당한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11월 1일 현역병 입영을 거부했다 병역법 위반 등으로 기소된 '여호와의 증인' 신도 오모(34) 씨의 상고심 재판에서 대법관 9대 4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한 원심 판결을 깨고, 사건을 무죄 취지로 창원지법 형사항소부에 돌려보냈다.
이번 판결로 종교적 병역거부에 유죄를 선고한 2004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은 14년 3개월만에 뒤집혔다.
재판부는 오 씨가 병역거부 사유로 내세운 병역거부에 대한 종교적 신념이 "병역의 의무라는 헌법적 법익보다 우월한 가치"라며서 "형사처벌하는 것은 양심의 자유에 과도한 제한이 되거나 본질적 내용에 대한 위협이 된다"고 판단했다.
이어 "일률적으로 병역의무를 강제하고 불이행에 대한 형사처벌 등으로 제재하는 것은 소수자에 대한 관용이라는 자유민주주의에 반한다"며 "종교적·양심적 병역거부는 병역법에서 규정한 정당한 병역거부 사유에 해당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김소영·조희대·박상옥·이기택 대법관 등은 "기존 법리를 변경해야 할 명백한 규범적·현실적 변화가 없음에도 무죄를 선고하는 것은 혼란을 초래한다"며 이에 반대했다.
김소영·이기택 대법관은 "대체복무제 도입으로 해결해야 할 국가 정책의 문제"라며 "이 사건은 헌재 결정으로 사실상 위헌성을 띠게 된 현행 병역법을 적용해 서둘러 판단할 것이 아니라, 대체복무제에 대한 국회입법을 기다리는 것이 마땅하다"며 다수 의견을 반박했다.
조희대·박상옥 대법관도 "(다수의견) 심사판단 기준으로 고집하면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과 같은 특정 종교에 특혜가 될 수 있다"며 "이는 양심의 자유에 대한 한계를 벗어나고 정교분리 원칙에도 위배돼 중대한 위험 요소가 될 수 있다"고 전했다.
대법원에서 종교적 병역거부가 '정당한 병역거부 사유'라고 판단하면서, 관련 소송 결과도 바뀔 것으로 보인다. 10월 31일 현재 대법원에서 심리 중인 종교적 병역거부 사건은 227건에 달하며, 이 건들은 무죄가 선고될 것으로 예측된다.
그러나 이미 유죄로 확정판결을 받은 경우 구제받기 어렵다. 대법원 판결은 아직 재판이 진행 중인 사건에만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교계는 이에 대체로 회의적이다. 이날 한국교회언론회(대표 유만석 목사)는 "대법원의 이번 판결은 불과 3개월 전 헌법재판소가 '종교적·양심적 병역거부의 처벌이 합헌'이라는 결정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판결"이라며 "지금은 결코 평화가 정착된 것이 아닌데, 남북의 대치 상황과 우리 군의 병력 자원이 부족한 상황에서 이런 결정을 내리는 것은 법률이 가진 공공성과 공익성을 도외시한 것이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교회언론회 측은 "양심적이라고 하지만, 실제적으로 병역을 거부하는 사람들은 특정종교인이 99%를 차지하고 있다"며 "이는 최근 대법관들의 성향이 바뀌면서 나타난 현상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다. 이렇듯 헌법재판소와 대법원 등 최고 법률기관 사이에서도 결정과 법 해석이 다르다면 그 혼란은 어떻게 하고, 국방의 의무는 누가 책임지게 되는가"라고 비판했다.
지난 6월 헌법재판소의 종교적 병역거부를 처벌하는 병역법 88조 합헌 결정 당시 한국기독교연합(대표회장 이동석 목사, 이하 한기연) 측은 "대체복무제가 병역 기피자들의 도피처가 된다면 성실하게 입대하는 국민과의 형평성은 물론, 신성한 의무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역차별 문제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한기연 측은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이 자기들의 교리를 내세워 소위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신조어를 만들었으나, 이는 종교를 빙자한 병역기피에 지나지 않는다"며 "기독교인들을 비롯해 종교를 가진 모든 국민들은 종교적 양심이 없어 군대에 가고, 여호와의 증인 신도들만 양심이 있어 군대에 안 가도 되는 법을 국가가 제정한다면, 또 다른 이유로 국민의 4대 의무를 허물려는 시도가 반복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반면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총무 이홍정 목사, 이하 NCCK)는 인권센터 명의의 환영 성명을 발표했다. 이들은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법원의 옳은 판결을 환영한다. 이는 더 이상 전쟁을 위한 무기를 들지 않겠다고 결심한 젊은이들에게 큰 용기를 줬다"며 "특히 남북 군사 적대행위가 전면 중지된 11월 1일의 결정은 우리 사회의 평화정착과 화해의 길에 의미를 더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이제 한국 정부는 오늘 대법원의 결정에 따라, 인권과 평화의 새 시대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 판결은 우리 사회에 존재하는 다양한 양심적 신념을 존중하고, 인간의 존엄과 권리를 보장하는 옳은 결정"이라며 "한국 사회의 평화 정착과 민주주의, 그리고 인권 증진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또 "이제 남은 과제는 실질적인 대체복무제를 실현하는 것이다. 병역거부에 따른 대체복무는 징벌적 성격이 아닌 개인의 양심을 존중하며 현역 복무와 형평성에 맞는 복무를 부과해야 한다"며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자유는 헌재와 대법원의 결정이 바르게 이행되는 과정을 통해, 그리고 대체복무가 실질적으로 현실화됨에 따라 마침내 성취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