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 안창호 선생.
(Photo : ) ▲도산 안창호 선생.

도산 안창호 선생은 구한말 일제 하에서 온 몸과 마음을 바쳐 조국 독립을 위해 밤낮을 아끼지 않고 헌신했던 위대한 애국자이자, 민족의 지도자요 큰 스승이다.

 

3·1운동 1백주년을 앞두고, 선생의 순국 80주기를 맞이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그의 정신을 계승하며 민족을 새롭게 거듭나게 하고 화해와 협력에 기반한 통일조국을 이룩하는 데 힘써야 할 때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다시 도산 선생의 삶과 신앙을 되돌아보고, 혼탁한 한국 사회에서 도산의 진면목을 대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도산은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해 홍코우공원에서 윤봉길 의사의 폭탄투척 사건이 발생하자 그날 오후 프랑스 관헌에 체포되어 일경에 인도됐다. 도산은 같은 해 6월 초 인천을 거쳐 호송되어 4년형을 받고 서대문과 대전의 감옥에서 복역하게 된다.

또한 도산은 1937년 6월에 소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다. 수양동우회란 흥사단 계열 혁명적 독립운동단체로, 1926년 1월 서울에서 조직됐다. 이 사건으로 마침내 도산은 60세를 일기로 영원히 잠들게 된다. 그리고 3·1운동 백주년을 앞두고 순국 80주기를 맞이하게 됐다.

도산 선생과 기독교의 만남은 평생의 축복이었다. 18세가 되는 1894년까지 고향에서 서당 수업을 받으며 지내다, 청일전쟁이 끝나갈 무렵인 1895년 서울에 가서 공부할 욕심으로 상경하여 언더우드 선교사가 설립한 예수교학당에서 3년간 공부하게 됐다.

그가 기독교를 접하게 된 것은 바로 이 예수교학당을 통해서다. 신학문을 공부하는 동안, 도산은 그 학교의 접장으로 있던 송순명으로부터 전도를 받아 예수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이 학교는 뒷날 경신학교로 발전하게 된다. 성경을 기초로 근대 학문까지 가르치는 이 학교에서, 도산은 근대 사상을 받아들이며 자기 성장에 큰 계기를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기독교학교의 기독교 교육이 도산의 인격과 사상 형성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으리라는 점은 더 말할 필요가 없다.

도산이 기독교에 들어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나름대로 신앙을 고백하게 되는 것은 늦어도 1895년경으로 보인다. 복음을 받은 후, 도산은 곧 기독교의 진리를 전도하고 교회를 건립하는 일에 적극적이었다.

예수를 믿기 시작한 초기에 열심히 전도한 도산의 영향력은 강서군 일대에 여러 교회를 세우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강서군 탄포리(灘浦里) 교회는 도산이 평양에서 이곳으로 와서 전도하여 믿게 된 이들이 설립했으며, 그들이 안창호의 집에 모여 교회를 세운 것이다. 강서군 청산리교회도 안창호의 전도를 받은 이들이 교회를 세웠다.

이로도 교회는 도산의 전도를 받아 세운 탄포리 교회와 송호리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이 다시 세운 것으로, 이 두 교회 또한 도산 선생의 영향력으로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이 무렵 자신이 믿는 기독교의 복음이 자신을 구하고 민족을 구한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혼자서만 간직하지 않고 그것을 널리 전파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1897년 조직된 독립협회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한편, 이후 5년간 경향 각지를 유세하며 청년웅변가와 애국운동자로 명성을 떨치게 됐다. 고향에 돌아와서는 점진(漸進)학교를 세워 경영하다, 1902년 미국 유학에 오르게 되었다.

도산은 미주 본토에 상륙한 한인들이 상부상조와 함께 자신들의 품위를 높이기 위해서는 조직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1903년 9월 23일 샌프란시스코에서 상항친목회를 조직, 회장에 피선돼 교민을 지도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전에 비난받던 한인사회가 몰라볼 정도로 정화되고 미국인들로부터 칭찬을 받게 되었다.

그는 1904년 로스앤젤레스 인근 리버사이드로 이주하여 기독교가 운영하는 신학 강습소에서 영어와 신학을 수업하게 되었다. 이어서 1905년 한인친목회를 발전시켜 샌프란시스코에서 공립협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이 됐으며, 그 해 퍼시픽가에 공립협회 회관을 건립함과 동시에, 11월 20일 <공립신보>를 창간했다.

1907년, 29세의 나이로 일본을 거쳐 귀국한 도산은 신민회를 조직하고 대성학교와 마산도자기회사 및 태극서관을 일으키는 등 국내 민족운동을 서두르게 됐다. 이 무렵 그는 대성학교 학생들을 위해 기독교 신앙을 지도했다. 그는 자신의 젊은 학창 시절 기독교 교육이 큰 도움이 되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910년 도산은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지는 것을 보면서, '거국가'를 남기고 망명의 길에 오른다. 4월 중순 중국 청도에 이르러 '청도회담'을 개최하고 다시 러시아행 비자를 받기 위해 북경에 갔다가 상해·연태·청도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 독립운동을 전개한다. 그는 니콜리스크의 최관흘 목사를 방문, 그와 함께 국민회 확장과 기독교 전도활동에 나서기도 했다.

3·1 운동이 발발했을 적에 도산은 1919년 3월 13일 북미 샌프란시스코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위원회 석상에서 '3·1운동을 계승'이라는 제목으로 연설을 한 것으로 알려진다. 여기서 그는 하나님의 지휘명령 아래 독립운동을 추진할 것이라는 의지를 표명하는 한편, 종교계(기독교계)가 한국 기독교도의 참상을 널리 고하고 위하여 기도하며, 비인도적인 일본인의 만행을 세계에 폭로해야 할 것을 당부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에 있다가 다시 귀국하여 중국과 시베리아를 경유해 또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흥사단(흥사단)을 조직했다. 샌프란시스코, 뉴욕, 시카고, 상해, 그리고 멕시코에까지 그 지부를 두는 독립운동을 전개했는데, 이는 그가 얼마나 광범위한 독립운동을 펼쳤는지 짐작하게 한다.

더구나 교통과 통신이 불편했을 당시, 도산은 태평양과 아시아 대륙을 종횡으로 수차 뛰어다녔다. 이런 활동은 오늘날에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이역만리에서 그 고초가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도산은 "우리 2천만 동포가 모두 손에 신약전서를 한 권씩 가지는 날에는 희망이 있다"고 외쳤는가 하면, 민족의 희망을 기독교에서 발견한 선각자이며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또한 나라를 위하여 밤을 밝히면서 근심하고 회개하면서 희망을 가졌다.

그는 기독교에서 민족의 희망을 보았다. 그러기에 선교사들이 가져다준 정교분리의 신앙이나 민족이 빠진 신학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의 신앙은 당시의 민족현실을 외면하지 않으려 했고, 민족 문제를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그 앞에서 해결점을 찾으려 했다. 그는 민족문제를 추구하는 신앙인인 한편, 의와 사랑의 보편적인 가치를 갈구했던 기독교인이었다.

도산 선생이 가진 사상의 근원은 기독교의 성경과 체험적 신앙이라 할 수 있다. 그가 18세의 나이로 서울에 올라와서 선교사들을 통해 구세학당에서 처음 만나게 된 예수 그리스도가 그의 일생을 이렇게 이끌었던 것이다.

특히 도산의 독립운동은 다른 어떤 독립운동 지도자들보다 큰 틀과 구체적 계획을 갖춘 뛰어난 경륜이 담겨 있었다. 그는 좌우파의 대립과 갈등 속에서도 통일단결을 일관되게 추진했다.

순국 80주기를 맞아 도산 선생은 조국의 독립과 번영을 위해 헌신한 애국자의 본보기이자 국가 지도자의 귀감으로, 선생의 신앙인격과 교훈은 시대성을 초월해 우리 속에 현존하고 있다.

이효상 원장 (한국교회건강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