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신학'이란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하였다는 뜻을 담은 용어이다. 이 용어 사용자들은 '대체신학'을 반대한다. "만일 교회가 마지막 때에 이스라엘 편에 선다면, '대체신학'은 근절되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대체 신학은 근절될 필요가 없다. 대체신학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체 신학이란 용어는 혈통적 이스라엘의 회복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설정한 용어일 뿐이다. 이것은 전천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자신들이 주장하는 천년설이 없다 하여 무천년설이라고 말한 것과 동일한 패턴이다. 사실 무천년설은 정확한 말이 아니다. 무천년설이라는 신학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천년설이란 말의 뜻은 천년왕국이 없다는 뜻인데 소위 무천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적어도 천년왕국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단지 전천년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주장하는 그 천년왕국이 없을 뿐이다. 무천년설은 지금 초림과 재림 사이의 이시대가 천년 왕국 시대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무천년설이라는 용어보다는 '현천년설'(present millenium)이란 용어가 정확하다. 이러한 패턴이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한다고 하여 대체 신학이라고 주장하는 경우에도 발생한다. 사실 교회가 이스라엘을 대체하는 측면은 있다. 그러나 인트레이터가 주장하는 방식의 대체가 아니다. 인트레이터가 대체라고 할 때에 그것은 구약과 신약과의 관계에 불연속성만 있을 때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분명히 둘 사이에 그러한 불연속성이 존재한다. 신약의 교회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으로 말미암아 구약의 이스라엘이 경험할 수 없는 탁월한 시대를 경험한다. 이러한 면에서 세례 요한은 자신을 신부의 친구라고 하고 예수님과 신약의 교회 공동체를 신랑과 신부로 비유하면서 "신부를 취하는 자는 신랑이나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가 크게 기뻐하나니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요 3:29)고 말하면서 마침내는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 3:30)는 멋진 말을 남기고 있다. 이것은 신약의 교회와 구약의 이스라엘 사이에 불연속적인 측면이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동시에 교회와 이스라엘 사이에 연속성이 존재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과 교회와의 관계는 약속과 성취의 관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구약의 여느 약속과 신약의 성취와의 관계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연속의 중간에 바로 예수님이 계신다.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 오셨다고 하면서 끝내는 12사도를 세우셔서 교회 공동체를 세우는 작업을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 자신이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을 이어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신다. 예수님을 통해 구약의 약속들이 신약에서 재해석되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신약 성경 저자들은 문맥에 따라 구약과 신약 사이에 다시 말하면, 이스라엘과 교회 사이에에 연속성이 강조되기도 하지만 또한 불연속성이 강조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이 둘 사이에 이러한 두 가지 측면이 모두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대체 신학'이란 적절한 용어, 합당한 용어가 아니다. 출처: 이필찬 교수의 성경연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