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라어 문법 구조 중 '강조형 이중 미래 부정형 + 과거 가정형'이 있다. 강조형 이중 미래 부정형 구조는 현재 가정형과는 쓰이지 않는데, 그 이유는 과거 가정형이 지니고 있는-그러나 현재 가정형에게는 없는-동사적 상(相) 때문이다. 그러므로 화자가 현재 가정형 대신 과거 가정형을 선택한 이유는 과거 가정형에만 내재되어 있는 동사적 상을 부각시기키 위한 의도적 장치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두 가정형이 지니고 있는 동사적 상의 차이는 무엇일까? 현재 가정형의 상은 미완료 형식인 반면 과거 가정형의 상은 완료 형식이다. 현재 가정형이 사건을 가까이에서 부분적으로 관찰하는 관점이라면 과거 가정형은 사건을 한 발 뒤로 물러나서 총체적으로 보는 관점이라는 의미이다. 아주 쉽게 말해서 전자가 "부분적 서술"의 의미를 지닌다면 후자는 "전체적 요약"의 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므로 발화자이신 예수님께서 '강조형 이중 미래 부정형 + 과거 가정형'의 구조를 사용하셨다는 의미는 어떤 일이 있어도 결단코 일어날 수 없는 미래의 일을 압축하여 강하게 전달하신 것으로 봐야 한다-문장의 주어이신 예수님께서 거짓말을 못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문법 구조가 전달하는 의미는 변개될 수 없다.
이런 문법적 틀을 고려하여 요한복음 6장에 있는 구절들을 보면 예수님께 나아가는 자들이 결코 경험할수 없는 미래의 일들이 무엇인지 볼 수 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로 오는 자는 결단코, 절대로 배고프지 아니할 것이라 (οὐ μὴ + διψήσει)." -요 6:35
예수님께 가는 자들은 결단코, 절대로 배고플 수 없다고 되어 있다.
"나에게 오는 자는 내가 결단코, 절대로 내쫓지 아니하리라 (οὐ μὴ + ἐκβάλω ἔξω)." -요 6:37
이곳에는 예수님께 가는 자들은 결단코, 절대로 배고플 수 없다고 되어 있다.
위에 언급된 두 구절은 예수님께 가는 자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배고플 수 없고, 버림받지 않는다고 되어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예수님께서는 우리 영혼의 허기를 온전히 채우시는 생명의 떡이시고, 한 번 품은 자들은 결단코 버리지 아니하시는 지조와 절개의 신랑이시기 때문이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다시 언급하지만 예수님께서 '강조형 이중 미래 부정형 + 과거 가정형'의 구조를 사용하신 의도적 이유는 당신께 오는 헐벗고 굶주린 자들을 반드시 내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영원토록 차고 넘치도록 채우실 것임을 약속하시고, 약속하시고, 또 약속하기 위함이시다. 그러므로 위에 언급된 약속은 거짓말을 못하시고,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곧 예수님의 변개할 수 없는 참된 약속이라는 의미다. 이처럼 자신의 약속에 신실하신 예수님 때문에 그분께 나아가는 모든 자들은 예수님 안에서 완전하고완벽한 충족감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존 맥아더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우리의 필요에 대한 그분의 공급하심 안에서 완전한 충분성을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부족한 그리스도인이나 결핍한 그리스도인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직 이런 예수님을 경험하지 못한 분들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분의 약속을 믿고 예수님께 온전히 나아가라. 세상을 이기신 만유의 주께서 당신의 잔을 차고 넘치도록 채우실 것이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