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하나님을 믿는 종교인들로부터 고소를 당하고, 억울한 재판에 소송 중이며, 사랑했던 사람들로부터 배신을 당한 상황이라면 기뻐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황당한 사건을 당하고, 납득하기 힘든 비극을 만났을 때에도 우리는 감사하기가 어렵겠지요. 하루 하루가 견디기 힘들다고 느끼는 형편이라면 더욱 그럴 것입니다. 죽음을 앞둔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죽기 전 날 주님은 제자들과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 끝에 이런 말을 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내 기쁨이너희 안에 있게 하고, 또 너희의 기쁨이 넘치게 하려는 것이다."(요15:11)
슬퍼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서 기뻐하다니..., 감사하다니....,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병든 사람들의 심정을 공감하시고, 죽은 아들의 장례식에서 만난 과부를 위로하시던 주님은 감수성이 예민하신 분입니다. 그런데 현실 파악을 못 하시는 것도 아니시고, 사람들의 속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죽이고 싶도록 미워하는 사람들과 상황에 따라 돌변하는 사람들 앞에서, 주님은 고요함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여러분은 왜 주님께서 이러셨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저 짐작하기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과의 변하지 않는 관계에 집중하셨기 때문이라고 이해합니다.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 안에 있고, 하나님은 늘 주님 안에 거하신다는 것을 주님은 믿었습니다(요14:11). 하나님은 언제나 자신의 말을 들어주신다는 사실에 감사한 마음을 품고 사셨습니다(요11:42). 주님과 하나님은 하나이셨던 것이지요(요10:30). 믿음으로 하나, 사랑으로 하나, 뜻이 하나가 되셨기에 괴로운 현실에서도 주님은 항상 기뻐하실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주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시면서, 동시에 또한 기뻐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인들이 하나님께 나오고 싶은데 그것을 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 무엇일까요? 저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기쁨 없는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처한 삶이 힘들고, 많은 문제로 심각한 상황인 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심각한 것과 침통한 것은 다르지 않을까요? 진지하고 심각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시무룩한 얼굴을 하고, 엉뚱한 사람에게 화를 내며, 날마다 울면서 지내야 할까요? 어느 선교 단체는 유머 감각이 없는 사람은 절대로 선교사로 파송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자신과 주변 세상을 웃어 넘길 줄 알아야 선교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웃을 줄 아는 사람은 성숙한 사람입니다. 대개 미숙한 사람들이 무표정하고 따지기를 잘 합니다. 웃을 줄 모르는 사람은 성품이 모질고 까다로운 경우가 많습니다. 자신의 실수도 다른 사람의 실수도 용서할 줄 알아야 행복합니다. 남의 실수를 속에 꽁하고 품는 사람에게 행복한 감정이 꽃을 피울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언제나 사랑이십니다. 과거 내 인생도 사랑하셨고, 지금도 나를 사랑하시며, 앞으로 날 위한 계획도 전부가 사랑의 시나리오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기쁨이요, 사는 재미입니다. 환경, 죄와 불순종, 사람, 스트레스, 돈 문제 등은 우리에게서 기쁨을 빼앗아가는 주범들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이겨낼 힘은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힘입니다. 주변엔 쓰라린 사람들 천지입니다. 우리가 받은 사랑과 기쁨이 그들에게 필요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