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민수 교수(미드웨스턴침례신학대학원)
심민수 교수(미드웨스턴침례신학대학원)

온 나라가 국정농단 사태로, 탄핵 문제로 들끓고 있다. 보수와 진보를 넘어 국정 농단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더 높은 파고를 일으키는 가운데, 반전의 모멘텀을 잡으려는 일부 정치 기득권의 또 다른 시도들도 나타나고 있다. 시간이 갈수록 밝히려는 자들과 덮으려는 자들의 정치 투쟁이 더 치열해질 전망이다. 탄핵이 가결되면서 기독교계에서는 진보와 보수 간에 견해차를 드러내고 있다. 진보는 탄핵 가결에 크게 환영을 표했지만, 보수는 탄핵 가결 후의 정국 안정에 초점 맞추고 있다. 사실 이러한 입장차는 교계가 지닌 기독교 진보와 보수 개념이 성경적 관점보다는 정치적 통속 개념에 포획된 듯한 느낌을 준다. 자칫 빠지기 쉬운 오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기독교 보수와 정치 개념에 대한 인식을 바로 잡아야 할 때다.

한국 기독교계에서는 기독교 보수에 대한 개념을 놓고 크게 두 가지 오해가 있어 왔다. 첫째 오해는 오직 전통 교리를 강력하게 주장만 해도 보수라고 착각하는 경우이다. 현실의 윤리적 실천과는 무관하게 교리적 주장에만 집착하는 ‘인지 부조화적 보수’ 개념이다. 이는 ‘내면화된 신앙’의 외연화로서의 삶이 보여주는 ‘신앙의 통전성’을 간과한 결과로 보인다. 대개 이런 보수는 관습적 전통 교리 수호를 내세워 자신들의 정통성을 주장하나, 실제로 성경이 보여주는 진정한 신앙인의 온전성을 실현하기는 어렵고 오히려 강박적 종교 집단으로 변질될 수 있는 위험성이 있다. 이러한 양상은 결국 신약시대 대표적 유대 종파로서 초기의 동기에서 벗어나 서민들 위에 군림했던 종교적 형식주의의 대표 격인 바리새파의 현대적 변형에 불과할 수 있다.

둘째 오해는 기존의 정치그룹이 주장하는 보수와 기독교적 보수를 동일한 개념으로 인식하는 경우이다. 통상적으로 세속적 정치그룹에서는 보수를 기존의 기득권 체제 유지와 동일 선상에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정치적 보수 이데올로기의 이상과 가치가 원래 그런 것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한국 정치 상황에서는 기득권 체제 유지를 그대로 반영하는 보수 개념이 강하다. 문제는 이런 기득권 보수들과 맥을 같이하면서 이들의 사고에 종속된 기독교계 인사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대개 기득권 그룹과 지근거리에 있으면서 긴밀한 교제권을 유지하고 있는 경우가 많아 성경의 예언자적 도전과는 반대로, 왜곡된 인식에서 비롯된 사랑을 전제로 기득권 그룹의 입장을 두둔하기에 바쁘다. 이런 행태는 신약시대 종교 권력층에 속하면서 필요에 따라 기득권 정치세력인 헤롯파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던 사두개파의 현대적 재현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기독교의 진정한 보수 개념은 성경의 계시가 담고 있는 가치를 총체적으로 일관성 있게 보수하는 것으로부터 비롯되어야 한다. 성경의 가치를 총체적으로 보수한다는 것은 성경 계시 전체가 제시하는 성경적 가치를 일부 혹은 부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총체적으로 일관성 있게 수용함을 의미한다. 이는 성경의 일관성 있는 맥락과 함께, 기록 당시의 역사적 사회적 배경을 면밀히 검토하여야 함을 전제한다. 흔히 로마서 13장의 해석을 놓고, 하나님의 법적 질서를 제시하는 전체 맥락과는 상관없이, ‘모든 권세에 대한 복종’의 의미를 제왕적 정치 권력자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해야 한다는 의미로 파악하고, 이렇게 하는 것이 성경 말씀을 준수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은 성경 본문에 대한 대표적인 오석이다.

한국 교계의 일부 보수 그룹은 한동안 권세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허술한 개념을 갖고 있었다. 권위와 권력의 구별에 있어서 특히 그러했다. 하나님의 일반 은총으로서의 법질서가 갖는 권위와 이 법질서를 유지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권위를 부여받은 인간 권력자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누구도 하나님의 법질서의 권위를 넘어서서는 안 된다. 성경은 모든 인간이 죄인이며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인 동시에 궁극적 심판의 대상이라는 엄정한 사실을 가르친다. 모두가 하나님의 법질서의 권위 아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실의 정치 권력자에 대한 사법적 사실조차 판단을 유보해 버리는 것은 보수적 신앙 가치를 저버리는 것이 될 수 있다. 잘못된 것은 잘못된 것이고, 정의롭지 못한 것은 정의롭지 못한 것이라는 견해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 이것이 기독교적 가치를 일관성 있게 보수하는 길이다.

한국 기독교계에 바로잡혀야 할 또 하나의 개념이 있다. 바로 ‘정치’ 개념에 대한 인식이다. 기독교 진보 계열에서는 복음의 본질을 뒷전에 둔 채 정치 참여에만 집중하는 주객전도의 모습을 보이는가 하면, 기독교 보수 계열에서는 정치라 하면 종교와는 상관없는 세속적 삶의 일환으로 보고 신앙 영역에서 배제되어야 할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다. 전자가 신앙의 핵심적 요소를 망각한 채 부수적인 주변 거리에 몰두하기 쉽다면, 후자는 신앙 범주를 삶의 일부 영역에만 국한하는 성속 이원론적 사고에 매몰되기 쉽다는 말이다. 물론 정치와 관련하여 진보와 보수, 즉 양극적 영역으로 구분하는 것이 기독교계 안에서 마저 타당하냐 하는 문제는 더 많은 논의를 요구한다. 그러나 실제로 이런 구분은 우리의 현실이 되고 만 것도 사실이다.

오늘날의 정치는 과거 절대왕정 시대나 봉건시대의 개념과는 사뭇 다르다. 신분제도의 고착화로 신분이 세습되었던 과거 시대, 다시 말해, 신분에 따라 정치 입지가 차별화되었던 시대에 일반 민중들은 정치적 행위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로부터 배제되어 있었던 것이 당시의 시대상이었다. 그러나 이와는 달리, 현대의 민주주의 정치 제도 속에서 개개인은 현실의 책임 있는 존재로서 각자 분명한 정치적 입장과 태도를 선택하고 행동할 민주 시민의 책무를 지닌다. 이로써 오늘날 모든 개인은 이미 정치적 존재로서의 정체성을 확보하고 있는 것이다. 관련하여, 민주 국가 제도 속의 구성원인 기독인도 신앙 양심에 따른 책임 있는 정치적 행동이 요청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적 보수를 추구하는 신앙인이 역사적 ‘삶의 자리(Sitz im Leben)’에서 책임 있는 존재로 서는 길은 무엇일까? 이번 국정 농단과 관계된 사람 중에는 지역 교회에 소속된 사람들이 있는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이런 정황을 두고 어떤 정치인은 이 사태에 기독교계가 관련되었다느니 하는 터무니없는 논리를 펴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들이 무슨 말을 하든, 농단에 관련된 사람들이 어느 교회 뜰을 밟았든, 그들이 기독교 진리와 무관한 사람들인 것은 확실하다. 기독교의 보수란 신학 노선의 보수로 그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기독교의 진정한 보수는 성경이 추구하는 가치를 온몸으로 보수하는 것이다. 이는 역사의 현장에서 정확한 분별력을 가지고 신앙인으로서 정직한 자세를 취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 도피적 자세나 무관심의 태도는 용납될 수 없다.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시간을 포착하고 여기에 용기 있게 반응하는 시대의 양심이 요청되는 것이다.

분명히 기억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이다. 한국 교회의 믿음의 선배들이 역사의 현장 속에서 보여 주었던 신뢰할만하고 자랑스러운 자취들 말이다. 초기 믿음의 선진들은 우상숭배의 폭압과 강제 속에서 순교로써 조국 교회의 순전함을 지켜냈다. 그 안에서 복음의 불씨를 가지고 겨레의 해방과 독립을 위해 몸 바쳐 헌신했다. 그리고 기독교적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소수였던 그 시절에도 사회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그들은 신앙 안에서 정직했고 믿음 가운데서 옳았으며 행동 면에서 모본이 되었다. 무엇보다도 교회는 신학 노선과 교단 배경을 넘어 바로 그런 모습의 본산이 되었고 강단은 그런 삶을 선포했다. 그들이야말로 기독교적 가치를 분명히 일관성 있게 지켜낸 기독교의 진정한 보수들이었다. 과연, 이 시대 어디서 이런 가치의 보수를 찾을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