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종 박사
오성종 박사

기독교학술원 제53회 월례기도회 및 발표회가 '사도 요한의 영성'을 주제로 1일 오후 서울 한국교회백주년기념관 2연수실에서 열렸다. 이날 오성종 박사(전 칼빈대 신대원장)가 발표자로 나섰다.

'요한의 영성: '영생'이신 예수 그리스도 -요 1:1~18과 14:1~6; 요일 1:1~4을 중심으로'를 제목으로 발표한 오성종 박사는 "요한의 영성은 '영원한 생명' '영원한 삶'이다. 죽어서 또는 내세에 비로소 경험하게 되는 영원한 삶이 아니라, 성부와 성자와의 교제 가운데 이 세상에서 누리는 영원한 삶인 것"이라고 했다.

그는 "요한복음의 핵심 주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그를 믿는 자들이 누리는 영생"이라며 "그리고 이 두 진리는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성자 안에 생명이 있고(1:4), 그에게 '영생의 말씀'이 있으며(6:68), 그 자신이 '생명'이시다(11:25; 14:6). 요한1서에서도 같은 교훈을 증언한다"고 했다.

특히 오 박사는 "20:31(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의 진술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일은 기독론에 속한 문제이나 또한 그 일은 바로 영생을 얻는 것과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며 "두 주제가 아니라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하나의 문제"라고 했다.

그는 "요한 문헌에서의 성자는 '생명'이시며(요 11:25; 14:6) '생명의 말씀'(6:68; 요일 1:1~2)이시며, 그를 믿는 것은 '생명의 떡'을 먹고 '생명의 음료'를 마시는 것(요 6:35, 48, 53~58)을 의미한다"면서 "기독론과 영생론을 따로 떼어서 보는 해석은 학계의 요한 문헌 연구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부적절한 접근 방법이다. '영생' '생명'이라는 주제는 요한복음(과 요한1서)에서 여러 주제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바로 중심 주제인 것"이라고 역설했다.

오 박사는 또 요한복음 14:1~6과 관련,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는 표현을 해석할 때 '내 아버지 집'은 어디이고 '거할 곳'은 어떻게 생긴 것인지에 대한 물음은 결국 바른 이해의 길에서 벗어나도록 오도하는 것"이라며 "왜냐하면 요한복음 저자는 이미 2:16에서 예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는 독특한 표현을 써서 지칭하셨다는 사실을 언급하고 있으므로 14:2에서 이 표현이 다시 등장하였을 때 처음 언급되었을 때의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일차적으로 고려할 수 있는 최선의 접근 방법일 것"이라고 했다.

그는 "저자는 2장에서 예수께서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 지칭하신 후 계속하여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는 말씀을 하셨다는 사실을 보도하되(2:19), 주님의 이 말씀은 성전 된 자신의 몸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었음을 제자들이 주님의 부활 후에 깨닫게 되었다(2:21)는 주석을 첨가했다"며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 부르신 것은 당시 유대인들에게 참람한 표현으로 들릴 수 있는 것이었으며, 또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는 말씀 역시 유대인들에게 참람한 말로 들렸을 텐데, 예수님의 메시야 사역 초창기에 이미 그의 이러한 언어 사용과 선언이 있었다고 보도하고 있는 것은 바로 요한복음 저자의 신학과 교훈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라 보아야 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오 박사는 "주님은 또 예루살렘 성전과 관계하여 사마리아 여인과의 대화하시는 중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오는데,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며, 오직 '성령과 진리 안에서 예배드릴' 것이고, 바로 메시야이신 자신의 때에 그렇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4:19~26)"며 "그러므로 14:2의 '내 아버지의 집에 거할 곳이 많음'은 하늘에 있는 예수님의 본향 또는 신자들이 죽은 후 가게 될 천당에 있는 '(아름다운) 집'을 말하지 않고 오히려 제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게 되되 예수님도 함께 계시는 그곳에 함께 있으면서 하나님 '아버지'와 친밀한 사랑의 교제를 가지는 곳이라는 의미로 해석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해석"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결론적으로 요한1서와 요한복음의 저자는 장르와 독자 상황의 현저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일하게도 신자에게 '성부와 성자와의 사랑의 교제를 통해서 영생을 누리며 사는 자가 되어라'는 것을 강조하고 가르친다"며 "이를 위해 죄를 짓지 않는 거룩과 아가페적인 사랑 실천의 삶, 곧 성화의 삶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용어를 빌려 표현하자면, 그러한 삶이 바로 영성 형성의 삶이 되는 것"이라고 역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