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참가한 이번 Native American Indian 선교 여행에서 내 나름대로 부딪힌 벽이 있었다. 이 벽을 실감하고, 또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가를 줄곧 생각했다. 이러한 벽은 아마도 종교가 다른 이민족 전도의 전형적인 예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주어진 이틀동안 Robinson Rancheria 의 집들을 가가호호 두번씩 방문했다. 첫 날은 서로 얼굴을 익히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창조주가 있었다. 이곳 주민들은 기본 생활이 보장되어 있어, 하나님을 사모하는 애틋한 마음이 없었다. 땅의 중요성과 땅을 편만하게 흐르는 물위에 창조주가 함께 계신다고 말한다. 나는 그 신이 바로 하나님이며, 창세기 1장 3절에 신은 수면위에 운행하신다는 표현을 인용했다.

유럽인인 예수에 대하여 거부감이 있는 이들이 있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이유를 가지고 예수가 그 쪽으로 태어나신 것 뿐이라고 했더니, 지금까지 자기네들은 7명의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다고 한다. 지식적으로 어렴풋이 알고 있는 성경을 자기네들 종교로 덮어 씌워버려, 일시적으로 왔다가는 우리의 선교 방식에 한계가 있음을 인정해야 했다. 모두들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이들에게 지속적인 만남과 교육이 필요했다. 가가호호 방문을 하면서 이름과 그들의 신앙정도의 표를 만들어 계속적인 활용의 미를 살려야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첫번째 만난 Micky 라는 할머니는 몸이 불편하여 집안에 병원침대와 링겔을 꽂고 있었다. 자신은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였지만 예수님에 대해 아는 지식은 없었다. 이런 저런 얘기 끝에 치유의 기도를 해 주었다. 몸이 아플때마다 예수님께 기도하시라 했더니 그러겠다고 했다.

두번째 만난 Julie 는 4 아이의 엄마였다. 문마다 철창문으로 되어 있고, 들어 오라는 말도 하지않고 문만 삐쭉이 열고 이야기 하기조차 구찮아 한다는 답사팀의 보고에 망설여졌지만, 대체로 문들을 잘열어 주었고 집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었다. 우리 한국 사람이나 인디안이나 다 같은 조상을 가졌다는 사실을 아느냐하니 금시 초문이라 한다. 내친김에 몽고반점과 엄마나 아빠등 기본적으로 똑같은 어휘를 골라 같은 민족이었다는 것을 이야기하니 쉽게 말을 틀 수가 있었다. 우리가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프로그램을 가지고 하는지는 홍보가 잘 되어있지 않다며, 다음에는 미리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함께 홍보하면 더욱 친숙해질 것이라고 귀뜸해 준다.

우리의 프로그램이 VBS 쪽으로 치우쳐져 있었고 어른들에 대한 프로그램이 없었다는 것이 아쉬었다. 다음 번에는 영화상영 같은 어른들을 위한 프로그램이 있으면 괜찮을 것 같다. 또한 안민영 집사가 수고했던 의료사역을 구체적으로 더 알렸어야 했었다. 우리 전도팀이 이 사실도 같이 홍보했었으면 더 좋은 효과를 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알래스카 인디언이라는 Henry 는 pastor 가 될뻔 했노라고 말한다. 지금은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고 한다. 우리의 모든 초청에 바쁘고 다른 일이 있다고 핑계를 댄다. 문 앞에 딱 버티고 서 있으면서 집 안으로 못들어오게 막고 있는듯한 인상을 준다.

30중반쯤 되어 보이는 Daniel 은 어렸을때는 주일학교에 다녔었지만 지금은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 예수님을 영접하려고 하지 않는다. 현생활에 만족한다고 했다. 다음 날 Korean BBQ 에 초대하러 갔더니, Come on in 하는 소리에 집안으로 들어가 보니, 약을 했는지 소파에 널부러져 있어 헤메고 있다. 내가 저녁을 가져다 줄까 물어보니 극구 사양한다. 불쌍한 영혼이다.

VBS 에 참석하지 않고 집앞 드라이브 웨이에서 노는 아이가 있다. 이름은 Vivian 이란다. VBS와 함께 재미있는 놀이를 한다고 했지만 씩 웃어버린다. 엄마는 집 안에서 일을 한다고 했다. 아주 젊은 엄마다. Samantha 라고 하는데 20세 초반인 것 같다. 창조주에 대해서도 모르고, 예수님에 대해서도 모른다. 복음을 전했다. 그런데 믿고 싶지 않다고 했다.

이 동네는 왜 개들이 많은지… 한 집은 커다란 개가 나를 먼저 맞는다. 나는 겁에 질려 그 집을 엉금엉금 뒷걸음쳐 나오고 말았다. 다음날 그 집을 갔다가 주인이 있어 들어갔는데 그 개가 뒤에 서있는 것을 보고 심장 멎을 뻔 했다. 이 주인 이름을 그 바람에 까먹어 버렸다.

그 옆집에 들어가니 첫 날에 만났던 여자가 아닌듯 싶다. 어제 만난 Brian 이란 아들은 어디있냐고 물으니, 그런 아들은 있지도 않고 자기 혼자서 산다고 했다. 이 곳 사람들은 대충 동네에 있으면 집을 잠그지 않고 왔다 갔다하며 산다. 나는 당혹해 하는데 그 여자는 당혹해 하지 않는다. 옆 집으로 발 걸음을 옮기는데 Caroline 을 만났다. 자기 아이들도 VBS 에 잘 참석하고, 우리 일에 협조적인 분이다. 그냥 웃는다. 자기는 Korean BBQ party에 참석하겠다고 하면서, 주일 날 자기네들 모임시간이랑 겹쳐있다고 한다. 내가 좀 일찍 와서 저녁을 먹고 가라 했다.

그러고 보니, 우리의 일정이 이곳 사정을 고려치 않고, 일방적으로 정한 것이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른 길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동네를 다 도니 오후 3시가 조금 넘었다. 아, 이렇게 끝나면 안되는데... 나는 허영회 집사님과 함께 그 곳에서 20분쯤 떨어져 있는 또 다른 Indian Reservation Area 로 갔다. 전도 수리팀 1진이 오후 내내 가서 집 주위 청소를 한 곳이다. 내가 가지고 있던 전도지와 선물이 다 떨어져 그곳에 가면 수리팀 1진을 만나 잉여분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갔지만 벌써 일을 마치고 귀가 길이란다. 이왕에 나선 길, 일단은 맨손으로 가기로 했다. 바로 Lake Clear 옆에 자리한 가난하게 사는 Pomo Indian 들 이었다. 날씨가 더워서 아이들 10여명이 아줌마 한 사람의 보호아래 물놀이를 하고 있었다.

Private area 였지만, 그들에게 다가가 전도 소책자와 내가 가지고 있었던 성구 패널을 건네 주었다. 아이들이 몰려 오고, Anita 란 아줌아에게 ‘찐따마애’ 하니 아이들도 그렇고, 내가 무슨 말을 하나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본다. 너희들 말로 안녕이라는 말 아니냐 하니 ‘친타이’ 라고 말을 해야 한다고 가르쳐 준다. 옆에 있던 Rosa 라는 아이가 한국말로는 친타이를 어떻게 말하냐고 물어본다. 이 곳에 사는 사람들은 참 우호적이다. 줄 것이 없으니 안타까웠다. 발길을 돌려 본부로 돌아오니, 전도 수리팀의 팀장도 무척이나 아쉬웠다고 이야기 한다. 저녁 초대에 다들 오겠다고 했지만, 교통편도 그렇고 우리가 데리러 가자하여 그러자고 약속했다.

나중에 안전 사고등의 이유로, 음식물들을 가져가 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내년도 사역은 이곳을 중심으로 호수 옆에 텐트를 치고, VBS 며, 인형극, 영화상영 같은 것을 하면서 전도를 하면 큰 성과가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여러 부류의 Indian 들을 만나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발견한 사실은 그들의 토속신 개념이 삶의 모든 자리에 깊숙이 뿌리박혀 있었고, 1850년도에 일어났던 학살 사건으로 백인에 대한 감정이 아직도 마음 속에 남아 있는 이들에게 접근할 수 있는 방법들을 찾아 봐야 한다는 것 이었다. 용서하라는 말을 너무도 많이 들었지만, 아직도 가슴에 파묻고 산다는 Edward 나 Me-Sheika 의 말을 빌리지 않아도 그들의 현주소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자기들의 전설을 모으고 언어를 남기려 한다는 젊은이들의 이야기가 그들의 미래일 것이다.

위 글은 인디언 단기선교를 다녀온 산타클라라 연합감리교회(이성호 목사) 이주익 성도의 체험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