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을 믿고 가까워질수록 고난을 겪게 될 것 같아 두려워요”라고 말씀하시는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과 더 친밀해지고는 싶은데 고난은 싫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인물 중에 고난을 통해 연단 받는 인물들을 보아도 그렇고 주변의 크리스천들 중에 어려움을 겪으며 신앙이 성장하는 것을 보면 ‘고난이 축복이다’는 말이 맞는 것 같기는 하지만 여전히 고난은 달갑지 않습니다.
집사님의 예건은 틀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가까워진다는 것은 만사형통 이라기보다는 고난의 길일 수 있습니다. 적어도 겉보기에는 그렇습니다. 우선 예전에는 아무렇지도 않던 것들이 걸리기 시작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지적하고 평가하던 것들이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됩니다. 자녀를 향하여 감정적으로 또는 자신의 마음대로 나무라던 것들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지 못함이나 부모님께 효도하지 못하는 것 등의 관계적인 것들에 죄책감이 찾아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직장 일이나 사회 규범에 있어서도 자유롭지 않습니다. 걸리지만 않으면 괜찮아서 범하던 교통법규나 사회적 규례 상 문제되지 않아 넘어가든 일들이 다 마음에 걸리면서 하지 않으려 하니 힘들어집니다.
그러나 이 정도로 고난을 운운하지는 않습니다. 주님의 자녀로서의 변화된 모습입니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서 주님과 누리는 기쁨을 맛보며 성장하는 것입니다. 성장의 과정에 진짜 누가보아도 고난으로 여겨지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큰 병에 걸리거나 경제적 어려움을 겪거나 좌절할 만큼 힘든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러한 어려움 앞에서 크리스천의 반응은 두 가지입니다. 주님을 원망하며 떠나거나 주님을 더욱 의지하거나입니다. 전자의 경우는 주님을 통해서 유익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큽니다. 이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고통을 통해 축복을 누리는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고통 너머의 주님을 바라봄으로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이 경험을 하신 분은 그 어떤 고통보다 주님과의 사귐이 귀하다는 것을 알기에 다시 선택의 기로로 되돌려져도 다른 선택을 하지 않습니다. 주님을 알고 그 사귐 가운데 있는 기쁨은 상상 이상이기 때문입니다.
크리스천이면 크리스천다움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십자가 없는 기독교는 없습니다. 더욱이 십자가에 고난이 없을 수 없습니다. 만일 고난이 없는 십자가라면 무니만 십자가이지 십자가가 아닙니다. 앞서 고백하신 집사님처럼 고난 없이 하나님과 함께하는 영광만을 원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고난을 고난으로만 여기기 때문입니다. 고난 자체의 문제를 보고 힘들어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을 통하여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고난은 축복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고난이 임하는 것은 우리를 단련하고 진정한 주님의 자녀가 되게 하려는 이유입니다. 이 역설이 깨달아지면 더 이상 고난을 두려하지 않고 사모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