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 박형룡
박아론 |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 479쪽
"이 책을 쓰면서 한없이 많이 울었다. 계속하여 울었다. 책을 쓰다가 쓰던 손길을 멈추고서 울었다. 책을 쓰던 도중에도 순식간에 참지 못하고 울었다. 마치 나의 이 많은 눈물이 아버지 박형룡의 위대함에 반비례하는 그의 아들인 나의 이 못나고 못났음을 속량할 줄로 생각한 듯이 말이다."
<나의 아버지 박형룡>은 한국 보수신학계의 거두이자 예장합동 총회의 지도자였던 박형룡 박사의 신학과 신앙을, 아들이자 신학자인 박아론 박사가 정리한 책이다. 저자는 박형룡 박사의 삶을 신학자와 교회정치가, 아버지로 나눠 기술하고 있다.
책에서 저자는 '사과상자 책상'을 자주 언급하는데, 이는 박형룡 박사의 끊임없는 학문 연구 노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박형룡 박사는 6·25 전쟁 중 대구에서 개교했던 '대구 피난총신' 시절, 신학생들을 가르치고 학술지에 발표할 논문을 준비하느라 밤늦게까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네 식구의 침실이기도 했던 그 방의 한 귀퉁이에서 희미한 전등불 아래 그가 쭈그리고 앉아 애용했던 책상은, 빈 사과상자를 엎어 놓은 '대용품 책상'이었다는 것. 그 사과상자도 오늘날처럼 작고 보기 좋은 종이상자가 아니라, 크고 조잡스럽게 생긴 나무상자였다.
박아론 박사는 "이는 아버지가 한평생 근면과 성실함으로 신학을 연구한 비상한 노력형의 신학자였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며 "'피난민 신학자 박형룡'은 그와 같은 근면과 성실함이 넘치는 한국 신학자로서의 삶을, 아득히 먼 평양신학교 교수 시절부터 시작하여 총신대 총장직에서 물러나 서울 봉천동 자택에서 생애 말년을 보내던 은퇴 시절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변함없이 뚜벅뚜벅 살아갔다"고 회고한다.
앞서 소개한 <서쪽 하늘 붉은 노을>에 나오지 않는, 주기철 목사에 대한 비화도 발견할 수 있다. 박형룡 박사는 미국 유학을 끝내고 돌아와 평양장로회신학교에서 변증학과 신학사상 등을 가르치며 산정현교회 전도사로 재직 중이었다. 그러던 중 강규찬 위임목사가 사임한 후 미국 유학에서 돌아온 송창근 목사가 후임으로 왔으나, 신학적 문제를 지적하며 당시 마산문창교회에서 시무 중이던 주기철 목사를 초빙해 위임목사가 되도록 협력했다는 것.
박아론 박사는 "그때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 기독교계에 대하여 그들의 선조신인 '천조대신'을 모신 신사에 가서 참배할 것을 강요했는데, 주기철 목사는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반대했고 박형룡 박사는 신학적으로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역설하면서 반대했다"며 "그러나 제27회 총회에서 신사참배가 가결됐고 평양장로회신학교도 문을 닫게 되자, 박형룡 박사는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남은 때'가 있음을 생각하고 가족과 함께 평양을 떠나 일본 도쿄로 망명의 길을 떠났다"고 전했다.
그리고 주기철 목사는 박형룡 박사를 환송한 후 1938년 봄 투옥돼 7년간 긴 옥고를 치르고, 1944년 4월 21일 결국 순교의 제물이 됐다. 박형룡 박사는 1943년 여름 만주 봉천신학교에서 교수 생활을 다시 시작했고, 해방 후 2년이 지날 때까지 그곳에서 신학교육에 전념하다 고국으로 돌아와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했다. "박형룡 박사가 신사참배를 반대하지 않았다"는 일각의 주장을 부정한 것이다.
'해외 개혁주의 신학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소개하는 모방신학자일 뿐'이라는 비아냥에 대해선 "아버지는 한국교회에 꼭 필요로 하는 신학을 단순히 모방하는 데 그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신학을 하나로 종합한 '모방적 종합신학자', '창조적 모방신학자'였다"며 "아버지의 신학은 한국교회가 나아가야 할 '신학의 길'을 손가락으로 가르치는 듯한 소위 '지로적(指路的) 신학'이었다"고 반박했다.
아버지가 한국전쟁 중 '피난 신학자'를 거쳐 교단 분열기에 이르기까지는 화려한 웅변술과 진리의 절규와 같았던 설교를 거듭했지만, 이후 완전히 사라져버린 것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저자는 "이는 객관적인 사건이나 사실로 말미암았다기보다, 당신의 마음 속에서 발생한 내면적 생각의 변화에서 기인한 것 같다"며 "구태여 설명한다면 첫째로 사역 후반기를 맞으면서 체력을 관리해야겠다는 생각과 소년 시절 예수를 믿은 후 침묵을 선호하는 습관을 키웠던 것이 되살아났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고 분석했다. 이외에도 박형룡 박사는 진리의 절규와 웅변술을 계속 지니고 있었으나, 사람들이 이를 알아보지 못했을 수 있다는 추측도 하고 있다.
박아론 박사는 또 아버지가 20권의 신학전집을 펴낸 것 등을 들어, 미국의 19세기 신학자 찰스 핫지나 20세기 존 머리에 버금가는 세계적인 신학자였다고 강조하고 있다. 저자는 "아버지의 이름과 존재가 오늘날 한국의 장로교회 뿐 아니라 기독교계에서 서서히 잊혀지고 있다는 사실이 슬프고 안타깝다"며 "그래서 책의 제목을 <아버지 박형룡을 잊으셨나요?>라고 할 것을 잠시 고려하기도 했다"고 털어놓았다.
마지막에는 신복윤·서기행·장차남·정성구·서철원·홍정이 등의 제자들이 말하는 '내가 만난 박형룡'이 수록돼 있다. 어디까지나 '아들의 입장에서' 서술돼, 박형룡 박사에 대한 평가에 있어서는 주관적인 면이 없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