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논리’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얀 색과 까만 색 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논리입니다. 하얀 색과 까만 색 사이에 얼마나 많은 색깔이 있습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그건 하얀색이 아니다”라고 하면 대뜸 “그럼 까만색이냐”고 답합니다.
저는 목회하면서 교인들에게서 이런 흑백논리를 많이 발견합니다. “하루하루, 순간순간, 하나님과의 사귐을 더 깊게 하여, 무의미하고 답답할 수 있는 일상생활을 변화시키자”고 말하면 “목사님은 나보고 수도사가 되라는 말입니까?”라고 반문합니다. 수도사로 살아가는 것과 세속에 동화되어 살아가는 것 사이에 얼마나 많은 대안들이 있습니까? 그런데 극단적인 선택 외에 여러 가지 가능성을 찾는 일은 더 힘이 듭니다. 그게 싫다는 뜻입니다. 그냥 자신의 감정대로, 지금 하던 대로 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 말은 “나는 수도사가 될 수 없으니 그냥 세속에 빠져 살아가겠다.”는 뜻입니다. 이분들은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두 가지의 극단, 즉 세속을 완전히 등지고 수도사가 되거나, 눈 질끈 감고 세속에 동화되어 살아가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장 통의 수도자’로 살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렇게 살아가려면, 매일매일 고민해야 하고, 기도해야 하고, 선택해야 하고, 반성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을 무시하는 겁니다. 이때 흑백논리는 그 요청을 회피하는 좋은 방편이 됩니다.
많은 분들이 그리스도인이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은 두 가지의 극단, 즉 캘커타의 테레사나 아씨시의 프랜시스처럼 모든 소유를 포기하고 살아가거나, 아니면 도날드 트럼프나 패리스 힐튼처럼, 아무 생각 없이 돈 벌고, 한도 끝도 없이 쌓아 두고 부를 누리는 방법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두 극단 사이에는 수 십 가지의 대안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소시민으로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주어진 재물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하기 위해 기도하고 고민하고 생각하고 반성하다 보면, 우리는 책임 있고 선한 청지기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기를 싫어합니다. 그러다 보니, 이렇게 흑백논리로써 복음의 요청을 회피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통해서 펼치실 은혜의 역사는 무궁무진합니다. 무지한 흑백논리로 하나님의 역사를 가로막는 어리석은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 신앙생활이 낡은 흑백사진이 아니라 찬란한 총천연색으로 아름답게 펼쳐지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