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틴 루터(믿음의 거장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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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중 | 넥서스CROSS | 156쪽

2013년 10월 31일, 루터가 95개조 반박문을 게시하며 종교개혁을 한 지 496년이 되는 날입니다. 거의 500년의 시간이 흐른 대한민국 땅에는 종교개혁의 전통이 얼마나 아름답게 이어지고 있을까요? 루터의 인생을 통해 우리 교회와 성도들의 모습을 다시 한 번 깊이 살펴보고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 독일의 아이슬레벤(Eisleben)에서, 광산업에 종사하는 아버지 한스 루터와 어머니 마가레테 린데만 사이에 태어났습니다. 첫 아기가 있었지만 출생 후 바로 죽었기 때문에, 루터가 장남이 되었습니다. 첫 아이에 대한 아픔 때문에 부모는 태어난 지 몇 시간밖에 되지 않은 루터를 성 안나 교회로 안고 가 세례를 받게 했는데, 이날이 성 마르틴(St. Martin)의 기념일이어서 루터는 마르틴이라는 세례명을 갖게 되었습니다. Martin Luther라는 이름이 이렇게 시작된 것인지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네요.

18살 때 에르푸르트(Erfurt) 대학에 입학해 기숙사 생활을 했는데, 이곳은 저녁 8시에 자서 새벽 4시에 일어나야 하는 학교였습니다. 그곳에서 루터는 성경을 처음 읽게 됩니다. 늘 교회에서 사제가 성경을 낭송하는 것을 들은 것이 전부였는데, 라틴어를 공부하면서 직접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됐고, 직접 성경공부를 하면서 자신이 얼마나 심각한 죄인인지를 느끼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22살 때) 장대 같은 소나기가 천둥 번개와 동반해서 내렸는데, 벼락이 내리쳐 큰 나무가 부러지고 불꽃이 타올랐습니다. 순간 죽음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힌 루터는 바닥에 엎드려 비명을 지르며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저를 살려 주신다면 제 학업을 포기하고 수도사가 되겠습니다."

이 서원을 한 후 고민이 시작되었는데, 친구들은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루터는 지키기로 결심하며 그 해에 어거스틴 은둔자 수도원에 들어갑니다. 수련생 자격으로 머리를 삭발하고 고행자의 옷을 입고 모자를 쓰고 청소를 하는 등 겸손을 훈련받은 루터는 1년 후 수도사 서원식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기도와 성경공부를 항상 했지만 여전히 내면에 있는 고민이 해결되지 않아, 채찍으로 허벅지와 등을 피가 나도록 때리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28살 때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고 성경 신학 교수가 되었는데, 시편 강의 이후, 로마서 강의를 준비하다가 큰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비텐베르크의 어거스틴 수도원에 딸린 종탑 건물의 2층(탑실 체험: tower experience)에 있는 자신의 따뜻한 공부방에서 로마서를 정독하는데, 1장 16절과 17절 말씀이 두려움을 제거시킨 겁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예수님이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고통 당하시고 죽으신 것을 알고 믿을 때, 비로소 하나님 앞에서 의인으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겁니다.

그런데 1515년 교황 레오 10세는 성 베드로 성당을 짓기 위해 독일에서 면죄부 판매를 허용합니다. 주교직과 수도원장직을 돈으로 파는 금전적 비리가 시작된 겁니다. 특히 테첼(Tetzel)은 "이 돈 상자에 주화가 떨어지는 소리가 나는 순간, 그 영혼은 연옥에서 빠져나옵니다"라고 설교하며 성도들을 불안감에 싸이게 했고, 루터는 면죄부를 반박하는 설교를 세 번 한 후에, 조목조목 반박하는 95개 조항을 만들어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Wittenberg) 대학 교회 문에 못 박았습니다. 세계 기독교 역사를 바꿀 위대한 혁명이 시작된 것이죠.

하지만 이 사건으로 인해 루터는 이단으로 고발되었고, 영주인 프리드리히 백작의 보호로 인해 많은 글들을 발표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글들이 인쇄되어 종교개혁의 흐름을 만들게 된 것이죠. 결국 루터는 자신에게 보낸 교황의 파문교서를 불에 던졌고, 이로 인해 보름스(Worms) 제국회의에 소환되어 모든 저서를 통한 주장을 철회하라는 요구를 받습니다. 그 때 유명한 말로 최후 변호를 합니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혔기 때문에, 나는 아무것도 취소할 수 없고, 또 취소하지도 않겠습니다. 왜냐하면 양심을 속이는 것은 불확실한 것이며 또 영혼을 위협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시여, 저는 이렇게 흔들리지 않고 서 있습니다. 저를 도와주소서. 아멘!"

교황(레오 10세) 앞에서도, 그리고 황제(카를로스 5세) 앞에서도 루터는 성경의 진리에 선 겁니다. 그리고 프리드리히 백작의 보호로 바르트부르크(Wartburg) 성에 들어가 '융커 외르크'라는 가명을 쓰면서 독일어 성경을 번역하게 됩니다. 신도들이 라틴어로 된 성경을 읽지 못하기 때문에 신비주의에 빠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성경으로 돌아갈 것을 주문한 겁니다.

루터는 아우크스부르크 독일 제국회의에서 "오직 은혜로(Sola gratia), 오직 믿음으로(Sola fide), 오직 그리스도로(Sola Christus)"라는 보편적인 구원 메시지를 전달했고,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비롯한 39편의 찬송가를 지었으며, 루터파를 "항의하는 자"라는 의미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고 부르면서 오늘날의 개신교 이름이 유래되었습니다.

항상 4시간씩 기도하며 하나님 말씀과 기도의 능력으로 살았던 루터는, 63세의 나이로 출생지였던 아이슬레벤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제 영혼을 내려놓으려고 합니다. 아버지여! 저의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저를 구원하신 주님! 진리의 하나님이시여!"

매년 대한민국의 교회에서 '종교개혁주일'을 기념할텐데, 과연 어떻게 사는 것이 종교개혁일까 생각해 보며 이렇게 도식화해 봅니다. "종교개혁=교회개혁=예배개혁=교회의 지체인 나 개혁→사회와 국가의 개혁".

교회가 개혁되기 위해서는 예배가 회복되어야 하고, 예배의 회복은 곧 목회자와 성도의 십자가 회복이고, 그렇게 한 명 한 명이 영적인 몸부림을 칠 때, 이 사회와 국가는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영적인 사명을 잘 감당하며, 이 땅의 교회와 하나님 이름을 회복하는 아름다운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사랑합니다. 하늘뜻섬김지기 이훈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