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제가 10년간 봉직했던 대학교의 새로운 총장이 선출되었는데, 그분은 문예창작학과에서 가르치고 있는 여류 시인입니다. 이 소식을 접하고는, “시인이 총장이라! 그거 참!”하고 생각했었습니다. 시인이라고 총장이 되지 말란 법은 없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격변기를 이끌었던 지도자는 작가였던 바츨라프 하벨이었습니다. 그는 문학가로서도 인정받는 사람이었지만, 정치인으로서도 탁월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니 시인이 총장이 되었다고 해서 잘못이라 할 수 없는데, 그래도 여전히 어울리지 않는 것 같은 인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기왕에 총장이 되셨으니, 좋은 지도자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각박한 대학 행정이 그분의 시심을 손상시키지 말기를 바랍니다. 총장으로서 대학 업무를 볼 사람은 많지만, 세상을 기독교적 관점으로 관조하며 일상의 언어로 풀어내는 시인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그분이 당면하고 있는 과제가 제가 매일 씨름하고 있는 문제와 맥을 같이 하기 때문입니다. 저의 존재와 설교와 사역이 성도들에게 마르지 않는 샘물이 되고 큰 그늘이 되려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저의 영성 생활입니다. 깊이 기도하고, 묵상하고, 사색하고, 독서하고, 산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시인의 마음을 품고 시인의 시각으로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기도 한 마디, 설교 한 편 혹은 몸짓 하나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보고 들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동시에 한 조직의 대표로서, 혹은 한 조직의 최후 결정권자로서, 혹은 한 집단의 최고 결정권자로서 생각하고 행동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교회가 효율적인 기능을 하도록 도우려면, 재정 운영이 효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살펴야 하고, 사역자들이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를 정확히 파악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그래서 목사로서의 책임과 한 단체를 대표하는 사람으로서의 책임 사이에서 갈등할 때가 있습니다. 용납하고 사랑하고 참아주어야 하는 목회자의 덕목과 잘잘못을 따지며 책임을 묻고 칼을 들이 대야 하는 관리자의 덕목 사이에서 고민할 때도 있습니다.

제가 목회자 혹은 시인의 심성에만 치우치면 교회가 어려움에 처할 것이 분명합니다. 지미 카터 대통령이 양심과 신앙을 지키려고 번민하는 동안 미국 역사상 최악의 대통령으로 평가 받은 것을 기억합니다. 개인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조직을 희생시키는 것은 바람직해 보이지 않습니다. 반면, 조직의 효율성만을 생각하여 무참하게 칼을 휘둘러서도 안 될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저는 목사로서의 자격을 잃게 될 것이고, 제 설교는 메마른 선전이나 선동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런 고민 때문에 총장이 되신 시인의 소식 앞에서 축하하지도 못하겠고 애도하지도 못하겠습니다. 어쩌면 이 혼란스러운 감정은 저 자신에 대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니, 어쩌면 이것은 인간이 처한 근본적인 역설의 한 모습인지도 모릅니다. 영적 존재이면서 육적 삶을 살아야 하는 역설.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면서 이 땅의 시민으로 살아야 하는 역설. 영원한 존재이면서 하루살이처럼 살아야 하는 역설. 이 역설은 우리 인간 존재의 본질인 듯합니다. 그렇다면 이 역설을 벗어나려 할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끌어안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역설을 느끼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문제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위험한 외줄타기 곡예에서 넘어지지 않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2007년 6월10일)

/글 김영봉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