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선교회(회장 최창효 목사)는 지난 30일 시애틀 연합장로교회에서(담임 장윤기 목사) 6.25 남침 63주년 기념 연합성회를 개최하고, 6.25 전쟁의 실상과 통일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연합성회는 먼저 윤요한 목사가 북한 인권 탄압의 실상을 소개하고, 탈북자 망명 절차 간소화와 정치범 수용소의 철폐를 촉구했다. 이어 박영희 목사와 신호범 워싱턴주 상원의원이 "내가 겪은 6.25"란 제목으로 전쟁의 경험을 소개했으며, 박영희 목사는 자신의 경험담을 통해 6.25는 북한이 남한을 침략한 남침전쟁이었음을 분명히 밝혔다.
신호범 상원의원은 "북한은 동족으로 우리가 손을 잡아줘야 할 사람들이며, 복음으로 구원 받아야 할 사람들"이라며 "한민족 모두가 남북통일을 위해 합심해 기도하자"고 당부했다. 신 의원은 또 현재 북한에 수용소에 억류돼 있는 케네스 배의 생존과 귀한을 위해서도 각별한 관심과 기도를 요청했다.
탈북자 선교사 윤요한 목사는 "미주의 한인 동포들과 2세들은 6.25 전쟁의 실상과 한민족 역사의 비극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며 "이번 연합 성회를 통해 전쟁의 실상과 6.25의 바른 역사성을 깨닫길 원했다"고 취지를 밝혔다.
윤 목사는 "6.25 전쟁의 비극을 잊으면, 제 2의 6.25가 올 수 있다는 것을 미주 한인들에게 알리고자 했다"며 "북한 김일성에 의해 자행된 동족상잔의 비극인 6.25 전쟁과, 북한 공산주의의 허상을 한인 2세들에게도 가르치고, '다시는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점을 알려야 한다"고 강조했다.
윤요한 목사는 "북한 주민들은 악한 정권 아래 2300만 동포가 고통 속에 신음하고 있고, 배고픔을 탈출하고자 중국으로 탈북 한 청소년들이 북송되고 여성들은 노예처럼 팔려 다니고 있다"며 북한과 중국을 향해 △북녘동포 학살을 중단하고 이산가족의 자유왕래와 만남을 허용할 것 △핵전쟁의 위협을 중단할 것 △중국 정부는 중국 내 탈북자들의 자유와 인권을 허용하고 강제 북송을 중단할 것 등을 촉구했다.
윤 목사는 이어 "오늘날 대한민국의 자유는 숭고한 희생과 피 흘림으로 얻어진 결과이며, 6,25전쟁은 잊을 수 없는 날이요 잊어서도 안 될 날"이라며 "지금도 핍박 속에 고통 받고 있는 탈북자 인권과 북한 주민들의 자유를 위해 기도하며 뜻을 모아야 한다"고 당부했다.
고향선교회는 북한 동포들과 탈북 동포들을 돕기 위해 시작된 선교회로, 탈북자 망명과 북한 내 지하교회를 돕는 일에 힘을 기울이고 있다. 또 북한 주민들을 위한 구호 식량을 보내고 있으며, 풍선을 이용해 삐라와 라디오, CD를 북한으로 보내는 사역도 감당하고 있다.
내가 겪은 6.25 박영희 목사
6.25 당시 내 나이는 19살이었다. 당시 나는 북한 신의주에서 2-30리 떨어진 낙원동에서 살았었다. 당시 나는 평양신학교에 재학 중이었는데 공산당이 평양 신학교 문을 닫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낙원동에 있는 교회에서 전도사를 하고 있었다.
6.25가 일어나기 전에 내가 있던 교회 주변에 중공군 수 백 명이 들어왔다가는 2-3일 후에는 모두 없어지곤 했다. 그러기를 수차례 했는데 그 중공군 중 몇 사람이 하는 말이 곧 우리는 남쪽으로 간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으면서 이 사람들의 목적을 알 수 있었다. 그들은 6월 25일이 되자 남한으로 밀고 내려갔다. 중공군이 들어와서 한데 뭉쳐서 북한군과 합세해서 남으로 밀고 내려갔는데, 3일 후에 서울이 함락되고 곧이어 대전이 함락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며칠 후에 북한군 징집명령을 받았다. 그래서 징집 장소에 갔다. 당시 몸이 많이 약했다. 폐가 안 좋았는데 집행관이 신체검사를 하면서 직업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평양신학교 학생이라고 했더니 의사가 배려해 주면서 저쪽에 앉으라고 했다. 나만 특별한 배려를 해줬던 것으로 봐서는 기독교 신앙을 가졌던 것 같다. 그대로 공산당 전쟁에 참전할 수 없어서 기차를 타고 보충대로 가던 길에 빠져나와 산 속으로 숨었다. 신의주에서 가족들이 살던 평양으로 자전거로 사흘을 달려갔다.
집에 돌아오니 부모님은 내가 탈영한 인민군이니까 절대 밖으로 돌아다니지 말라고 하면서 집 지하실에 숨어있으라고 했다. 그러다 하루는 유엔군이 북한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기쁨도 잠시 얼마 후 유엔군이 철수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슬픈 소식에 남으로 향하는 마지막 기차를 타기 위해 기차역으로 갔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남한으로 가기 위해 열차를 메우고 있었다. 간신히 기차 맨 위 지붕에 올라탈 수 있었다. 12월의 겨울이 얼마나 추웠는지 모른다. 캄캄한 밤에 기차 지붕에서 얼어 죽어 떨어지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게 남으로 내려왔다.
이후 서울로 피난을 가고 또 대구로 피난을 가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안수를 받았다. 곧이어 종군 목사 훈련을 받고 남한의 군종목사가 됐다. 비참한 전쟁의 실상을 눈으로 봤다.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들이 죽었다. 그렇게 6.25를 지냈다. 6.25 전쟁은 러시아의 스탈린이 계획을 세워, 김일성을 부추겼고 문제가 생기면 중국의 모택동이 도우라고 모략을 세웠다.
1998년에서 북한의 기아가 심각할 때 미국 국무성의 지시로 월드컨선의 통역을 위해 평양을 방문했다. 평양에서 55년 만에 친 누님을 볼 수 있었다. 이산가족의 아픔을 절실히 느낄 수 있었다. 하루 속히 우리 민족은 통일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