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 사실이 확정되기도 전, 즉 체포만 되어도 DNA가 채취돼 주 정부의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된다면 분명한 사생활 침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미국은 수정헌법 4조에서 부당한 수색과 압수, 구금을 금지하는 사생활 보호 규정을 명시해 놓고 있다. 그런데 과학 기술과 접목돼 나날이 발전하는 범죄 수사 방식과 이 전통적인 사생활 보호권의 충돌 문제가 연방대법원에 올라왔다.
연방대법원은 월요일, 범죄 용의자의 DNA를 채취하는 것이 합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이 문제에 대해 진보와 보수로 갈린 대법관들이 치열한 토론을 벌인 끝에 5대 4로 합헌 결정이 발표됐다. 이 판결로 인해 이제는 중범죄가 발생했다면, 경찰이 용의자를 체포할 때 그의 범죄 사실이 확정되거나 기소된 상태가 아니라도 면봉을 사용해 입 안의 DNA를 채취할 수 있다. 물론 영장이 없는 상태에서도 가능하다.
2003년 메릴랜드에서 복면의 남성이 한 여성을 강간한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은 범인을 검거하지 못했지만 피해 여성의 몸에서 범인의 DNA를 채취해 보관했다. 그러다 6년 뒤에 폭력 혐의로 체포된 알론조 킹에게서 DNA를 채취하다 그가 바로 그 강간범임을 확인했다. 킹은 강간을 저지른 혐의로 결국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런데 문제는 그가 폭력 혐의로 체포됐을 때 경찰이 DNA 채취와 관련된 영장을 발급받지 않은 상태였으며, 영장이 없더라도 긴급히 DNA를 채취하지 않으면 증거가 인멸될 수 있다는 근거 없이 이를 수행한 것이다.
메릴랜드 주 항소법원은 수정헌법 4조를 들어 킹의 DNA 조사가 불법이라고 판결했다. 그러자 메릴랜드 주는 연방대법원에 이 문제를 제소했고 하급법원의 판결이 뒤집혀 버린 것이다.
이 심리에 대해 새무얼 알리토 대법관은 "수십년 만에 범죄 수사와 관련된 가장 중요한 논쟁"이라고 밝혔다. 그의 말대로 이번 논쟁은 범죄 수사를 위해 사용되는 최신식 기술과 오랜 사생활 보호권과의 충돌인 셈이었다.
메릴랜드 주는 "경찰이 DNA를 채취하는 것은 지문 채취와 비슷하며 킹의 사생활 보호보다는 범죄 사건 해결이 더욱 중요한 가치"라고 맞섰고 킹 측은 "지문 채취는 수사 목적이 아닌 신원 확인 목적인데 경찰이 지문을 수사 목적으로 사용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용의자를 대상으로 한 DNA 채취가 합법화 될 경우, 시민들의 권리가 심각히 훼손될 것"이라 강조했다.
앤서니 케네디 대법관은 메릴랜드 주의 변론에 힘을 실어 "경찰이 상당한 혐의가 있는 범인을 체포할 때 DNA를 채취하는 것은 용의자의 사진을 찍거나 지문을 채취하는 것처럼 상당히 사리에 맞다"고 판시했다. 알리토 대법관은 DNA 채취를 "21세기 형 지문 채취"라고 칭했다.
그러나 안토닌 스칼리아 대법관을 비롯한 4명은 "이 판결은 수정헌법에 명시된 권한을 침해하고 DNA 채취라는 폭력을 증대시킬 것"이라고 항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