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Don’t Ask Don’t Tell, DADT)”는 동성애에 대한 외줄타기 같은 미묘한 미군의 입장은 결국 위헌 시비 끝에 폐지되었다. 사회에서 가장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는 군대에서조차 동성애 문제는 방파제를 넘겨 버린 파도가 되어버린 것이다.
미국 사회에서 동성애에 대한 이슈는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요즘은 전방위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동성애는 이미 허락의 문제를 넘어선지 오래이다. 이제는 법적으로 동성결혼을 인정받는 것과 공립학교 아이들에게 동성애뿐만 아니라 양성애와 트렌스젠더까지 성정체성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을 의무적으로 가르쳐야 하는 문제에까지 와 있다.
기독교는 이 동성애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매우 민감하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동성애가 명백하게 ‘죄’라고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동성결혼의 합법화 같은 문제는 종교적 신념과 사회법 외나무 다리에서 정면으로 마주 서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심각성은 단지 사회와 종교의 대립에만 그치지 않는다. 기독교 내부에서도 이미 동성결혼 및 동성애 성직자 안수문제가 이전부터 꾸준히 대두되어 왔고, 시간이 갈 수록 주류 기독교 교단들이 점점 이 문제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다. 동성애 문제에 대해 특별히 민감한 한인교회들은 이 문제로 인해서 교단을 탈퇴해야 하는지까지 심각하게 고민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기독교는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열심히 반대를 하고 있다. 이전까지는 반대입장을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정치적으로도, 수적으로도 열세에 있다. 단지 반대 의견을 표명한다고 해서 기독교의 입장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상이 볼때 전혀 새로운 것이 없기 때문이다.
동성애자들은 전방위적으로 그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서 노력하는데 반해 기독교는 반대의 입장을 늘 되풀이 하고 있다. 따라서 동성애자들이 새로운 문제를 들고 나올 때 마다 이슈를 선점하지도 못하고, 영향력을 발휘하지도 못한다. 이런식으로는 안된다. 이제 기독교는 동성애 문제를 반대 의견을 넘어서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독교가 동성애 문제에 있어서 ‘호모포비아(Homophobia,극단적 동성애 혐오주의자)’가 아님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성경은 동성애가 ‘죄’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죄를 행하는 사람은 ‘죄인’이다. 그러나 분명히 알 것은 예수님은 동성애자를 포함한 모든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이다.
죄를 아는 것과 심판하는 것은 다르다. 심판은 오직 하나님만 하신다. 동성애자를 대할 때 정죄하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보다 먼저 은혜를 받아 죄를 탕감받은, 같은 사람으로서 대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는 의롭다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동성애 문제로 사람의 영혼을 하나님 대신 먼저 심판해 버려서는 안된다.
그리고 기독교가 그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 줄 수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한다. 교회 내에서 동성애 문제를 논의할 수 있을 만큼 물리적, 심리적 공간이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어떻게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 구체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반대만 하지 말고 대화하고, 데이터를 축적하고, 중보의 기도로 영혼의 다리를 놓고, 그 길을 통해서 성령의 구체적인 능력이 일어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사명이다. 그리스도인은 사명을 위해 부름받았지 반대를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이 아니다.
기독교의 핵심 교리는 ‘동성애 반대’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나님의 사랑이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증명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랑에는 차별이 없다. 동성애에 대한 기독교의 태도는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대화하는 것이다. 그 다음 스텝의 결정은 충분히 대화한 후에 해도 늦지 않는다. 사랑이 모든 문제의 해답이고 가장 큰 무기다.
미국 사회에서 동성애에 대한 이슈는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요즘은 전방위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동성애는 이미 허락의 문제를 넘어선지 오래이다. 이제는 법적으로 동성결혼을 인정받는 것과 공립학교 아이들에게 동성애뿐만 아니라 양성애와 트렌스젠더까지 성정체성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을 의무적으로 가르쳐야 하는 문제에까지 와 있다.
기독교는 이 동성애 문제에 있어서 만큼은 매우 민감하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동성애가 명백하게 ‘죄’라고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동성결혼의 합법화 같은 문제는 종교적 신념과 사회법 외나무 다리에서 정면으로 마주 서 있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심각성은 단지 사회와 종교의 대립에만 그치지 않는다. 기독교 내부에서도 이미 동성결혼 및 동성애 성직자 안수문제가 이전부터 꾸준히 대두되어 왔고, 시간이 갈 수록 주류 기독교 교단들이 점점 이 문제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다. 동성애 문제에 대해 특별히 민감한 한인교회들은 이 문제로 인해서 교단을 탈퇴해야 하는지까지 심각하게 고민하는 지경에 이르고 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기독교는 동성애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열심히 반대를 하고 있다. 이전까지는 반대입장을 표현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사회적,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정치적으로도, 수적으로도 열세에 있다. 단지 반대 의견을 표명한다고 해서 기독교의 입장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세상이 볼때 전혀 새로운 것이 없기 때문이다.
동성애자들은 전방위적으로 그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서 노력하는데 반해 기독교는 반대의 입장을 늘 되풀이 하고 있다. 따라서 동성애자들이 새로운 문제를 들고 나올 때 마다 이슈를 선점하지도 못하고, 영향력을 발휘하지도 못한다. 이런식으로는 안된다. 이제 기독교는 동성애 문제를 반대 의견을 넘어서는 패러다임의 전환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
이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독교가 동성애 문제에 있어서 ‘호모포비아(Homophobia,극단적 동성애 혐오주의자)’가 아님을 분명히 하는 것이다. 성경은 동성애가 ‘죄’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죄를 행하는 사람은 ‘죄인’이다. 그러나 분명히 알 것은 예수님은 동성애자를 포함한 모든 ‘죄인’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이다.
죄를 아는 것과 심판하는 것은 다르다. 심판은 오직 하나님만 하신다. 동성애자를 대할 때 정죄하고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보다 먼저 은혜를 받아 죄를 탕감받은, 같은 사람으로서 대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누구도 하나님 앞에서는 의롭다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동성애 문제로 사람의 영혼을 하나님 대신 먼저 심판해 버려서는 안된다.
그리고 기독교가 그들을 위해서 무엇을 해 줄 수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한다. 교회 내에서 동성애 문제를 논의할 수 있을 만큼 물리적, 심리적 공간이 있는지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어떻게 그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지 구체적인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 반대만 하지 말고 대화하고, 데이터를 축적하고, 중보의 기도로 영혼의 다리를 놓고, 그 길을 통해서 성령의 구체적인 능력이 일어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사명이다. 그리스도인은 사명을 위해 부름받았지 반대를 위해서 부름 받은 사람이 아니다.
기독교의 핵심 교리는 ‘동성애 반대’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 향한 하나나님의 사랑이다.’ 그리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증명되었다는 것이다. 이 사랑에는 차별이 없다. 동성애에 대한 기독교의 태도는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대화하는 것이다. 그 다음 스텝의 결정은 충분히 대화한 후에 해도 늦지 않는다. 사랑이 모든 문제의 해답이고 가장 큰 무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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