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이 불편하신 중에도 기어이 공항까지 나와 배웅하시며 끝까지 손을 흔들어주시는 부모님의 모습을 뒤로 하며 터미널 안으로 들어가는데 눈물이 그치지 않습니다. 이커너미 좌석으로 예약했지만, 비지네스 구간으로 바꾸라는 부모님의 간곡한 요청에 결국 마지막 순간 일등석으로 표를 바꾸고야 말았습니다. 내가 편안히 돌아가는 것을 보기 전에는 절대로 공항을 떠나지 않겠다는 단호한 태도에 제가 지고 만 것이지요. “ 이 세상에서 과연 누가 저 분들만큼 나를 생각해 줄까? ” 모처럼 편안한 여행을 하며 저는 새삼 부모님의 사랑에 마음이 따뜻해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이 늘 피곤하고 바쁘게 움직이는 제 삶의 한 쪽 저변을 보이지 않게 받치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지난 세월, 저는 특히 어머니에 대한 불만이 적지 않았던 별로 사랑스럽지 않은 딸이었습니다. 매사에 철저하고 적극적이며 강경했던 어머니의 삶의 방법이 자주 저와 마찰을 일으키곤 했지요. 그러나 이제 철이 들어 되돌아보니 어머니의 확실한 성품이 주 안에서 저에게 전수되었을 때, 목회의 열정적인 추진력으로 나타나지 않았는가 생각해 봅니다. 나이 50을 넘어야, 그저 부모님께 감사 외에는 드릴 말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이번 한국 방문기간 어버이날이 마침 끼어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거의 30년 만에 어버이날 모든 가족들이 부모님을 모시고 한 자리에 모일 수 있었습니다. 감격적인 순간이었지요. 기도를 하라는 오빠의 요청에 일어나 기도를 하는데, 목부터 메어옵니다. 이렇게 5 남매를 하나같이 세상에 나름대로 선한 영향을 주는 존재들로 최선을 다하여 키워내신 부모님들인데 막상 두 분의 모습 어디엔가에는 어쩐지 쓸쓸하고 외로우며 허무한 듯한 인상을 지울 길이 없어 가슴이 아팠습니다. 두 분의 연로한 나이 탓일까요? 나이 탓만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성령님께 간절히 의지하며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과연 신실하신 성령님께서는 저의 기도 가운데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가 그 날 자리에 함께한 저의 가족들의 마음에 다시금 부모님의 존재와 그 분들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되돌아보게 하는 기도가 되었음을 그 후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 날 저의 기도는 그저 감사로 일관된 기도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 훌륭한 부모님을 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우리 부모님은 최고의 부모님이십니다. 부모님의 희생으로 인하여 감사합니다. 자기를 돌아보지 아니하고 우리들을 위하여 모든 젊음과 꿈과 열정을 아낌없이 쏟아 부은 두 분을 인하여 진정 감사를 드립니다......” 끊임없는 감사의 기도가 제 입술에서 쏟아졌고 우리는 울었습니다. 아, 얼마나 우리 모두 감사에 인색했던가? 어떻게 우리가 그 분들의 은혜를 잊을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족들이 부모님에 대한 감사를 회복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현대인들은 이기적입니다. 사도 바울은 말세의 사람들을 이렇게 묘사한 적이 있습니다. “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 ( 딤후 3:2) 정말 우리 모두는 너무나 자기 일에 도취하고 자기를 사랑하며 그저 자기 연민에서 헤어나지를 못하는 나르시즘적인 경향이 있습니다. 받은 은혜를 헤아려보기보다는 당한 손해와 상처만을 영리하게 계산합니다. 우리의 근본이 어디에서 왔는가를 생각해볼만한 여유도 물론 없습니다. 부모도, 스승도 안보이고, 자연 현대인들은 감사가 메말라갑니다. 잘난 자녀를 둔 부모님들은 그래서 더욱 외로워하고 허무해 합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그들에게 순종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준엄한 명령입니다. 아버지의 수치를 가려주기 보다는 밖에 가서 고했던 노아의 아들 함은, 그 일로 인하여 자자 손손 저주의 삶을 살았습니다. 부모 공경의 중요성을 가르쳐주는 역사의 일화입니다.

오늘은 어버이 날입니다. 우리 삶의 보이지 않는 저변을 받치고 있는 우리의 부모님들, 저들은 외로워하십니다. 부모님들께 마음으로 또 물질과 시간으로 사랑과 감사를 표현합시다.

/글 이성자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