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백사진에서 칼라사진으로의 전환은 마치 산업혁명처럼 생활에 큰 변화를 주었다. 요즘은 칼라사진을 찍거나 TV를 보더라도 화소 혹은 해상도(PIXEL)가 얼마나 높은가를 따지는 시대가 되었다. 화상도가 1200X800이란 말은 가로에 1200개의 그림 세포(이름하여)가 있고, 세로에는 800의 그림 세포가 있다는 말이다. 이 숫자가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만큼 화면의 질은 높아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해상도가 높은 것에 익숙해질수록 질이 낮은 화면에는 눈을 돌리기가 쉽지 않다. 흑백 TV를 볼 때와는 달리 해상도가 높은 디지털 TV를 볼 때에는 얼굴의 피부까지 세밀하게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 이제 질이 떨어지는 화질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기에는 쉽지 않을 것이다.

기독교인들 가운데 가끔씩 천국을 보았다는 사람들이 나오곤 한다. 디지털 시대에 사는지는 몰라도 마치 천국을 HD(고화질)로 촬영해 온 것처럼 말하고 있다. 펄시 콜레(PERCY COLLET)의 “내가 본 천국(I Walked in heaven with Jesus)”, 한국의 어느 유명한 신학교 교수를 지낸 목사의 ”내가 본 지옥과 천국“ 그리고 무수히 ”I SAW HEAVEN "이란 이름으로 천국을 보았다고 간증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들은 한결같이 천국과 지옥은 어떻게 생겼으며, 거기 누가 있으며, 어떤 상과 벌을 받고 있으며 등등 마치 스포츠 중계하듯이 생생하게 증거하고 다닌다. 예수님이 천국의 왕인데 왕보다도 천국을 더 자세히 알고 있다고 하니 우습기도 하고, 난처하기도 하다.

예수님은 천국을 비밀로 하셨다. 비밀로 하신 이유는 보고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천국은 분명히 신비이고, 비밀이다. 비밀은 잘 모르는 것이다. 황금 알을 낳는 거위의 배를 갈랐을 때 그 황금거위는 없어지는 것처럼 천국의 비밀을 캐려고 칼을 들었을 때 천국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천국은 눈으로 보고 확인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천국을 믿기 때문에 바라볼 수 있는 것이다.

신약성경에 사도바울은 천국, 곧‘낙원’에 이끌리어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고린도후서12:4). 그는 그것을 환상과 계시라고 했고,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모른다고 했고, 그 곳이 셋째 하늘이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후12:4)”라고 했다. 이 말을 King James 성경에서는 “which it is not lawful for a man to utter”고 했고, NIV 성경에서는 “things that man is not permitted to tell” 고 했다. 곧 천국의 환상과 계시에 대해 말하는 것은 법을 위반하는 것이고, 말하는 것이 허락된 것이 아니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요한계시록에서는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터이요”라고 했다.

시대가 변하고, 바뀌어도 성경과 믿음은 바뀌지 않는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히브리서11:1)이다. 믿는다고 꼭 무엇이 눈에 드러나고, 나타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왜 믿음이 그런 방향으로 가야하는가? 믿는 사람이 꼭 부자가 되는 것도 아니고, 기도한다고 해서 꼭 응답을 받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린도후서2:10)라고 말씀했다. 성경 전체가 약속이고, 응답이고, 축복이다.

정말 믿는 사람이라면 보지 않고서도 천국을 믿을 수는 없을까? 설령 수십 년 기도한 제목이 지금 이루어지지지 않는다고 해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감사, 기쁨, 천국, 사랑(감기천사)의 삶을 살 수는 없을까? 이렇게 믿는다면 조금씩 세상 속에 기독교가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래서 ‘내가 본 천국’이 아니라 ‘내가 믿는 천국’이 더 분명하게 보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