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는 전혀 알지도 못하는 나라,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을 지키라는 부름에 응했던 우리의 아들 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Our nation honors her sons and daughters who answered the call to defend a country they never know and a people they never met.)

이 글은 워싱턴에 있는 한국전쟁 기념물에 새겨져 있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은 트루먼 대통령이었다. 한국 전쟁터에서 5만명 이상의 미국 젊은이가 전사했고, 10만명 이상이 부상하여 평생 불구가 되었다. 그 희생자 가운데는 많은 미국 지도층의 자녀들도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6•25 남침 전쟁 때 유엔군의 주력이던 미 8군 사령관 밴 플리트 장군의 아들도 폭격기 조종사로 참전했다. 밴 플리트 장군의 아들 지미는 그리스에서 근무하다가 본국에 돌아와 있었다. 그는 해외 근무를 한 직후라 다시 해외 근무를 할 자격이 없었지만 굳이 자원을 하여 한국 전선을 택했다. 그는 한국 전출 명령을 받자 어머니에게 이런 요지의 편지를 썼다.

<사랑하는 어머니께: 이 편지는 군인의 아내에게 바치는 편지입니다. 눈물이 이 편지를 적시지 않았으면 합니다만… 저는 자원해서 전투비행훈련을 받았습니다. 저는 전투 중에 B-26 폭격기를 조종할 것입니다. 저는 조종사이기 때문에 기수엔 폭격수, 옆에는 항법사, 후미에는 기관총 사수와 함께 있습니다. 우리는 야간비행을 할 것입니다. 아버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권리를 향유할 수 있도록 싸우고 있으며 드디어 저의 미력한 힘이나마 보탤 시기가 도래한 것 같습니다. 저를 위하여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 대신에 미국이 위급한 상황에서 조국을 수호하기 위하여 소집된 나의 승무원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그들 중에는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아내를 둔 사람도 있고, 아직 가정을 이뤄본 적도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저는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저의 의무입니다.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아들 짐 올림>

지미는 한국으로 부임하자 동료 승무원들을 데리고 미 8군 사령부를 찾아가 아버지를 만났다. 1952년 3월 19일 밴 플리트가 만 60세 생일을 맞은 날이었다. 며칠 뒤 부자는 서울 북쪽의 갯벌로 기러기 사냥을 갔다온 후 4월 2일 밴 플리트 장군은 아들과 통화를 했는데 아들 짐이 그즈음 북한 지역으로 출격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1952년 4월 4일 오전 10시30분, 밴 플리트는 미 제5공군 사령관 제임스 에베레스트 장군으로부터 아들 지미가 야간 출격을 한 뒤 귀환하지 않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다. 지미와 두 승무원은 압록강 남쪽에 위치한 순천 지역을 정찰 폭격하기 위하여 출격했었다. 지미로서는 네 번째 출격이자 최초의 단독 비행이었다. 새벽 1시5분에 이륙한 그는 새벽 3시 김포 비행단의 레이더와 접촉했다. 지미는 주표적이 구름에 가려져 있다면서 예비 표적을 요구했다. 예비 표적을 향하여 날아가던 지미의 폭격기는 레이더에서 사라진 뒤 소식이 끊긴 것이었다. 그에 대한 구출작전이 진행되었다.

밴 플리트 장군은 아들에 대한 공군의 수색작업이 도를 넘지 않도록 했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이제 구출 작전을 중지하라”고 명령한 것도 그였다. 그 후로도 그는 가끔 아들이 실종된 지역의 지도를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고 한다. 그해 부활절 밴 플리트는 한국 전선에서 실종된 군인 가족들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저는 모든 부모님들이 저와 같은 심정이라고 믿습니다. 우리의 아들들은 나라에 대한 의무와 봉사를 다하고 있었습니다. 오래 전에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벗을 위하여 자신의 삶을 내놓은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랑은 없습니다>

밴 플리트 장군의 아들은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 그 벗은 미국 국민이기도 할 것이고, 남침을 당한 한국인이기도 하다. 더구나 밴 플리트의 아들은 자원해서 한국에 왔다. 동포가 아닌 타국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던진 이 젊은이에게 살아 있는 한국인들은 모두가 빚을 지고 있는 셈이다. 미국 CIA 부장으로 있던 알렌 덜레스와 그의 형제 존 포스터 덜레스 형제는 장로교 목사를 아버지로 하여 태어났다. 형인 알렌 덜레스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스위스에 머물면서 정보공작을 지휘하였다. 그는 1947년 미국 CIA가 창설될 때 많은 도움을 주었고 1953년부터 9년간 CIA 부장직을 맡았다. 그의 동생 덜레스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아래서 국무장관으로 일하였다.

미국 CIA창설에 많은 공로를 세웠고 1953년년부터 알렌 덜레스는 독자를 가졌는데 이름이 알렌 메시 덜레스 2세였다. 그는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역사와 정치를 공부하면서 공직자의 길을 준비하고 있던 중 6•25 남침전쟁이 터지자 해병대에 지원하여 장교로서 한국전선에 배치되었다. 그는 최전방에서 싸웠다. 아버지는 아들을 후방에서 근무하도록 해달라는 따위의 영향력을 전혀 행사하지 않았다. 그는 1952년 머리에 총상을 맞고 영구적인 정신장애자가 되었다. 프린스턴 대학은 앞날이 촉망되던 젊은이의 희생을 기려 1997년에 ‘알렌 메시 덜레스 51년 상’을 제정하여 국가를 위하여 봉사한 학생들에게 주고 있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아들 존 셀던 도드 아이젠하워도 장교로 참전하였다. 아이젠하워가 195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였을 때 아들은 한국전선의 미군 전투 대대에 배속된 소령이었다. 대통령 당선자는 한국전선을 방문한 자리에서 지휘관에게 “내 아들이 포로가 되지 않도록 부탁한다”고 했다. 대통령의 아들이 적군의 포로가 되어 이용당하는 사태만은 막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죽음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국가적인 피해를 막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워싱턴D.C의 알링턴 국립묘지에는 알만한 유명인사의 묘도 있고, 이름 없는 무명용사의 묘도 있다. 유명하든 무명하든 그들의 공통점은 국가의 부름에 주저없이 응하여 목숨을 초개같이 던졌다는 사실이다. 국가의 오늘이, 우리 자신의 오늘이 그들의 희생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