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텍은 나에게 예수님의 제자의 삶을 깨우쳐 주고, 지도자로 훈련시키고 결국 목회자의 비젼을 준 영적 전환점이 있었던 곳이다. 나이 32세의 늦깍이 대학생으로 두 살된 쌍둥이의 손을 잡고 캠퍼스에 들어 선 것은 91년 1월 차가운 겨울이었다. 캠퍼스 중앙에 자리잡은 Drillfield 광장과 그 주위를 빙 둘러 우뚝 솟아있는 화강석 건물들의 자태는 추운 겨울이었지만 포근하게 나를 감싸앉는 그런 기분이었다.
KCCC! 캠퍼스 사역자들의 간절한 기도와 순수한 열정이 날날이 신자였던 내 영혼에 다가온 어느 이른 봄날은 내 인생의 봄이 열리는 귀한 날이기도 했다. 인생의 차가운 겨울을 막 지나고 있던 나에게 버지니아텍의 봄볕은 따뜻했고 얼음처럼 차가운 내 가슴에 냉기를 물리치는 강력한 힘이 있었다.
버지니아텍을 떠난 지 15년이 지난 지금, 한 청년의 분노와 광기의 소용돌이가 화강석으로 둘러 싸인 캠퍼스에서 용암처럼 솟아 오르며 온 세상을 눈물과 슬픔의 잿더미로 뒤덮어 버리고 있다. 사건의 결과는 참혹했으며 온 세상을 놀라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 사건의 결과 보다는 더욱 나를 놀라게 한 것이 있다. TV 화면에 나타난 조승희군의 차가운 분노와 광기어린 얼굴에서 다름아닌 분노의 겨울에 떨고 있었던 나의 옛 모습과 많이 흡사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승희군이 국민학교 3학년 때에 미국에 이민 와 이방인이 되었던 것처럼, 나 또한 국민학교 4학년 때에 서울에서 대구로 전학 와 외로움과 고독의 시간이 있었다.
‘서울내기 다마내기 맛 좋은 고래고기!’ 이유 없는 아이들의 놀림 속에 나의 분노의 겨울은 시작 되었다. 백 팩에 권총과 탄창을 넣고 캠퍼스를 홀로 가로 지르는 조승희군의 모습을 상상할 때면, 가방 속에 늘 야구 방망이를 넣고 운동장을 거쳐 교실로 향하던 나를 바라보게 된다. 조승희의 고독과 외로움 그리고 그의 분노가 그만의 것이 아닌 나의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마 이 사건을 바라보는 수 많은 사람들, 특히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이민자들과 특히 1.5세들은 아마 나와 비슷한 경험과 환경과 생각을 공유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 우리 모든 사람들이 다 똑같이 인생의 외로움과 고독과 분노 가운데 가인처럼 광야에서 자신의 동생 아벨을 죽이는 원천적 살인자로 살아가는 존재인 것을 깨달아야 한다. 가인의 분노와 조승희의 광란이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의 모습이라는 사실이다.
눈 얼음이 녹기 시작한 틈새로 풀꽃의 생기가 순을 돋는 어느 이른 봄 날이었다. 나는 편입한지 처음으로 Drillfield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War Memorial Chaple에 기도 모임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새벽6시, 문을 열고 들어 서는 순간이었다. 단지 한인 학생들 몇몇이 모이는 것으로만 생각했던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곳에는 수 많은 그룹의 학생들이 작게는 3-4명씩, 많게는 7-8명씩 이곳 저곳에 앉아서 기도하고 있는 것이었다. 새벽기도는 한국사람들만 하는 줄 알았던 나의 상식이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비록 서로 방해가 되지 않도록 작게 소리 내어 기도하고 있었지만, 저들의 모습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간절함과 경건함이 있었고 서로간의 사랑과 생명력이 넘치고 있었다. 아마 지금도 그 Chaple 안엔 수 많은 기도의 용사들이 기도의 눈물을 뿌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따뜻한 눈물의 기도가 외로움과 고독과 분노의 겨울을 몰아내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의문점을 풀어야 될 것이 있다. 어떻게 그토록 욥처럼 신앙적으로 열심인 캠퍼스가 이런 엄청난 악의 피로 물들게 되었냐는 것이다. 단지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치는’ 것 같이 은혜가 넘치는 곳에 악의 역사와 하나님의 시험이 크다고만 하기엔 확실한 책임 규명이 되질 않는다. ‘왜 하나님께선 우리 아들과 딸에게, 혹은 사랑하는 나의 벗과 함께 동역하며 복음을 전하던 CCC간사들을 한 순간 광란의 희생자로 삼으셨는가?’ ‘조의 광기가 광장을 메울 때, 하나님께서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계셨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단지 버지니아텍 사건에만 국한 된 질문이 아니다. 쓰나미의 희생자들과 카트리나 허리케인에 희생된 뉴올리언스와 같이 지금도 세계 곳곳에 펼쳐지는 악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책임이 어디인가라는 궁극적인 질문이다.
성경에 보면, 우리 인간이 맞이하게 되는 악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확실한 대답을 주신다.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하여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신다. 그리고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신다. 먼저 아담에게,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하와에게는,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이 두가지 질문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아담과 하와에게만 주시는 질문이 아니다. 우리 모든 인생에게 던지시는 질문이다. 그런데 한가지 이 질문에 있어서 이해되어야 할 전제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이 질문을 하나님께서 모르고 질문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이라면 모든 것을 아시는 (Omniscience) 존재여야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질문은 하나님께서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서 하신 질문이 아니라 죄에 빠진 아담과 하와에게 저들이 앞으로 당할 형벌과 악의 문제에 있어 확실하게,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한 자’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는가’의 그 책임의 소재를 인생들에게 확실하게 하고자 하신 유도적 질문이요 그 안에 대답이 있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창3:13)’로 대답을 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당할 형벌의 책임이 먼저는 죄를 인간에게 유발시킨 사탄에게 있으며, 그 사탄의 꾐에 빠져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선악과를 먹은 ‘내’게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하신 것이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뱀을 저주하시고 인간들에겐 죄의 형벌을 내리신다. 이때에 이미 우리 모든 인생의 악의 문제가 시작되었고, 그것을 벗어 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만 것이다. 그 연장 선에서 우리 인생이 당하는 모든 재난과 사건들 그리고 버지니아텍의 희생을 조명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들은 ‘왜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이라는 의문을 접어 두고, 버지니아텍 사건의 궁극적인 책임은 사탄과 그에 동조한 조승희의 광란적 행동에 있다는 것을 확실히 하자. 그리고 가인과 같은 그 광란의 본 모습을 우리 안에서도 발견하자.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선, 그의 은혜가 아니고선, 그의 사랑이 아니고선, 우리도 분노로 광야에서 동생을 죽인 가인과 같은 자들이요, 학우들을 처참하게 살해한 ‘이스마엘의 도끼’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나의 사랑하는 버지니아텍 후배와 동지들이여!
이제 손의 손을 붙잡고 서로 위로하며 하나님의 사랑의 끈을 끝까지 놓치지 말자! Chaple에서 발출되는 대포와 같은 우렁찬 기도 소리로 잠시 캠퍼스를 어지럽힌 광란의 총소리를 잠 제우자! Drillfield에 남긴 사탄의 발자국을 복음의 우슬초로 성결케 하자!
Let’s go Hokies!!!
김재곤 목사 (현 한마음 교회 담임목사 in Fremont, CA, 버지니아텍 졸업,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in CA 졸업)
KCCC! 캠퍼스 사역자들의 간절한 기도와 순수한 열정이 날날이 신자였던 내 영혼에 다가온 어느 이른 봄날은 내 인생의 봄이 열리는 귀한 날이기도 했다. 인생의 차가운 겨울을 막 지나고 있던 나에게 버지니아텍의 봄볕은 따뜻했고 얼음처럼 차가운 내 가슴에 냉기를 물리치는 강력한 힘이 있었다.
버지니아텍을 떠난 지 15년이 지난 지금, 한 청년의 분노와 광기의 소용돌이가 화강석으로 둘러 싸인 캠퍼스에서 용암처럼 솟아 오르며 온 세상을 눈물과 슬픔의 잿더미로 뒤덮어 버리고 있다. 사건의 결과는 참혹했으며 온 세상을 놀라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 사건의 결과 보다는 더욱 나를 놀라게 한 것이 있다. TV 화면에 나타난 조승희군의 차가운 분노와 광기어린 얼굴에서 다름아닌 분노의 겨울에 떨고 있었던 나의 옛 모습과 많이 흡사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승희군이 국민학교 3학년 때에 미국에 이민 와 이방인이 되었던 것처럼, 나 또한 국민학교 4학년 때에 서울에서 대구로 전학 와 외로움과 고독의 시간이 있었다.
‘서울내기 다마내기 맛 좋은 고래고기!’ 이유 없는 아이들의 놀림 속에 나의 분노의 겨울은 시작 되었다. 백 팩에 권총과 탄창을 넣고 캠퍼스를 홀로 가로 지르는 조승희군의 모습을 상상할 때면, 가방 속에 늘 야구 방망이를 넣고 운동장을 거쳐 교실로 향하던 나를 바라보게 된다. 조승희의 고독과 외로움 그리고 그의 분노가 그만의 것이 아닌 나의 것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아마 이 사건을 바라보는 수 많은 사람들, 특히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이민자들과 특히 1.5세들은 아마 나와 비슷한 경험과 환경과 생각을 공유하고 있을 것이다. 아니, 우리 모든 사람들이 다 똑같이 인생의 외로움과 고독과 분노 가운데 가인처럼 광야에서 자신의 동생 아벨을 죽이는 원천적 살인자로 살아가는 존재인 것을 깨달아야 한다. 가인의 분노와 조승희의 광란이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의 모습이라는 사실이다.
눈 얼음이 녹기 시작한 틈새로 풀꽃의 생기가 순을 돋는 어느 이른 봄 날이었다. 나는 편입한지 처음으로 Drillfield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War Memorial Chaple에 기도 모임으로 참석하게 되었다. 새벽6시, 문을 열고 들어 서는 순간이었다. 단지 한인 학생들 몇몇이 모이는 것으로만 생각했던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곳에는 수 많은 그룹의 학생들이 작게는 3-4명씩, 많게는 7-8명씩 이곳 저곳에 앉아서 기도하고 있는 것이었다. 새벽기도는 한국사람들만 하는 줄 알았던 나의 상식이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다. 비록 서로 방해가 되지 않도록 작게 소리 내어 기도하고 있었지만, 저들의 모습 속에는 하나님에 대한 간절함과 경건함이 있었고 서로간의 사랑과 생명력이 넘치고 있었다. 아마 지금도 그 Chaple 안엔 수 많은 기도의 용사들이 기도의 눈물을 뿌리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따뜻한 눈물의 기도가 외로움과 고독과 분노의 겨울을 몰아내고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한가지 의문점을 풀어야 될 것이 있다. 어떻게 그토록 욥처럼 신앙적으로 열심인 캠퍼스가 이런 엄청난 악의 피로 물들게 되었냐는 것이다. 단지 ‘죄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치는’ 것 같이 은혜가 넘치는 곳에 악의 역사와 하나님의 시험이 크다고만 하기엔 확실한 책임 규명이 되질 않는다. ‘왜 하나님께선 우리 아들과 딸에게, 혹은 사랑하는 나의 벗과 함께 동역하며 복음을 전하던 CCC간사들을 한 순간 광란의 희생자로 삼으셨는가?’ ‘조의 광기가 광장을 메울 때, 하나님께서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계셨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단지 버지니아텍 사건에만 국한 된 질문이 아니다. 쓰나미의 희생자들과 카트리나 허리케인에 희생된 뉴올리언스와 같이 지금도 세계 곳곳에 펼쳐지는 악의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책임이 어디인가라는 궁극적인 질문이다.
성경에 보면, 우리 인간이 맞이하게 되는 악의 문제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확실한 대답을 주신다. 하나님의 말씀에 거역하여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나신다. 그리고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신다. 먼저 아담에게,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하와에게는,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이 두가지 질문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아담과 하와에게만 주시는 질문이 아니다. 우리 모든 인생에게 던지시는 질문이다. 그런데 한가지 이 질문에 있어서 이해되어야 할 전제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이 질문을 하나님께서 모르고 질문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이라면 모든 것을 아시는 (Omniscience) 존재여야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질문은 하나님께서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서 하신 질문이 아니라 죄에 빠진 아담과 하와에게 저들이 앞으로 당할 형벌과 악의 문제에 있어 확실하게,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한 자’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는가’의 그 책임의 소재를 인생들에게 확실하게 하고자 하신 유도적 질문이요 그 안에 대답이 있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창3:13)’로 대답을 한다. 즉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당할 형벌의 책임이 먼저는 죄를 인간에게 유발시킨 사탄에게 있으며, 그 사탄의 꾐에 빠져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선악과를 먹은 ‘내’게 있다는 것을 명백하게 하신 것이다. 그 후 하나님께서는 뱀을 저주하시고 인간들에겐 죄의 형벌을 내리신다. 이때에 이미 우리 모든 인생의 악의 문제가 시작되었고, 그것을 벗어 날 수 없는 존재가 되고 만 것이다. 그 연장 선에서 우리 인생이 당하는 모든 재난과 사건들 그리고 버지니아텍의 희생을 조명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 우리들은 ‘왜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이라는 의문을 접어 두고, 버지니아텍 사건의 궁극적인 책임은 사탄과 그에 동조한 조승희의 광란적 행동에 있다는 것을 확실히 하자. 그리고 가인과 같은 그 광란의 본 모습을 우리 안에서도 발견하자. 하나님을 만나지 않고선, 그의 은혜가 아니고선, 그의 사랑이 아니고선, 우리도 분노로 광야에서 동생을 죽인 가인과 같은 자들이요, 학우들을 처참하게 살해한 ‘이스마엘의 도끼’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나의 사랑하는 버지니아텍 후배와 동지들이여!
이제 손의 손을 붙잡고 서로 위로하며 하나님의 사랑의 끈을 끝까지 놓치지 말자! Chaple에서 발출되는 대포와 같은 우렁찬 기도 소리로 잠시 캠퍼스를 어지럽힌 광란의 총소리를 잠 제우자! Drillfield에 남긴 사탄의 발자국을 복음의 우슬초로 성결케 하자!
Let’s go Hokies!!!
김재곤 목사 (현 한마음 교회 담임목사 in Fremont, CA, 버지니아텍 졸업, Westminster Theological Seminary in CA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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