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속담에 “꿩 잡는 것이 매 잡는 것”이라는 속담이 있다. 매를 잡아야 하는데 매잡기 힘들어 꿩이라도 잡으면 된다는 임기응변(臨機應變)식의 삶을 지적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중국 손초라는 사람이 친구에게 낙향하여 살겠다고 말하면서, 돌로 양치질을 하고 흐르는 물을 베개로 삼겠다고 했다. 이 말은 원래 돌로 베개를 삼고, 물로 양치질을 하겠다는 것을 잘못 말한 것이다. 이 말을 들은 친구가 잘못 말한 것을 지적하자, 손초는 ‘흐르는 물을 베개로 삼겠다는 말은 더러운 말을 들으면 귀를 씻기 위함이고, 돌로 양치질을 한다는 것은 이를 튼튼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정말 재미있고, 누가 들어도 우습기만 한 이야기이다. 이런 것은 삶의 지혜이고, 난처한 상황을 무난하게 넘어가게 만드는 처세술로 인정받을 만하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럴 수 없다. 진리는 하나이고, 오직 그것뿐이다. 다른 변수나 다른 변칙은 있을 수 없다. 기독교의 진리는 왜곡할 수도 없으며, 약화될 수도 없으며, 그리고 아전인수식이거나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으로 맞출 수 없는 것이다.
오늘 날의 기독교와 교회를 향한 칭찬의 소리도 있지만 비판의 소리도 없지 않다. 자성의 소리, 타성의 소리가 분분하다. 어떤 소리라도 잘 들어서 소화 시키면 피와 살이 되지만 잘 듣지 못하면 독이 되고 만다. 진리는 상황에 따라 변하고, 사람에 따라 다르고, 사건에 따라 나눠지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태복음5:18).
기독교를 위협하고 있는 가장 큰 위협은 종교다원주의이다. 이 말은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 기독교 내에서 조심해야 할 큰 악한 영의 도전이라고 경계를 하고 있다. 종교다원주의(Post Modernism)는 크게 말하면 범신론이다. 그리스도외에 또 다른 구원이 다른 종교, 자기 자신, 그리고 어디에라도 마음속에 의지할 수 있는 곳이라면 자기를 구원하는 길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기독교 밖에서도 종교다원주의가 있지만 더 경계해야 할 것은 기독교 안의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이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이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격이 되는 것이다. 10명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현장을 떠났다. 오직 사도 요한만이 그 자리를 지켰다. 일반 유대인들이야 할 수 없지만 그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렸으니 예수님의 마음이야 오죽 안타까웠겠는가?
기독교의 진리는 하나님을 위해(For), 하나님과 함께(With), 하나님을 통해서(Through)이다. 이것이 아니면 다 허구요, 거짓이다. 떡을 주고, 빵을 준다고 해서 예수님을 찾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십자가와 부활이다. 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누룩을 발견하는 것이 기독교이다.
교회는 부흥해야 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성장해야 한다. 교회는 성장하는 데 하나님의 나라가 멈춘다면 어딘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진리는 지키고, 전하라고 있는 것이지 가꾸고 단장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양념을 넣지 않아도 꿀처럼 달콤한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진리 하나만을 위해 인생을 걸었고, 목회를 걸었고, 직분을 걸었다. 그들은 무엇이 올바른 신학인가, 무엇이 올바른 교회인가, 무엇이 올바른 목회자인가를 고민하여 답을 찾기 위해 목숨을 내 놓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개혁의 유산을 물려받은 오늘 우리는 그 유산을 마음대로 탕진하고 있다. 지조도 없고, 정결함도 없고, 길도 모르고, 무엇이든지 그저 군중에 의해, 대중매체에 의해 흘러가고 있다. 목회자도 신학이 있어야 한다. 철학이 있어야 한다. 교리가 살아 있어야 한다. 물론 사랑은 철철 넘쳐야 한다. 사람의 칭찬과 박수, 대중매체의 플래쉬라이트, 신문의 보도에 눈이 어두워 무엇이 진리인지 모르고 허둥대다가는 큰 코를 다치게 된다.
이리 가든 저리 가든 한양에만 가면 된다는 식의 기독교와 교회는 이제 멈추어야 한다. 매 잡으려는 기독교가 혹시 꿩이라도 잡아야 하는 교회가 될까 더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교회여야 하고, 교회가 기독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정말 재미있고, 누가 들어도 우습기만 한 이야기이다. 이런 것은 삶의 지혜이고, 난처한 상황을 무난하게 넘어가게 만드는 처세술로 인정받을 만하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럴 수 없다. 진리는 하나이고, 오직 그것뿐이다. 다른 변수나 다른 변칙은 있을 수 없다. 기독교의 진리는 왜곡할 수도 없으며, 약화될 수도 없으며, 그리고 아전인수식이거나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식으로 맞출 수 없는 것이다.
오늘 날의 기독교와 교회를 향한 칭찬의 소리도 있지만 비판의 소리도 없지 않다. 자성의 소리, 타성의 소리가 분분하다. 어떤 소리라도 잘 들어서 소화 시키면 피와 살이 되지만 잘 듣지 못하면 독이 되고 만다. 진리는 상황에 따라 변하고, 사람에 따라 다르고, 사건에 따라 나눠지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태복음5:18).
기독교를 위협하고 있는 가장 큰 위협은 종교다원주의이다. 이 말은 이미 오래 전부터 우리 기독교 내에서 조심해야 할 큰 악한 영의 도전이라고 경계를 하고 있다. 종교다원주의(Post Modernism)는 크게 말하면 범신론이다. 그리스도외에 또 다른 구원이 다른 종교, 자기 자신, 그리고 어디에라도 마음속에 의지할 수 있는 곳이라면 자기를 구원하는 길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기독교 밖에서도 종교다원주의가 있지만 더 경계해야 할 것은 기독교 안의 종교다원주의(Religious Pluralism)이다.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이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격이 되는 것이다. 10명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현장을 떠났다. 오직 사도 요한만이 그 자리를 지켰다. 일반 유대인들이야 할 수 없지만 그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렸으니 예수님의 마음이야 오죽 안타까웠겠는가?
기독교의 진리는 하나님을 위해(For), 하나님과 함께(With), 하나님을 통해서(Through)이다. 이것이 아니면 다 허구요, 거짓이다. 떡을 주고, 빵을 준다고 해서 예수님을 찾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십자가와 부활이다. 빵을 찾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누룩을 발견하는 것이 기독교이다.
교회는 부흥해야 한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성장해야 한다. 교회는 성장하는 데 하나님의 나라가 멈춘다면 어딘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진리는 지키고, 전하라고 있는 것이지 가꾸고 단장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양념을 넣지 않아도 꿀처럼 달콤한 것이다. 종교개혁자들은 진리 하나만을 위해 인생을 걸었고, 목회를 걸었고, 직분을 걸었다. 그들은 무엇이 올바른 신학인가, 무엇이 올바른 교회인가, 무엇이 올바른 목회자인가를 고민하여 답을 찾기 위해 목숨을 내 놓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개혁의 유산을 물려받은 오늘 우리는 그 유산을 마음대로 탕진하고 있다. 지조도 없고, 정결함도 없고, 길도 모르고, 무엇이든지 그저 군중에 의해, 대중매체에 의해 흘러가고 있다. 목회자도 신학이 있어야 한다. 철학이 있어야 한다. 교리가 살아 있어야 한다. 물론 사랑은 철철 넘쳐야 한다. 사람의 칭찬과 박수, 대중매체의 플래쉬라이트, 신문의 보도에 눈이 어두워 무엇이 진리인지 모르고 허둥대다가는 큰 코를 다치게 된다.
이리 가든 저리 가든 한양에만 가면 된다는 식의 기독교와 교회는 이제 멈추어야 한다. 매 잡으려는 기독교가 혹시 꿩이라도 잡아야 하는 교회가 될까 더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기독교가 교회여야 하고, 교회가 기독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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