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 4:1-11
1. 요나 선지자에 대한 고찰
요나는 아밋대의 아들로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 통치시대(BC 793-753)에 활동한 구약시대 선지자로서는 최초의 이방선교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요4:1-2)”고 지시하셨으나 요나는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욥바로 가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니느웨의 반대편으로 도망갔으나 여호와께서 폭풍을 크게 일으키사 배가 파선될 때 사공들이 물건을 바다에 던지고 배를 가볍게 했으나 배가 더욱 위태롭게 됨으로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 재앙이 누구 때문인지를 가려 내기 위해 제비뽑기를 했는데 요나가 뿁혔습니다.
잠언 16:33에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했습니다. 뱃사람들이 요나에게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했는지 네가 밝히라 했을 때 9절에서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고 말하고 10절에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줄을 그들에게 고하였고 그들은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고 원망어린 책망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나 지금에나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 불순종하게 되면 그 사람의 잘못으로 자신의 불행은 말할 것도 없고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엄청난 피해와 고통과 불안을 주게 되기 때문에 결국 불신자들로부터 원책을 당하도록 만드십니다. 뱃사람들이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해야 바다가 잠잠해지겠느냐고 물었을 때 12절에서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해야 바다가 잔잔해 질 것이라고 스스로 자신에게 사형언도를 내리고 이 큰 폭풍은 내 죄 값의 결과라고 고백했습니다.
15절 이하에서 결국 요나는 바다에 던져졌고 바다는 곧 잔잔해졌습니다. 17절에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고 요나는 물고기 뱃 속에서 삼일삼야를 지내야 했습니다. 마태복음 12:40에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 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합니다. 2장의 내용을 보면 요나는 물고기 뱃 속에서 비로서 회개가 터져 나왔고 자기 영혼이 바다 밑바닥을 누비고 산뿌리까지 오르락 내리락 했으나 죽지 않도록 생명을 붙들어 살리시고 계신 하나님을 기대하며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는다며 죽을 힘을 다해 회개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물고기로 육지에 토하게 하심으로 요나가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3장에는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고 도망가던 요나를 큰 풍랑과 고기를 예비하여 회개시키신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니느웨로 다시 돌아가게 하여 선지자의 선교 사명을 시작하게 하신 것입니다.
2. 니느웨의 죄악상
니느웨는 앗수르의 가장 큰 도시로 창세기 10:11-12에 보면 영걸 니므롯이 건설한 성읍들 중 하나이며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오래된 규모가 가장 큰 도시로서 둘레가 96Km나 되었고 티그리스 강 동편에 있었으며 앗수르 전성기엔 수도이기도 했습니다.
BC 760년경에 요나가 니느웨를 방문했었다는 기록이 앗수르 역사에도 기록되어 있었고 그 당시 앗수르왕은 앗수르단 3세(BC 771-754)로 그 당시 인구는 남여노유 약 60만이었다고 합니다. 요나 1:2절에서 니느웨의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다고 하시면서 요나에게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하셨습니다. 그 죄악들은 크게 3가지로 윤리적인 죄, 주색잡기로 방탕했고 사회계층간 강포의 죄와 우상숭배의 죄로 심판에 대한 사전 경고도 여러차례 있었습니다. 실례로 앗수르는 나약한 왕들의 쇄국정책으로 국력이 쇠약해졌고 BC 768년에는 6월에 일식으로 백성들이 두려움과 공포에 떨게도 하셨으며 BC 765년에는 전염병이 전국을 휩쓸어 인명과 가축에 많은 죽음을 겪게도 하셨으나 그들은 도무지 회개할 줄 모른채 계속해서 같은 죄악을 일삼았기 때문에 대심판의 경고를 내리시게 된것입니다.
그 당시 니느웨는 3일길을 걸어야 통과할 수 있을만큼 큰 도시인데다 막강한 경제력으로 부강했으며(사20:4참조) 뛰어난 건축물로 호화판 주거문화를 자랑했지만 역사가 밝혀왔듯이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이 부강하게 되면 음란방탕하거나 강포로 객기를 일삼게 되거나 부귀영화에 대한 상실 불안감 때문인지 미신우상을 정신없이 섬김으로 멸망을 재촉하는 사례를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 한국의 죄악상도 예외가 아닌 것 같아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두렵기 그지 없습니다. 나훔 선지를 통한 예언에도 “화 있을찐저 피 성이여 그 속에서는 궤휼과 강포가 가득하며 늑탈이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휙휙 하는 채찍 소리, 굉굉 하는 병거 바퀴 소리, 뛰는 말, 달리는 병거,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살륙당한 떼, 큰 무더기 주검,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이는 마술의 주인된 아리따운 기생이 음행을 많이 함을 인함이라 그가 그 음행으로 열국을 미혹하고 그 마술로 여러 족속을 미혹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어서 네 치마를 걷어쳐 네 얼굴에 이르게 하고 네 벌거벗은 것을 열국에 보이며 네 부끄러운 곳을 열방에 보일 것이요 내가 또 가증하고 더러운 것을 네 위에 던져 능욕하여 너로 구경거리가 되게 하리니 그 때에 너를 보는 자가 다 네게서 도망하며 이르기를 니느웨가 황무하였도다 누가 위하여 애곡하며 내가 어디서 너를 위로할 자를 구하리요 하리라 하시도다(나3:1-7)” 하셨으나 로마서 2:5절의 말씀처럼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심과 같았던 것입니다.
3. 요나가 니느웨의 구원을 원치 않았던 이유
오래도록 역사 속에서 여러차례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침공했으며 사람들을 사로잡아갔고 재산을 약탈해간 앗수르의 대도시 니느웨를 구원해 주시려고 요나가 가서 회개시키라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내심으로는 니느웨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하기를 소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나가 고기 뱃속에서 죽을 지경에 처하여 회개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수행할 것을 서원했기에 다시 살아 나와서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임으로 삼일길이라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3:3-4)” 했고 5절 이하에선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왕과 백성들과 짐승들까지 금식을 선포하고 전적으로 애통하고 자복하기를 철저히 했기 때문에 죄악을 떠나 악한 길에서 돌이킨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재앙 대신 긍휼의 은혜와 용서로 그 성을 멸하지 않으시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의 편견은 아직도 변함이 없어 성을 떠나 언덕에 초막을 짓고 니느웨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명하게 되는 모습을 보자고 하면서도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신 줄을 알았다고는 하면서 4:3절에서는 “여호와여 원컨데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라고 오도방정을 떨었습니다.
4절에 “여호와께서는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시며 6절에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위에 햇빛을 가리워지게” 해 주셨습니다. 요나는 박 넝쿨 그늘을 크게 기뻐했습니다. 7절에 “하나님은 다시 벌레를 시켜 요나가 그토록 기뻐했던 박 넝쿨을 씹어 버리게 하시니 박 넝쿨이 금방 시들어 그늘이 없어지므로 해가 뜰때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불게 하시므로 요나가 혼곤하다며 스스로 죽기를 청하였다”했습니다. 요나가 구약 선지자들 중 처음으로 해외 선교 사역을 감당하면서도 편견에 고착되어 선교지 주민의 영혼을 사랑할 줄 몰랐고 지나칠 정도로 자기육신의 안일무사주의와 이기적 처세로 일관하는 모습에서 오늘의 한국 교회도 특히 선교사들이 많은 것을 깨달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9절에서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찌라도 합당하니이다”라고 했을때 10-11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하심으로 긍휼과 은혜며 사랑이 무한하신 하나님은 죄인들을 보시며 걱정하시는 것이 심판으로 멸망시킬 근심보다 회개시켜 구원해 주시려는 목적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선교사명을 저버리고 다시스로 도망가는 요나를 거센 파도로 길을 막으셨고 제비뽑기로 걸리게 하시며 스스로의 죄를 공개자백하게 하셨으며 스스로 사형언도를 내려 바다에 던져 달라 하게 되고 큰 고기를 예비하사 통째로 삼키게 하셔서 고기 뱃속에서 3일을 회개하게 하심으로 선교사명에 복종하게 만드셔서 기어코 니느웨에 가서 심판을 경고하게 하셨습니다.
니느웨가 금식하며 회개하고 불의와 죄악에서 떠난 것을 보시고 심판을 돌이켜 용서와 구원으로 바꾸셨는데 원수시 해 온 니느웨의 구원을 너무나 못마땅해 하는 자기의 종 철부지 요나를 박 넝쿨과 벌레와 뜨거운 동풍들의 체험을 통하여 영혼의 가치와 선교사명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시는 우리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너그러우심과 무한하신 사랑을 확인시켜 주신 것입니다.
영혼 구원을 얻은 사람이 지옥 형벌을 면케 된 감격적인 기쁨을 이기지 못해 눈물로 감사드리며 주변에 지옥가고 있는 영혼들을 구원해야겠다는 성령의 뜨거운 감동이 있을 때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는 주님과 같이 영혼을 가장 귀하게 알고 또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이 모든 것을 투자하고 희생하면서 위험과 죽음까지도 불사하고 복음의 제물이 될 수 있는 법입니다. 사도행전 20:24에“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하였고, 고린도전서 9:14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하셨습니다. 이처럼 요나가 선교사명을 실천했을 때 니느웨도 살렸고 자신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1. 요나 선지자에 대한 고찰
요나는 아밋대의 아들로 북 이스라엘의 여로보암 2세 통치시대(BC 793-753)에 활동한 구약시대 선지자로서는 최초의 이방선교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요나에게“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요4:1-2)”고 지시하셨으나 요나는 여호와의 낯을 피하여 욥바로 가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니느웨의 반대편으로 도망갔으나 여호와께서 폭풍을 크게 일으키사 배가 파선될 때 사공들이 물건을 바다에 던지고 배를 가볍게 했으나 배가 더욱 위태롭게 됨으로 배 안에 있는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 재앙이 누구 때문인지를 가려 내기 위해 제비뽑기를 했는데 요나가 뿁혔습니다.
잠언 16:33에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했습니다. 뱃사람들이 요나에게 이 재앙이 무슨 연고로 우리에게 임했는지 네가 밝히라 했을 때 9절에서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라고 말하고 10절에 “자기가 여호와의 낯을 피함인줄을 그들에게 고하였고 그들은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행하였느냐”고 원망어린 책망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나 지금에나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 불순종하게 되면 그 사람의 잘못으로 자신의 불행은 말할 것도 없고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엄청난 피해와 고통과 불안을 주게 되기 때문에 결국 불신자들로부터 원책을 당하도록 만드십니다. 뱃사람들이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해야 바다가 잠잠해지겠느냐고 물었을 때 12절에서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해야 바다가 잔잔해 질 것이라고 스스로 자신에게 사형언도를 내리고 이 큰 폭풍은 내 죄 값의 결과라고 고백했습니다.
15절 이하에서 결국 요나는 바다에 던져졌고 바다는 곧 잔잔해졌습니다. 17절에 여호와께서 이미 큰 물고기를 예비하사 요나를 삼키게 하셨고 요나는 물고기 뱃 속에서 삼일삼야를 지내야 했습니다. 마태복음 12:40에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 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있으리라”합니다. 2장의 내용을 보면 요나는 물고기 뱃 속에서 비로서 회개가 터져 나왔고 자기 영혼이 바다 밑바닥을 누비고 산뿌리까지 오르락 내리락 했으나 죽지 않도록 생명을 붙들어 살리시고 계신 하나님을 기대하며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는다며 죽을 힘을 다해 회개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물고기로 육지에 토하게 하심으로 요나가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3장에는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고 도망가던 요나를 큰 풍랑과 고기를 예비하여 회개시키신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니느웨로 다시 돌아가게 하여 선지자의 선교 사명을 시작하게 하신 것입니다.
2. 니느웨의 죄악상
니느웨는 앗수르의 가장 큰 도시로 창세기 10:11-12에 보면 영걸 니므롯이 건설한 성읍들 중 하나이며 메소포타미아에서 가장 오래된 규모가 가장 큰 도시로서 둘레가 96Km나 되었고 티그리스 강 동편에 있었으며 앗수르 전성기엔 수도이기도 했습니다.
BC 760년경에 요나가 니느웨를 방문했었다는 기록이 앗수르 역사에도 기록되어 있었고 그 당시 앗수르왕은 앗수르단 3세(BC 771-754)로 그 당시 인구는 남여노유 약 60만이었다고 합니다. 요나 1:2절에서 니느웨의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다고 하시면서 요나에게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하셨습니다. 그 죄악들은 크게 3가지로 윤리적인 죄, 주색잡기로 방탕했고 사회계층간 강포의 죄와 우상숭배의 죄로 심판에 대한 사전 경고도 여러차례 있었습니다. 실례로 앗수르는 나약한 왕들의 쇄국정책으로 국력이 쇠약해졌고 BC 768년에는 6월에 일식으로 백성들이 두려움과 공포에 떨게도 하셨으며 BC 765년에는 전염병이 전국을 휩쓸어 인명과 가축에 많은 죽음을 겪게도 하셨으나 그들은 도무지 회개할 줄 모른채 계속해서 같은 죄악을 일삼았기 때문에 대심판의 경고를 내리시게 된것입니다.
그 당시 니느웨는 3일길을 걸어야 통과할 수 있을만큼 큰 도시인데다 막강한 경제력으로 부강했으며(사20:4참조) 뛰어난 건축물로 호화판 주거문화를 자랑했지만 역사가 밝혀왔듯이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사람이 부강하게 되면 음란방탕하거나 강포로 객기를 일삼게 되거나 부귀영화에 대한 상실 불안감 때문인지 미신우상을 정신없이 섬김으로 멸망을 재촉하는 사례를 보게 됩니다.
오늘 우리 한국의 죄악상도 예외가 아닌 것 같아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이 두렵기 그지 없습니다. 나훔 선지를 통한 예언에도 “화 있을찐저 피 성이여 그 속에서는 궤휼과 강포가 가득하며 늑탈이 떠나지 아니하는도다 휙휙 하는 채찍 소리, 굉굉 하는 병거 바퀴 소리, 뛰는 말, 달리는 병거, 충돌하는 기병, 번쩍이는 칼, 번개 같은 창, 살륙당한 떼, 큰 무더기 주검, 무수한 시체여 사람이 그 시체에 걸려 넘어지니 이는 마술의 주인된 아리따운 기생이 음행을 많이 함을 인함이라 그가 그 음행으로 열국을 미혹하고 그 마술로 여러 족속을 미혹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네 대적이 되어서 네 치마를 걷어쳐 네 얼굴에 이르게 하고 네 벌거벗은 것을 열국에 보이며 네 부끄러운 곳을 열방에 보일 것이요 내가 또 가증하고 더러운 것을 네 위에 던져 능욕하여 너로 구경거리가 되게 하리니 그 때에 너를 보는 자가 다 네게서 도망하며 이르기를 니느웨가 황무하였도다 누가 위하여 애곡하며 내가 어디서 너를 위로할 자를 구하리요 하리라 하시도다(나3:1-7)” 하셨으나 로마서 2:5절의 말씀처럼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심과 같았던 것입니다.
3. 요나가 니느웨의 구원을 원치 않았던 이유
오래도록 역사 속에서 여러차례 앗수르가 이스라엘을 침공했으며 사람들을 사로잡아갔고 재산을 약탈해간 앗수르의 대도시 니느웨를 구원해 주시려고 요나가 가서 회개시키라는 하나님의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한 채 내심으로는 니느웨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망하기를 소원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나가 고기 뱃속에서 죽을 지경에 처하여 회개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수행할 것을 서원했기에 다시 살아 나와서 “요나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극히 큰 성읍임으로 삼일길이라 요나가 그 성에 들어가 하룻길을 행하며 외쳐 가로되 40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3:3-4)” 했고 5절 이하에선 니느웨 백성이 하나님을 믿고 왕과 백성들과 짐승들까지 금식을 선포하고 전적으로 애통하고 자복하기를 철저히 했기 때문에 죄악을 떠나 악한 길에서 돌이킨 모습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재앙 대신 긍휼의 은혜와 용서로 그 성을 멸하지 않으시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요나의 편견은 아직도 변함이 없어 성을 떠나 언덕에 초막을 짓고 니느웨가 하나님의 심판으로 멸명하게 되는 모습을 보자고 하면서도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신 줄을 알았다고는 하면서 4:3절에서는 “여호와여 원컨데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라고 오도방정을 떨었습니다.
4절에 “여호와께서는 너의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시며 6절에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위에 햇빛을 가리워지게” 해 주셨습니다. 요나는 박 넝쿨 그늘을 크게 기뻐했습니다. 7절에 “하나님은 다시 벌레를 시켜 요나가 그토록 기뻐했던 박 넝쿨을 씹어 버리게 하시니 박 넝쿨이 금방 시들어 그늘이 없어지므로 해가 뜰때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불게 하시므로 요나가 혼곤하다며 스스로 죽기를 청하였다”했습니다. 요나가 구약 선지자들 중 처음으로 해외 선교 사역을 감당하면서도 편견에 고착되어 선교지 주민의 영혼을 사랑할 줄 몰랐고 지나칠 정도로 자기육신의 안일무사주의와 이기적 처세로 일관하는 모습에서 오늘의 한국 교회도 특히 선교사들이 많은 것을 깨달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9절에서 “하나님이 요나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 박 넝쿨로 인하여 성냄이 어찌 합당하냐 그가 대답하되 내가 성내어 죽기까지 할찌라도 합당하니이다”라고 했을때 10-11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배양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망한 이 박 넝쿨을 네가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치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육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아끼는 것이 어찌 합당치 아니하냐”하심으로 긍휼과 은혜며 사랑이 무한하신 하나님은 죄인들을 보시며 걱정하시는 것이 심판으로 멸망시킬 근심보다 회개시켜 구원해 주시려는 목적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같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선교사명을 저버리고 다시스로 도망가는 요나를 거센 파도로 길을 막으셨고 제비뽑기로 걸리게 하시며 스스로의 죄를 공개자백하게 하셨으며 스스로 사형언도를 내려 바다에 던져 달라 하게 되고 큰 고기를 예비하사 통째로 삼키게 하셔서 고기 뱃속에서 3일을 회개하게 하심으로 선교사명에 복종하게 만드셔서 기어코 니느웨에 가서 심판을 경고하게 하셨습니다.
니느웨가 금식하며 회개하고 불의와 죄악에서 떠난 것을 보시고 심판을 돌이켜 용서와 구원으로 바꾸셨는데 원수시 해 온 니느웨의 구원을 너무나 못마땅해 하는 자기의 종 철부지 요나를 박 넝쿨과 벌레와 뜨거운 동풍들의 체험을 통하여 영혼의 가치와 선교사명의 중요성을 깨닫게 하시는 우리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너그러우심과 무한하신 사랑을 확인시켜 주신 것입니다.
영혼 구원을 얻은 사람이 지옥 형벌을 면케 된 감격적인 기쁨을 이기지 못해 눈물로 감사드리며 주변에 지옥가고 있는 영혼들을 구원해야겠다는 성령의 뜨거운 감동이 있을 때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히 여기시는 주님과 같이 영혼을 가장 귀하게 알고 또 뜨겁게 사랑하는 사람이 모든 것을 투자하고 희생하면서 위험과 죽음까지도 불사하고 복음의 제물이 될 수 있는 법입니다. 사도행전 20:24에“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하였고, 고린도전서 9:14에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하셨습니다. 이처럼 요나가 선교사명을 실천했을 때 니느웨도 살렸고 자신도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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