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시간관은 독특하다. 창조와 마지막이 있는 직선적 시간관(linear view of time)이다. 따라서 분명한 종말론을 가지고 있다. 그에 비해 고대 인도 종교들이나 힌두교, 불교, 유교 등 타종교들은 우주를 동일 과정의 영겁(永劫)의 반복으로 보는 순환적 시간관(circular view of time)을 가진다. 타종교와 다른 이런 기독교 시간관의 독특성을 처음 신학적으로 발견한 사람은 시간 연구의 선구자 성 어거스틴이었다. 마야(Maya)의 역사관에도 동일한 사상의 주기적(週期的) 회귀(回歸) 사상이 있다.
이번 2012년의 종말을 겨냥한 종말론은 조금 특이하다. 직선적 시간관을 가진 기독교가 아닌 기독교 바깥에서 종말 사상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바로 마야 역법과 소행성 충돌이라고 하는 두 종말 사상이 강력한 상승 작용을 하면서 2012년 종말 사상을 만들어내었다. 그리고 길흉을 다루는 일부 인터넷 사이트들과 종말론을 가진 기독교 일부 이단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이들 종말 사상에 현혹 되어 기독교의 종말론과 혼합 시키면서 믿음 약한 기독교인들에게까지 불안감을 조성시키고 있다.
그럼 마야 종말 사상이란 무엇일까? 마야의 산술은 우리가 주로 쓰는 10진법이 아닌 수체계 기본을 20으로 삼는 20진법을 쓴다. 그리고 마야력은 서력기원이 아닌 기원전 3114년 8월 13일을 원년으로 한다. 마야에선 긴 시간을 나타낼 때 394년을 주기로 측정하는데 이를 '박툰(baktun)'이라 부른다. 박툰은 400개의 툰으로 이루어지는 데 1툰이 365일이 아니라 360일이기 때문에 1박툰은 400년이 아니라 약 394년이 된다. 예전 마야족은 13을 공포의 숫자로 믿었다고 한다. 그래서 수학자들이 13번째 박툰을 계산해낸 결과 2012년 12월 21일이 나온 것이다. 따라서 이후의 인류는 역사도 시간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무(無)의 세계가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하였듯 마야인들의 사고는 종말론적이지 않고 근본적으로 윤회적이다. 시간을 일련의 순환현상으로 보고 있어 '13번째 박툰'은 시간의 사이클에 불과하다. 이것을 기독교의 종말론과 연관 시키는 것은 허무맹랑한 주장이다.
마야 산술과 달력에서 이런 종말 사상이 나온 배경 가운데는 1960년대 멕시코 남부에서 고속도로 건설 공사 중 발견된 ‘모뉴먼트 6’이란 유물도 등장한다. 이 유물속에 마야 문명에서 전쟁과 창조의 신과 관련해 한 사건이 일어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날이 2012년 12월 21일이라는 것이고 그 뒷부분의 내용은 훼손돼 해석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또한 과학자 테렌스 메케나는 2000년, 중국의 주역을 수리적으로 분석하여 시간의 흐름과 64괘의 변화율을 그래프로 표시해 본 결과, '타임 웨이브 제로'라 이름붙인 이 그래프가 4000년에 걸친 인류사의 변화와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그래프 상승기엔 영웅이 등장하거나 새로운 국가가 탄생했으며 그래프 하강기엔 인류사의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나거나 국가가 멸망했는 데, 이 그래프는 특정 시점에서 0이 되며 그날은 바로 2012년 12월 21일이라고 한다. 예언웹봇의 분석결과도 등장한다. 예언웹봇이란 전 세계 인터넷상의 모든 자료들을 수집하여 핵심적인 단어들을 언어 엔진을 통해 변환시켜 주식 시장의 변동을 그래프로 예측하는 프로그램이다. 이 웹봇은 2001년 미국 9·11 테러와 컬럼비아 우주왕복선 참사, 2004년 인도양 지진 해일 사태 등 주식 시장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사건들을 예측해왔다고 하는 데, 이 웹봇이 한 시점을 기준으로 분석을 거부했는데 놀랍게도 그 날 역시 바로 2012년 12월 21일이라고 한다.
여기에 소행성 충돌설이 가세하였다. 2012년, 니비루(Nibiru)' 또는 '플래닛 X(Planet X)라고 불리는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자칭 '니비루' 전문가인 낸시 리더는 자신이 운영하는 웹사이트에서 니비루라고 불리는 행성 X가 3600년 주기로 움직이는데 지구보다 4배가 크고 45˚ 기울어진 상태로 지구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NASA와 JPL에서 적외선 위성을 하늘로 띄워 보냈는데 ‘니비루’가 지구를 향해 다가온다고 보고하였고, 1983년 12월 31일에 워싱턴포스트 머리기사에 실렸다고 한다. 이는 고대 수메르 신화에 나오는 행성 ‘니비루’와 궤도가 비슷했다. 또한 네티즌들은 2003년 봄에 행성 니비루가 찍힌 사진들을 낸시에게 보내왔다고 한다. 행성 ‘니비루’가 접근하면 지구의 자기장에 의해 지구의 자전축이 바뀌고 남북이 바뀌는 현상도 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낸시 리더는 당초 충돌을 2003년 5월로 잡았으나 이를 마야 예언에 따라 2012년 12월 21일로 수정했다.
이런 니비루 신화가 나오게된 배경에는 바벨론신화가 있다. 니비루는 가끔 마루둑(Marduk) 신과 대화했다는 바벨론 점성술에 등장하는 이름이다. 니비루는 앗수르바니팔(Assurbanipal, King of Assyria, 기원전 668-627) 도서관에서 발굴된 바빌론 창조설화인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에 드물게 등장하는 이름이다. 이런 니비루가 태양계 12번째 행성이라는 주장은 유대계 언어학자인 스가랴 시친(Zecharia Sitchin)에게서 나왔다. 하지만 이것은 상상의 산물에 불과하다. 니비루가 수메르인들에게 잘 알려진 행성이었다는 주장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기록을 연구하는 전문 학자들에 의해 반박되었다. 수메르인들은 문자를 사용하고 농업과 관개, 도시를 만든 인류 최초 문명인들이었기는 하나 천문학에 관한한 별다른 기록을 남기지 않고 있다. 그들은 천왕성, 해왕성, 명왕성의 존재를 몰랐다. 또한 행성들이 태양을 돌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그런데 어떻게 니비루 소행성을 알았겠는가.
이런 주장에 대해 정통 과학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에임스 연구소의 나사 우주과학자로 주로 이 문제에 대해 코멘트하는 데이비드 모리슨(David Morrison) 박사는 “과학적 근거가 없는 주장"(The pseudoscientific claims)이라고 잘라 말했다. 우주 사이트 스페이스닷컴에서 모리슨 박사는 “전 세계 약 200만 개의 웹사이트에서 니비루 충돌설에 대한 글이 올라온 것으로 알고 있다. 심지어 어린학생들까지 지구멸망이 일어날까 두렵다고 메일을 내게 보내곤 한다.”고 말문을 열었다.
모리슨 박사는 “니비루가 알려진 행성이나 소행성이라는 주장은 전혀 실체가 없는 상상에 불과하다.”고 말하며, "태양계의 갈색왜성이라 알려진 니비루는 현재의 우주과학기술로는 단 한 차례도 관측된 적이 없는 가상 행성"일 뿐이라고 그는 잘라 말했다. 그는 “음모설을 퍼뜨리기 위해서 많은 이들에게 그럴듯하게 근거 없는 공포심을 조장하는 건 문제이며 거짓과 진실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니비루는 분명 속임수다(Nobiru hoax)”고 음모론자들을 비판하기도 했다.
NASA의 지구근접궤도 담당 국장인 단 요먼스도 "니비루는 가상의 물체에 불과하다"며 "아무 과학적인 근거도 없이 지구충돌설을 제기해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요먼스 박사는 “이 소행성이 오는 12월 21일 지구궤도에 진입하려면 지금쯤 사람의 육안으로도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 니비루의 존재는 완전 허구”라고 반박했다.
그럼 성경은 과연 이런 종말 사상에 대해 어떻게 말할까? 성경 안에도 이런 시한부종말론에 대한 실마리가 있을까? 성경에는 가끔 사람의 접근을 거부하는 것들이 있다.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절대적(비공유적) 속성과 관련된 것들이다.
그 중에 핵심은 시간이다. 시간은 타종교가 말하는 것처럼 우연히, 영원하게 존재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말씀의 첫 마디를 태초(히브리어의 베레시트)라는 시간의 단어로 시작하셨다. 시간은 당연히 사람보다 먼저 창조되었고 존재하였다. 이것으로 하나님은 시간에 대해 사람이 개입할 여지를 없애셨다. 시간의 주관자는 오직 하나님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시간의 어떤 부분에 대해 사람들의 접근을 늘 막아 놓고 계신다는 것은 성경을 통해 우리들이 쉽게 발견을 할 수 있다.
먼저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셈과 함과 야벳의 서열이 불분명하다. 한글 성경에는 셈이 장남인 듯 하나 영어 흠정역(KJV)을 보면 야벳은 셈의 형으로 소개된다. 연대기적으로 보면 야벳이 서열상 우위인 것이 좀 더 성경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우리 성경(개역 한글, 공동 번역, 개역개정판)은 셈을 야벳의 위로(형으로) 소개하고 있다(창 10:21). 하나님께서는 사본(寫本)들의 인간적 실수를 통해 서열을 의도적으로 숨기신 면이 있다고 보여 진다. 인간은 서열을 중시하므로 인간의 족보에는 사실 이런 실수가 잘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런 경우가 생겼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데라의 아들 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 경우를 찾을 수 있다. 우리 성경에는 아브라함이 장남인 듯 표현되고 있다(창 11:26, 31). 사본과 성경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꼭 그렇게만 볼 수 없는 난관이 있다. 물론 성경의 원본이 존재한다면 그 서열은 명확히 드러날 것이다. 아브라함의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숨기신 것으로 여겨진다. 서열을 중시하는 인간 사회에서 하나님은 육적 서열이나 육적 장남보다 영적 장남을 찾고 계신 듯하다. 이렇듯 하나님은 인간이 이 부분에 접근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막고 계신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모든 삶은 시간과 늘 공유되어 있다. 탄생과 죽음, 삶의 역정이 그러하고 진보와 서열의 구분이 모두 시간으로부터 온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간을 궁금해 한다. 창조의 연대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창조의 시기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성경이나 과학을 통해 명확하게 알려 주실 듯도 한데 전혀 그렇지를 아니하다. 성경과 과학은 이 부분에 대해 모두 침묵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설정해 놓으셨다.
성경이 좀더 짧은 연대를 지지하는 듯 하기는 하다. 그렇다고 우리들이 언제쯤이라고 확정할만한 근거는 주지 않는다. 창세기 11장과 누가복음 3장에는 셈과 아담까지 이르는 계보가 기록되어 있다. 그중 누가복음에는 창세기의 계보에서 볼 수 없는 아르박삿과 셀라 사이에 가이난이라는 인물을 첨가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를 혼란에 빠뜨린다. 창세기에 보면 분명 아르박삿은 셀라를 삼십오 세에 낳았다고 하였는데 셀라의 위에는 아르박삿이 아니라 가이난이라니!
그렇다면 창세기 11장에 나타난 셈의 후예들의 나이는 다른 의미란 말인가? 혹시 연대기를 말한단 말인가? 가이난 단 한 사람으로 인하여 큰 혼돈이 일어난다. 그래서 보수적인 학자들까지도 가이난은 필사자들의 실수로 첨가되었을 거라고 주장할 정도이다. 사본적 실수이든 원본에 기록된 인물이든 이 한 사람의 첨가로 인해 연대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 않게 되어버렸다.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숨기신 것이다. 과학은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창조의 연대에 있어 오직 침묵한다. 창조의 시기에 있어 짧은 창조와 긴 창조 어디에도 과학은 문을 열어 놓고 있는 것이다. 과학이 드러낼 수 있는 부분은 제한적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6천 년 설을 고집하고, 어떤 이들은 1만 년 설을 고집하고 어떤 이들은 진화론적 연대를 고집하며 그것을 가지고 서로를 불신하기도 하니 참으로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다 부질없는 일이다.
시간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의도는 예수님의 탄생까지도 숨기셨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당연히 AD(Anno Domini-'주의 해에서'라는 뜻) 1년에 탄생하셨다고 간주하나 그렇지 아니하다. 하나님은 생애를 태양력(BC와 AD=주전 및 주후)으로 표시하였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숨기시려는 의도를 엿보게 한다.
마태에 의하면 예수는 헤롯왕 때에 유대 베들레헴에서(마 2:1) 태어났다. 역사의 명확한 기록은 헤롯이 BC 4년에 사망하였으므로 예수님의 탄생은 분명히 그 이전이 된다. 최소한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태양력은 이미 4년 이상 비껴나 있다는 결론이 된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탄생이 기원 전 4년이라는 확신도 없다. 마태복음 2장에는 동방의 박사들을 인도한 베들레헴으로 향한 별에 대한 기록이 나와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별이 역사적으로 어떤 별이었는지 기록으로 확인이 불가능하다. 금성이었는지, 시리우스별이 움직였는지, 대유성이 떨어졌는지, 갑자기 혜성이 나타났는지, 신성(新星) 혹은 초신성(超新星)이 출현했던 것인지, 행성(목성과 토성)의 접근으로 인한 소동이었는지 불분명하다.
아마 이런 천문학적 현상 중에 하나가 베들레헴의 별이었다면 역사적 기록과 함께 생각할 때 BC 7년으로부터 4년 경 사이가 아마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해일 것이다. 물론 12월 25일이 성탄일이라는 확신도 없다. 하나님은 이 귀중한 날까지 숨기셨다. 하나님은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게 해 놓으셨다(벧후 3:8).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수 없도록 해 놓으신 하나님의 섭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벧후 1:20).
그런데 최근 사람들은 다시 또 이 하나님의 시간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2012년 시한부종말론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에도 종말을 무서워하고 종말의 혼돈을 두려워하던 때가 많았다. 주후 999년, 1천년, 1948년, 1984년, 1992년, 1998년, 1999년, 2000년 등은 모두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주목했던 해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늘 시간을 숨기고 계셨다. 예수님은 BC 4-7년 경 탄생하셨으므로 사람들이 2천년을 기다리고 있을 때 사실, 이미 2천 년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 지나가 버렸다. 시간의 기준, 역사의 기준이신 예수님은 일부러 사람들이 시간 계산을 못하도록 하셨다.
물론 과학이 검증할 수 있는 가능한 범위가 존재한다. 천체 예측 같은 부분이다. 그러나 오늘날 난무하는 노스트라다무스나 애드가케이시나 점쟁이, 시한부종말론자들의 예언이란 것들은 분명 하나님께서 정하신 비공유적 속성의 구분을 침범하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세계에서 유명한 예언자들의 예언을 일 년에 두 번씩 싣는 미국의 <내셔널 인콰이어러>지에서 1976년부터 1979년까지 당시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점쟁이들의 예언적중률을 조사한 적이 있었다. 그들이 예언한 364개의 예언 중 틀린 것이 360개, 맞은 것은 겨우 4개였다. 즉 적중률은 1.1%에 불과하였다.
하나님의 참 선지자는 미래를 예언하는 데 있어 어떤 실수도 범한 적이 없다. 성경은 누구든지 단 한번만이라도 그릇된 예언을 하면 그는 바로 거짓 선지자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있어 예언의 빗나감은 곧 죽음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이상한 예언 사역들이 범람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말도 안되는 엉터리 치유 사역이나 길흉을 함부로 말하는 예언 사역은 점치는 행위에 불과하다. 무좀, 위장병, 신경성 병 따위를 고치며 치유 사역이라 하거나 직장, 진학 등에 대한 점이나 치는 행위를 중지해야 한다. 구약 선지자들은 한번도 헛된 예언을 하지 않은 목숨건 예언자들이었음을 꼭 명심해야 한다. 그렇게 신령(?)하면 예수님처럼 치명적 질병을 온전히 고치든지 청량리 정신병원이나 소록도 등에 가서 치명적 질병 치유에 나서야지 병원 가면 대부분 고칠 수 있는 병들을 가지고 체육관 등을 빌려 집회하면서 장난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은 직장, 진학에 대해 그런 길흉의 점 치신 적도 없고 질병을 대충 적당히 고치신 적이 전혀 없다. 소아마비, 맹인, 벙어리, 문둥병 환자, 귀신들린자 등을 온전히 고치셨다. 필자도 사람의 안수 없이 의사가 포기한 치명적 질병을 금식하면 죽는다 하였으나 온전히 금식기도로 치유받았다. 엉터리 예언, 엉터리 치유사역이나 시한부종말론자들이나 성경적으로 보면 별다를 게 없다. 연신 실수를 남발하는 신비를 빙자한 거짓 사깃꾼들인 것이다. 한국 교회가 값싼 은혜를 남발하는 이들의 세속화된 행태들로 인해 심각하게 병들고 있다.
사람들은 기독교인을 포함해서 미래에 대한 예측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미래적 예측이 아닌 미래적 예언이라면 분명히 거부하시는 분이시다. 시간은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아무도 죽음의 문에 들어가는 순서를 모르는 것이다.
무엇 하러 사람들은 그리 종말에 관심이 많은 것일까? 위선적으로 종말을 거부하기 위함이 아닐까? 사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지혜로운 청지기로 늘 종말의 삶을 살고 있는 자들이다. 굳이 종말의 때에 관심을 둘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웬 '예수 점쟁이'들이 그리도 많아졌는지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시간의 의미에 무지한 자들이다. 예수님의 이름을 팔지 말아야 한다. 점을 치려면 그냥 점쟁이로 나설 일이지 예수님을 팔아서는 안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얄팍한 예언가들과 점쟁이들을 유난히 경계하신다. 아니 혐오하시며 저주하신다(레 19:31, 신 18:9-12).
"이제 너는 젊어서부터 힘쓰던 전언과 사술을 가지고 시험하여 보라 혹시 유익을 얻을 수 있을는지, 혹시 원수를 이길 수 있을지는, 네가 많은 모략을 인하여 피곤케 되었도다. 하늘을 살피는 자와 별을 보는 자와 월삭에 예고하는 자들로 일어나 네게 임할 그 일에서 너를 구원케 하여 보라. 보라. 그들은 초개같아서 불에 타리니 그 불꽃의 세력에서 스스로 구원치 못할 것이라 이불은 더웁게 할 숯불이 아니요, 그 앞에 앉을 만한 불도 아니니라(사 47:12-14).
아무리 탁월한 그리스도인(목사, 신학자, 신자)이 주장하드라도 시한부 종말론과 시한부종말론자는 분명 이단이다. 그리스도인은 종말의 날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하루하루를 늘 주님이 주신 소중한 시간으로 알고 마음과 뜻과 정성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며 살면 된다. 그릇된 시한부종말론을 경계하자!
* 이 글은 조덕영 박사의 ‘창조신학연구소’ 홈페이지(www.kictnet.net)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 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
이번 2012년의 종말을 겨냥한 종말론은 조금 특이하다. 직선적 시간관을 가진 기독교가 아닌 기독교 바깥에서 종말 사상이 시작되었다는 점이다. 바로 마야 역법과 소행성 충돌이라고 하는 두 종말 사상이 강력한 상승 작용을 하면서 2012년 종말 사상을 만들어내었다. 그리고 길흉을 다루는 일부 인터넷 사이트들과 종말론을 가진 기독교 일부 이단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이들 종말 사상에 현혹 되어 기독교의 종말론과 혼합 시키면서 믿음 약한 기독교인들에게까지 불안감을 조성시키고 있다.
그럼 마야 종말 사상이란 무엇일까? 마야의 산술은 우리가 주로 쓰는 10진법이 아닌 수체계 기본을 20으로 삼는 20진법을 쓴다. 그리고 마야력은 서력기원이 아닌 기원전 3114년 8월 13일을 원년으로 한다. 마야에선 긴 시간을 나타낼 때 394년을 주기로 측정하는데 이를 '박툰(baktun)'이라 부른다. 박툰은 400개의 툰으로 이루어지는 데 1툰이 365일이 아니라 360일이기 때문에 1박툰은 400년이 아니라 약 394년이 된다. 예전 마야족은 13을 공포의 숫자로 믿었다고 한다. 그래서 수학자들이 13번째 박툰을 계산해낸 결과 2012년 12월 21일이 나온 것이다. 따라서 이후의 인류는 역사도 시간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무(無)의 세계가 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위에서 언급하였듯 마야인들의 사고는 종말론적이지 않고 근본적으로 윤회적이다. 시간을 일련의 순환현상으로 보고 있어 '13번째 박툰'은 시간의 사이클에 불과하다. 이것을 기독교의 종말론과 연관 시키는 것은 허무맹랑한 주장이다.
마야 산술과 달력에서 이런 종말 사상이 나온 배경 가운데는 1960년대 멕시코 남부에서 고속도로 건설 공사 중 발견된 ‘모뉴먼트 6’이란 유물도 등장한다. 이 유물속에 마야 문명에서 전쟁과 창조의 신과 관련해 한 사건이 일어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날이 2012년 12월 21일이라는 것이고 그 뒷부분의 내용은 훼손돼 해석이 불가능하다고 한다.
또한 과학자 테렌스 메케나는 2000년, 중국의 주역을 수리적으로 분석하여 시간의 흐름과 64괘의 변화율을 그래프로 표시해 본 결과, '타임 웨이브 제로'라 이름붙인 이 그래프가 4000년에 걸친 인류사의 변화와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주장했다. 그래프 상승기엔 영웅이 등장하거나 새로운 국가가 탄생했으며 그래프 하강기엔 인류사의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나거나 국가가 멸망했는 데, 이 그래프는 특정 시점에서 0이 되며 그날은 바로 2012년 12월 21일이라고 한다. 예언웹봇의 분석결과도 등장한다. 예언웹봇이란 전 세계 인터넷상의 모든 자료들을 수집하여 핵심적인 단어들을 언어 엔진을 통해 변환시켜 주식 시장의 변동을 그래프로 예측하는 프로그램이다. 이 웹봇은 2001년 미국 9·11 테러와 컬럼비아 우주왕복선 참사, 2004년 인도양 지진 해일 사태 등 주식 시장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사건들을 예측해왔다고 하는 데, 이 웹봇이 한 시점을 기준으로 분석을 거부했는데 놀랍게도 그 날 역시 바로 2012년 12월 21일이라고 한다.
여기에 소행성 충돌설이 가세하였다. 2012년, 니비루(Nibiru)' 또는 '플래닛 X(Planet X)라고 불리는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자칭 '니비루' 전문가인 낸시 리더는 자신이 운영하는 웹사이트에서 니비루라고 불리는 행성 X가 3600년 주기로 움직이는데 지구보다 4배가 크고 45˚ 기울어진 상태로 지구를 향해 다가오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NASA와 JPL에서 적외선 위성을 하늘로 띄워 보냈는데 ‘니비루’가 지구를 향해 다가온다고 보고하였고, 1983년 12월 31일에 워싱턴포스트 머리기사에 실렸다고 한다. 이는 고대 수메르 신화에 나오는 행성 ‘니비루’와 궤도가 비슷했다. 또한 네티즌들은 2003년 봄에 행성 니비루가 찍힌 사진들을 낸시에게 보내왔다고 한다. 행성 ‘니비루’가 접근하면 지구의 자기장에 의해 지구의 자전축이 바뀌고 남북이 바뀌는 현상도 올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낸시 리더는 당초 충돌을 2003년 5월로 잡았으나 이를 마야 예언에 따라 2012년 12월 21일로 수정했다.
이런 니비루 신화가 나오게된 배경에는 바벨론신화가 있다. 니비루는 가끔 마루둑(Marduk) 신과 대화했다는 바벨론 점성술에 등장하는 이름이다. 니비루는 앗수르바니팔(Assurbanipal, King of Assyria, 기원전 668-627) 도서관에서 발굴된 바빌론 창조설화인 에누마 엘리쉬(Enuma Elish)에 드물게 등장하는 이름이다. 이런 니비루가 태양계 12번째 행성이라는 주장은 유대계 언어학자인 스가랴 시친(Zecharia Sitchin)에게서 나왔다. 하지만 이것은 상상의 산물에 불과하다. 니비루가 수메르인들에게 잘 알려진 행성이었다는 주장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기록을 연구하는 전문 학자들에 의해 반박되었다. 수메르인들은 문자를 사용하고 농업과 관개, 도시를 만든 인류 최초 문명인들이었기는 하나 천문학에 관한한 별다른 기록을 남기지 않고 있다. 그들은 천왕성, 해왕성, 명왕성의 존재를 몰랐다. 또한 행성들이 태양을 돌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그런데 어떻게 니비루 소행성을 알았겠는가.
이런 주장에 대해 정통 과학자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에임스 연구소의 나사 우주과학자로 주로 이 문제에 대해 코멘트하는 데이비드 모리슨(David Morrison) 박사는 “과학적 근거가 없는 주장"(The pseudoscientific claims)이라고 잘라 말했다. 우주 사이트 스페이스닷컴에서 모리슨 박사는 “전 세계 약 200만 개의 웹사이트에서 니비루 충돌설에 대한 글이 올라온 것으로 알고 있다. 심지어 어린학생들까지 지구멸망이 일어날까 두렵다고 메일을 내게 보내곤 한다.”고 말문을 열었다.
모리슨 박사는 “니비루가 알려진 행성이나 소행성이라는 주장은 전혀 실체가 없는 상상에 불과하다.”고 말하며, "태양계의 갈색왜성이라 알려진 니비루는 현재의 우주과학기술로는 단 한 차례도 관측된 적이 없는 가상 행성"일 뿐이라고 그는 잘라 말했다. 그는 “음모설을 퍼뜨리기 위해서 많은 이들에게 그럴듯하게 근거 없는 공포심을 조장하는 건 문제이며 거짓과 진실을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니비루는 분명 속임수다(Nobiru hoax)”고 음모론자들을 비판하기도 했다.
NASA의 지구근접궤도 담당 국장인 단 요먼스도 "니비루는 가상의 물체에 불과하다"며 "아무 과학적인 근거도 없이 지구충돌설을 제기해 불안감을 조성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요먼스 박사는 “이 소행성이 오는 12월 21일 지구궤도에 진입하려면 지금쯤 사람의 육안으로도 관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지적, 니비루의 존재는 완전 허구”라고 반박했다.
그럼 성경은 과연 이런 종말 사상에 대해 어떻게 말할까? 성경 안에도 이런 시한부종말론에 대한 실마리가 있을까? 성경에는 가끔 사람의 접근을 거부하는 것들이 있다. 신학적으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절대적(비공유적) 속성과 관련된 것들이다.
그 중에 핵심은 시간이다. 시간은 타종교가 말하는 것처럼 우연히, 영원하게 존재하는 게 아니다. 하나님은 시간을 창조하셨을 뿐 아니라 말씀의 첫 마디를 태초(히브리어의 베레시트)라는 시간의 단어로 시작하셨다. 시간은 당연히 사람보다 먼저 창조되었고 존재하였다. 이것으로 하나님은 시간에 대해 사람이 개입할 여지를 없애셨다. 시간의 주관자는 오직 하나님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시간의 어떤 부분에 대해 사람들의 접근을 늘 막아 놓고 계신다는 것은 성경을 통해 우리들이 쉽게 발견을 할 수 있다.
먼저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셈과 함과 야벳의 서열이 불분명하다. 한글 성경에는 셈이 장남인 듯 하나 영어 흠정역(KJV)을 보면 야벳은 셈의 형으로 소개된다. 연대기적으로 보면 야벳이 서열상 우위인 것이 좀 더 성경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그럼에도 우리 성경(개역 한글, 공동 번역, 개역개정판)은 셈을 야벳의 위로(형으로) 소개하고 있다(창 10:21). 하나님께서는 사본(寫本)들의 인간적 실수를 통해 서열을 의도적으로 숨기신 면이 있다고 보여 진다. 인간은 서열을 중시하므로 인간의 족보에는 사실 이런 실수가 잘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성경에서 이런 경우가 생겼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
데라의 아들 아브라함과 나홀과 하란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 경우를 찾을 수 있다. 우리 성경에는 아브라함이 장남인 듯 표현되고 있다(창 11:26, 31). 사본과 성경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꼭 그렇게만 볼 수 없는 난관이 있다. 물론 성경의 원본이 존재한다면 그 서열은 명확히 드러날 것이다. 아브라함의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숨기신 것으로 여겨진다. 서열을 중시하는 인간 사회에서 하나님은 육적 서열이나 육적 장남보다 영적 장남을 찾고 계신 듯하다. 이렇듯 하나님은 인간이 이 부분에 접근하는 것을 의도적으로 막고 계신 것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모든 삶은 시간과 늘 공유되어 있다. 탄생과 죽음, 삶의 역정이 그러하고 진보와 서열의 구분이 모두 시간으로부터 온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간을 궁금해 한다. 창조의 연대에 있어서도 그러하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창조의 시기를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성경이나 과학을 통해 명확하게 알려 주실 듯도 한데 전혀 그렇지를 아니하다. 성경과 과학은 이 부분에 대해 모두 침묵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설정해 놓으셨다.
성경이 좀더 짧은 연대를 지지하는 듯 하기는 하다. 그렇다고 우리들이 언제쯤이라고 확정할만한 근거는 주지 않는다. 창세기 11장과 누가복음 3장에는 셈과 아담까지 이르는 계보가 기록되어 있다. 그중 누가복음에는 창세기의 계보에서 볼 수 없는 아르박삿과 셀라 사이에 가이난이라는 인물을 첨가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를 혼란에 빠뜨린다. 창세기에 보면 분명 아르박삿은 셀라를 삼십오 세에 낳았다고 하였는데 셀라의 위에는 아르박삿이 아니라 가이난이라니!
그렇다면 창세기 11장에 나타난 셈의 후예들의 나이는 다른 의미란 말인가? 혹시 연대기를 말한단 말인가? 가이난 단 한 사람으로 인하여 큰 혼돈이 일어난다. 그래서 보수적인 학자들까지도 가이난은 필사자들의 실수로 첨가되었을 거라고 주장할 정도이다. 사본적 실수이든 원본에 기록된 인물이든 이 한 사람의 첨가로 인해 연대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가 쉽지 않게 되어버렸다. 하나님은 의도적으로 숨기신 것이다. 과학은 어떠한 경우에 있어서도 창조의 연대에 있어 오직 침묵한다. 창조의 시기에 있어 짧은 창조와 긴 창조 어디에도 과학은 문을 열어 놓고 있는 것이다. 과학이 드러낼 수 있는 부분은 제한적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6천 년 설을 고집하고, 어떤 이들은 1만 년 설을 고집하고 어떤 이들은 진화론적 연대를 고집하며 그것을 가지고 서로를 불신하기도 하니 참으로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다 부질없는 일이다.
시간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의도는 예수님의 탄생까지도 숨기셨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당연히 AD(Anno Domini-'주의 해에서'라는 뜻) 1년에 탄생하셨다고 간주하나 그렇지 아니하다. 하나님은 생애를 태양력(BC와 AD=주전 및 주후)으로 표시하였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숨기시려는 의도를 엿보게 한다.
마태에 의하면 예수는 헤롯왕 때에 유대 베들레헴에서(마 2:1) 태어났다. 역사의 명확한 기록은 헤롯이 BC 4년에 사망하였으므로 예수님의 탄생은 분명히 그 이전이 된다. 최소한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태양력은 이미 4년 이상 비껴나 있다는 결론이 된다. 그렇다고 예수님의 탄생이 기원 전 4년이라는 확신도 없다. 마태복음 2장에는 동방의 박사들을 인도한 베들레헴으로 향한 별에 대한 기록이 나와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별이 역사적으로 어떤 별이었는지 기록으로 확인이 불가능하다. 금성이었는지, 시리우스별이 움직였는지, 대유성이 떨어졌는지, 갑자기 혜성이 나타났는지, 신성(新星) 혹은 초신성(超新星)이 출현했던 것인지, 행성(목성과 토성)의 접근으로 인한 소동이었는지 불분명하다.
아마 이런 천문학적 현상 중에 하나가 베들레헴의 별이었다면 역사적 기록과 함께 생각할 때 BC 7년으로부터 4년 경 사이가 아마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해일 것이다. 물론 12월 25일이 성탄일이라는 확신도 없다. 하나님은 이 귀중한 날까지 숨기셨다. 하나님은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게 해 놓으셨다(벧후 3:8). 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수 없도록 해 놓으신 하나님의 섭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벧후 1:20).
그런데 최근 사람들은 다시 또 이 하나님의 시간을 건드리기 시작했다. 2012년 시한부종말론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 것이다. 이전에도 종말을 무서워하고 종말의 혼돈을 두려워하던 때가 많았다. 주후 999년, 1천년, 1948년, 1984년, 1992년, 1998년, 1999년, 2000년 등은 모두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주목했던 해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늘 시간을 숨기고 계셨다. 예수님은 BC 4-7년 경 탄생하셨으므로 사람들이 2천년을 기다리고 있을 때 사실, 이미 2천 년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 지나가 버렸다. 시간의 기준, 역사의 기준이신 예수님은 일부러 사람들이 시간 계산을 못하도록 하셨다.
물론 과학이 검증할 수 있는 가능한 범위가 존재한다. 천체 예측 같은 부분이다. 그러나 오늘날 난무하는 노스트라다무스나 애드가케이시나 점쟁이, 시한부종말론자들의 예언이란 것들은 분명 하나님께서 정하신 비공유적 속성의 구분을 침범하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세계에서 유명한 예언자들의 예언을 일 년에 두 번씩 싣는 미국의 <내셔널 인콰이어러>지에서 1976년부터 1979년까지 당시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점쟁이들의 예언적중률을 조사한 적이 있었다. 그들이 예언한 364개의 예언 중 틀린 것이 360개, 맞은 것은 겨우 4개였다. 즉 적중률은 1.1%에 불과하였다.
하나님의 참 선지자는 미래를 예언하는 데 있어 어떤 실수도 범한 적이 없다. 성경은 누구든지 단 한번만이라도 그릇된 예언을 하면 그는 바로 거짓 선지자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있어 예언의 빗나감은 곧 죽음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이상한 예언 사역들이 범람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말도 안되는 엉터리 치유 사역이나 길흉을 함부로 말하는 예언 사역은 점치는 행위에 불과하다. 무좀, 위장병, 신경성 병 따위를 고치며 치유 사역이라 하거나 직장, 진학 등에 대한 점이나 치는 행위를 중지해야 한다. 구약 선지자들은 한번도 헛된 예언을 하지 않은 목숨건 예언자들이었음을 꼭 명심해야 한다. 그렇게 신령(?)하면 예수님처럼 치명적 질병을 온전히 고치든지 청량리 정신병원이나 소록도 등에 가서 치명적 질병 치유에 나서야지 병원 가면 대부분 고칠 수 있는 병들을 가지고 체육관 등을 빌려 집회하면서 장난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은 직장, 진학에 대해 그런 길흉의 점 치신 적도 없고 질병을 대충 적당히 고치신 적이 전혀 없다. 소아마비, 맹인, 벙어리, 문둥병 환자, 귀신들린자 등을 온전히 고치셨다. 필자도 사람의 안수 없이 의사가 포기한 치명적 질병을 금식하면 죽는다 하였으나 온전히 금식기도로 치유받았다. 엉터리 예언, 엉터리 치유사역이나 시한부종말론자들이나 성경적으로 보면 별다를 게 없다. 연신 실수를 남발하는 신비를 빙자한 거짓 사깃꾼들인 것이다. 한국 교회가 값싼 은혜를 남발하는 이들의 세속화된 행태들로 인해 심각하게 병들고 있다.
사람들은 기독교인을 포함해서 미래에 대한 예측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미래적 예측이 아닌 미래적 예언이라면 분명히 거부하시는 분이시다. 시간은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아무도 죽음의 문에 들어가는 순서를 모르는 것이다.
무엇 하러 사람들은 그리 종말에 관심이 많은 것일까? 위선적으로 종말을 거부하기 위함이 아닐까? 사실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지혜로운 청지기로 늘 종말의 삶을 살고 있는 자들이다. 굳이 종말의 때에 관심을 둘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웬 '예수 점쟁이'들이 그리도 많아졌는지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시간의 의미에 무지한 자들이다. 예수님의 이름을 팔지 말아야 한다. 점을 치려면 그냥 점쟁이로 나설 일이지 예수님을 팔아서는 안 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얄팍한 예언가들과 점쟁이들을 유난히 경계하신다. 아니 혐오하시며 저주하신다(레 19:31, 신 18:9-12).
"이제 너는 젊어서부터 힘쓰던 전언과 사술을 가지고 시험하여 보라 혹시 유익을 얻을 수 있을는지, 혹시 원수를 이길 수 있을지는, 네가 많은 모략을 인하여 피곤케 되었도다. 하늘을 살피는 자와 별을 보는 자와 월삭에 예고하는 자들로 일어나 네게 임할 그 일에서 너를 구원케 하여 보라. 보라. 그들은 초개같아서 불에 타리니 그 불꽃의 세력에서 스스로 구원치 못할 것이라 이불은 더웁게 할 숯불이 아니요, 그 앞에 앉을 만한 불도 아니니라(사 47:12-14).
아무리 탁월한 그리스도인(목사, 신학자, 신자)이 주장하드라도 시한부 종말론과 시한부종말론자는 분명 이단이다. 그리스도인은 종말의 날을 아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하루하루를 늘 주님이 주신 소중한 시간으로 알고 마음과 뜻과 정성과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섬기며 살면 된다. 그릇된 시한부종말론을 경계하자!
* 이 글은 조덕영 박사의 ‘창조신학연구소’ 홈페이지(www.kictnet.net)에서 가져온 것입니다.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 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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