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에만 유일하게 존재하는 새벽예배. 한국교회 부흥의 첫 번째 원동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척교회부터 대형교회에 이르기까지 성도들의 신앙성숙과 더불어 부흥을 소망하는 곳에는 새벽예배의 열기가 더욱 뜨겁다. 이에 기독일보는 남가주 한인교회들의 새벽 설교를 집중 조명하여 새벽제단에서만 내리는 특별한 은혜를 나누고 개교회를 넘어 지역과 미주 전역의 부흥을 함께 소망하고자 한다.

날짜: 2011년 12월 9일
제목: 저 사람이 어떻게 보이십니까?
본문: 눅18:18-23
설교: 유양진 목사

눅18:18 어떤 관리가 물어 이르되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1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8:20 네가 계명을 아나니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 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였느니라
18:21 여짜오되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
18:22 예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이르시되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네게 보화가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18:23 그 사람이 큰 부자이므로 이 말씀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

여기에 죄가 하나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사회학자가 보는 죄가 있고 율법학자가 보는 죄가 있습니다. 같은 죄라고 해도 평가는 다릅니다. 사람마다 죄에 대한 정의는 각기 성장 과정이나 모든 삶의 배경을 통해서 평가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죄는 전혀 다른 양상을 띠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 전에는 죄를 죄로 보지만 하나님 은혜가 임하면 죄가 죄로 보이지 않습니다. 아직 우리 눈에 죄를 죄로 보게 되면 하나님의 은혜가 미치지 못했다라고 결론을 내려도 좋습니다.

제가 하와이에 있을 때, 어떤 집사님이 목수일을 했습니다. 자기 종업원에게 월급을 주려고 자기 성경책에 그 돈을 넣어 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집에 가려고 하는데 그 월급을 넣어 놓은 성경책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난리가 났습니다. 전부 다 뒤졌는데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교회 내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누군가를 지목하며 그가 가져갔다고 하기도 하고 또 아무개 집사가 일찍 집에 갔는데 그가 가져갔다고 하는 등 교회 성도 전체가 도둑놈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무개 집사님, 권사님, 점심 안 먹고 간 사람 등 온갖 추측과 억측이 난무한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한번 더 찾아보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찾았습니다. 그런데 돈은 찾았으나 교회 전체의 분위기가 너무 험악해졌습니다. 사람을 의심하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를 생각해 보게 됩니다.

어떤 이슈가 주어질 때 우리의 태도는 각양각색입니다. 결국 우린 자신만의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면 죄를 죄로 보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인이 아닌, 죽음 직전에 있는 불쌍한 여인으로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눈에는 죽음 직전에 떨고 있는 불쌍한 영혼인 것입니다.

간음한 여인이 죄인으로 보인다면 우린 하나님의 은혜에 임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린 갈 길이 멉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 우린 정확하게 평가를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은혜를 알기 전에는 죄를 보고 죄를 평가하고 판단한 후 결론짓게 됩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게 되면 그 사람의 죄가 죄로 보이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흠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의 특징입니다.

김대두는 극악무도한 사람입니다. 도끼를 들고 일가족을 죽이고 18명을 죽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를 전도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에게 온갖 욕을 다 먹으면서 결국엔 그를 전도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인애하신 구세주여” 찬송을 부르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런 극악무도한 이들도 죄인으로 보이지 않고 그들도 구원받아야 할 영혼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 받은 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의 마지막 목표는 하나님입니다. 구원받았다는 것은 선에 이르렀다는 것을 말합니다.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선에 이르는 것입니다. 우린 선과 악의 중간지대에 있는 자들입니다. 우린 여기서 악의 쪽으로 가느냐, 선의 쪽으로 가느냐입니다. 선으로 향하면 하나님에게 이르고 악에게 이르면 멸망을 받는 것입니다.

뿌리깊은 나무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그것을 보니까 귀가 번쩍 뜨이는 대사가 있었습니다. ‘선한 사람 따로 없다. 선한 사람은 아직 악할만한 상황에 처하지 않는 사람이다.’ 선인과 악인이 따로 없다는 말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 집단학살(홀로코스트)을 주도했던 아돌프 아이히만이 후에 재판을 받게 됩니다. 그가 재판을 받을 때 어떤 이가 증언을 하러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를 보자마자 졸도해 버렸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 사람은 아이히만이 괴물인 줄 알았는데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선하게 생겼는지, 어떻게 그가 사람을 그렇게 많이 죽일 수 있는지 너무 충격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아무런 문제가 없을 때는 선한 모습이 보이지만 누군가가 나에게 욕을 했다 하십시오. 나쁜 일을 당한다고 해 보십시오. 우린 금방 악마로 변하게 됩니다.

비록 내 삶은 악하다고 해도 누구나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단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가능합니다. 결론적으로 선의 목표는 하나님입니다. 선행이라고 하는 것은 구원받은 사람들의 삶에서 나타난 징표입니다. 선행 자체가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선이란 원문은 두 개의 단어로 나눠집니다. 아가투스와 칼로스입니다. 아가투스는 최상급보다 더 위의 개념입니다. 칼로스는 착한 행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본문에 어떤 관리는 선한 선생님이라고 묻습니다. 이 단어가 아가투스입니다. 19절에 예수님이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선한 이는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십니다. 젊은 율법학자가 칼로스란 단어를 썼다면 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가투스란 단어를 써서 지금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습니까? 이 물음에 주님은 선행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하십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선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일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계명을 아무리 잘 지킨다고 해도 선으로 가야 하는 것입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윗은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을 평정하고 주변의 국가를 점령한 이입니다. 돌맹이 하나로 골리앗을 죽인 사람입니다. 그가 크고 굉장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젖뗀 아이가 부모에게 안기듯 하나님에게 안기고 싶다고 합니다.

그 곳이 어디입니까? 진정 하나님에게로 가는 것입니다. 그곳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서 선을 이루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이루신 선인 구원은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히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것이 아가투스를 얻는 것입니다. 예수를 위해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요 그 예수를 믿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일입니까? 우리가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영생을 받고, 구원을 받는 이들이 내어놓는 것이 칼로스란 선입니다. 먼저는 믿는 것입니다. 아카투스입니다.

오늘 우린 스스로가 구원을 결정합니다. 아닙니다. 우린 마음이 약한 자요, 어린 아이와 같은 자입니다. 그렇기에 내 갈 길을 인도해 달라고 해야 합니다. 오늘 주변의 사람이 어떻게 보입니까? 악인으로 보입니까? 나쁘게 보입니까? 어떻게 보입니까? 그것은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반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누가 극악무도합니까?

선한 이는 한 분이십니다. 곧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습니까?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그 은혜가 여러분에게 임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