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절,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마태복음 2장은 예수님이 출생하신 후 있었던 몇 가지 일들을 기록하는 장이다. 먼저는 출생할 때의 이스라엘 상황인데, 당시 유대인들은 B.C. 586년 바벨론에 멸망한 이래, 메데 바사와 헬라, 로마에 의해 나라를 차례로 탈취당하고 식민지 상태에 있었다. 그러므로 당시 점령국가인 로마의 황제는 유대와 갈릴리 지방의 섭정 왕으로 헤롯이라는 사람을 세워놓고 있었다. 즉 예수님이 마리아로부터 출생하였던 때는 헤롯이라는 왕이 유대를 다스리고 있던 때인데, 그 헤롯이라는 사람은 에돔 사람으로서, 이삭의 배다른 아들, 에서의 자손이고, 그들은 언제나 야곱(이스라엘)의 대적이 되어 이스라엘의 길을 대적하고 반대하는 입장에 서 있어왔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자신들의 나라를 잃고, 다른 민족의 지배 하에 신음하면서 간절히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메시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비밀리에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도시에서 초라하게 태어나신 나머지 사람들의 눈에 그들이 기다리던 왕으로 발견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생각해볼 것은 이스라엘의 메시야에 대하여 예언했던 수많은 선지자들, 이사야, 예레미야, 미가 등 수많은 선지자들을 배출한 선민 이스라엘은 정작 그리스도가 왔을 때 더 이상 “여기에 그리스도가 출생하였다”고 선포할 선지자를 갖고 있지 않고, 멀리 동방의 현자들(magi)이 별을 보고 유대인의 왕의 출생을 알았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더 이상 유대나라에 그런 선지자들이 없었다는 말이다. 영적으로 매우 피폐한 상황이라는 말이다.

동방의 현자들로부터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메시야의 가능성이라는 것을 시사하는 말임)가 났다는 말을 들은 유대인들의 반응은 어떠하였는가?

2-3절,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왕이 태어나셨다니까 온 예루살렘이 소동했다는 것이다. 이상한 일이 아닌가? 기다렸다는 사람들이 막상 왕이 오셨다는 말을 들을 때 소동했다는 것이다. 헤롯이 좀 그렇다면 문제가 다른데 왜 온 예루살렘이 소동을 하는가? 이것이 문제인 것이다. 소동했다(troubled)는 말은 원문에서 ‘당황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이는 오늘날 많은 크리스천들에게도 경종이 되는 말이다. 입으로는 주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린다고 하지만 막상 오신다고 하면 당황스러워 한다는 말이다. 현세의 즐거움과 안락과 평안을 깰까 봐 불안스럽고, 주저된다는 것이다.

4-9절,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쌔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헤롯왕은 동방박사들의 말을 듣고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성경 박사들)을 모았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태어난다면 어디서 나겠느냐고 물었다. 그러니 헤롯도 영적인 세계에 대하여 전혀 무지한 인물은 아닌듯하다. 그럴 때 당시의 유대인 가운데 가장 중심적인 종교인들인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그리스도를 찾아 발견하면 잡아 죽이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왕에게 그들이 아는 성경지식과 정보를 최대한 제공하게 된다. 이들은 정말로 성경을 잘 알았다. 왕이 묻자마자 구약 성경 미가서 5장 2절에 있는 “유대 땅 베들레헴아…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라고 말해 주었다. 그러니 그들은 자신들의 성경지식으로 예수님을 잡아 죽이려는 왕에게 정보를 제공해 주는 것으로 끝났다. 그들 대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은 동방박사들만큼도 메시야의 출생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다. 관심이 있는 자들은 동방의 박사들과, 그를 죽이려는 시기로 가득한 왕 헤롯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진정 예수님을 사랑하지 않는 객관적인 성경지식은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들은 종교적인 지위로 왕 앞에 나갈 수 있었고, 좋은 생활을 할 수 있었겠지만 막상 가난한 목수의 집에 태어난 예수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10-12절,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 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
동방 박사들에 대하여 생각을 좀 해 보겠다. 그들은 처음에 별(하나님의 생명의 빛의 인도를 예시함)을 보고 동방에서 왔는데, 오다가 사람의 관념의 지배를 받았다. 기독교는 계시의 종교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계시는 물론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모하는 자들에게 있게 된다(벧후 1:19). 그들이 별을 보고 길을 찾아 나섰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내적인 별빛의 인도를 받아 살아 나가는 것을 예시해 준다. 그러다 그들은 유대인의 왕이 나신 것이니 예루살렘에서 날 것이 아니냐? 또 현재의 왕이 알 것이 아니냐? 왕가에서 태어날 것이 아니냐? 등의 세상적인 개념으로 돌아선 것이다. 그러다 보니 그들은 별빛을 보고 오다가 그만 별빛을 소홀히 하고 세상적인 관념의 영역의 지배를 받은 것이다. 결과로 영적이고 내적인 별빛을 상실한 것이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가서 의도 없이 그곳에다가 불을 지르고 만 것이다. 헤롯은 그들로 말미암아 정보를 취하였고 그 정보를 통하여 그를 죽일 계획을 갖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동방박사나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이나 왕에게 정보만 제공한 꼴이 된 것이다. 헤롯은 동방박사들에게 가서 만나면 그곳을 알려달라고 하고 자기도 가서 경배하겠다고 거짓말을 했다.

위에 구절을 보면 동방박사들은 헤롯을 떠날 때 다시 별의 인도를 따르게 됨을 본다. 그들은 아직 아기 예수를 못 만났어도 별을 보고는 매우 기뻐했다. 이는 그들이 한 동안 별빛을 잃고 헤롯에게 가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불안하기도 하고 기쁨을 잃어버린 것이 분명하다. 그러다 다시 별빛의 인도를 받게 되었을 때 좋았다. ‘바로 이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실상 별빛(참된 계시)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한다. 그리스도께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 별빛의 임무이다. 성경의 심오한 지식도 결국은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데 이르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동방의 박사들은 집에 들어왔다. 이때는 누가복음의 구유에 누인 아이보다는 컸을 때이다. 그래서 여기서 아이는 베이비(baby)가 아니라 차일드(child)로 되어있다. 누가복음은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a baby wrapped in cloths lying in the manger)로 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는 아이(child)인 것이다. 그리고 구유가 아니라 집에 계신다. 항상 구유에 계셨던 것은 아니다. 오늘 많은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연극 때 동방박사들이 구유에 계신 예수님께 황금, 몰약, 유향을 드리는 것을 연출한다. 그러나 동방박사들이 온 때는 누가복음의 목자들이 구유에 찾아 온 때와 다르다. 지금은 집에 계신다.

그리고 동방박사들은 아기와 모친이 함께 있는 것을 보았고 아기께만 경배를 했다. 그들은 마리아에게 경배한 것이 아니다. 아기 예수께만 경배한 것이다. 찬양과 경배를 받으실 분은 오직 예수이시다. 만일 오늘 천주교 사람들이 그곳에 갔다면 아기 예수만이 아니라 성모에게도 뭔가를 했을 것이다. 이는 분명 성경적인 것이 아니다.

동방박사들은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갔다. 그들은 인간적인 의미에서는 왕과의 약속을 깨버린 것이지만 그런 마귀적인 부탁을 지킬 필요는 없다. ‘사람이 잘못해서 마귀의 일을 하는 자들과 약속을 할 수 있지만 후에 속아서 그렇게 된 줄을 알았으면 그것을 지킬 필요가 없다’(박윤선 주석. p. 97).

계시를 얻지 못한 그리스도인과 계시를 얻은 후의 그리스도인의 발걸음이 다를 때가 있다는 얘기이다. 그때 헤롯과 있을 때는 동방박사들이 잘못 인도되고 있던 중이다. 별빛을 떠나 헤매던 중이고, 그러다가 마귀의 전술에 휘말린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꿈을 통해서나마 바로잡아 준 것이다. 그리고 그래도 현명한 그들은 한 번은 모르고 당했지만 두 번째는 속임수에 빠져들지 않은 것이다.

13-15절, 저희가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누가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에 관하여 하나님은 천사를 통하여 마리아에게 많은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갈 길에 대하여 요셉에게 현몽하시고 말씀하신다. 이는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원리이다. 중요한 일에 쓰임 받은 것은 다 마리아이다. 은혜도 마리아가 크게 받았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모든 것을 마리아에게 지시하시는 것이 아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남편이다. 오늘날도 아내들이 상당히 주님을 사랑하고 계시가 있고 쓰임을 크게 받을지라도 하나님은 많은 경우 갈 길을 남편들을 통하여 지시하신다. 이는 남편이 그 아내의 머리이기 때문이다(엡 5:23-24). 이를 동양철학이나 유교관념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 귀하게 쓰임을 받고 귀한 계시와 말씀을 많이 갖고 있는 주의 종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반드시 그에게 모든 권위를 주지 않을 수도 있다. 그를 이끌어줄 다른 사람이 있을 수가 얼마든지 있다. 바울에게는 아나니아가 있었고, 바나바도 있었다. 천하의 계시가 뛰어난 바울이라 하더라도 평범한 그리스도인이나 자기만 못한 다른 사역자의 도움과 인도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 한 가지 하나님은 그 분의 아들을 인도하실 때 모든 것을 기적으로만 역사하지는 않으셨다. 헤롯을 죽게 한다든지, 천군을 보내어 지키게 하신다든지 하지 않으시고, 한 동안 애굽에 가서 피해 있으라고 한 것이다. 언제까지인가? 헤롯이 죽기까지이다. 하나님은 원수 헤롯을 당장에 처치하는 방식으로 아들을 보호하신 것이 아니다. 자연의 질서 속에 그냥 순응하게 하신 것이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는 기도는 이런 때 헤롯을 죽게 하라든지 기적을 베푸시어 아들을 지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았다. ‘애굽에 피하여 그가 죽을 때까지 머물라’이다. 이렇게하여 선지자가 한 말을 이루게 된 것이다.

16-18절,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 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헤롯은 실상 박사들을 먼저 속인 것이다. ‘알려주면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겠다’라고 한 것은 박사들을 속인 것이다. 죽일 의도를 가진 것이면서 겉으로는 경배하겠다고 한 것이다. 헤롯은 자기가 박사들을 속인 것은 생각지 않고 박사들이 자기에게 약속을 깬 것만 계산한다. 그리고 진노하였다. 대개의 권력자들이 이렇게 한다. 자신들은 권력을 위해 잘못을 해도 용인이 되고 약자들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윽박지르는 것이다. 이런 사고는 이와 같이 벌써 2000년 전에도 있었다.

권력은 이렇게 크게 잘못을 한다. 그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권력이 없었다면 이런 죄를 짓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베들레헴과 그 근방에서 태어난 아이들을 두 살 아래로 다 죽였다. 그러므로 힘이 있는 사람들, 돈이 많은 사람들, 권력이 큰 사람들은 조심해야 한다. 즉 할 수 있는 것이 좀 있는 사람들은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사람보다 배나 조심을 많이 해야 실수가 적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이나 안정이나 번영을 위하여 필요하다 싶으면 다른 많은 것을 고려하지 않고 실수를 저지르게 되는 것이다. 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 다른 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입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그때 많은 어린 아이가 죽었고 큰 슬픔이 있었다. 이런 일이 발생할 것이 또한 구약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19-23절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오니라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주의 사자는 아기에 대하여 요셉에게 현몽하여 말한다. 일어나 아기와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로 들어가라는 말이다. 요셉이 그리스도의 출생과 성장에 있어서 지대한 동역을 한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이 아닌 애굽에서 한동안 계셨다. 나실 때부터 핍박과 공격 아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이 땅에 오셨던 구주의 삶이요 인생이다. 그들은 순종하여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왔는데 그래도 아직 무서웠다. 예루살렘 가까이 와서 살기 어려웠다. 헤롯은 죽었지만 그 아들이 왕이 된 것이다.

실상 문제는 없는 것인데, 요셉과 마리아가 아직도 불안한 마음이 있다. 하나님은 문제가 없으니 깊숙이 들어가 살라고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그분이 사랑하는 자들의 그 자연스런 성정을 이해해 주신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은 적절한 곳으로 인도를 해 주었는데 그곳이 나사렛이란 동네이다. 그들의 두려워하는 마음을 살펴 적절한 곳으로 안내해 준 것이다.
그래서 살게 된 곳이 나사렛이다. 천한 동네, 당시 알아주지 않는 곳이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오늘날로 말하면 모든 이에게 인정받을 만한 도시에서 자라지 않았고, 당시로 보면 그럴듯한 가문도 아니었다. 천한 나사렛 사람, 목수의 아들, 이것이 그분의 신분이었다. 우리는 이러한 예수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