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교회 전도팀에서 매월 발행하는 “워싱톤 좋은 신문” 2월호에 실린 글 중 “포옹(허그:Hug)”이란 기획 기사의 내용을 읽으면서 포옹이란 우리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신비로운 힘이요 능력이란 말에 크게 동감하면서 앞으로는 포옹을 많이 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아마 걱정부터 앞서는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또 그렇게 걱정하시는 것도 무리가 아닌 것이 요즘에 포옹 잘못했다가는 성희롱범으로 고소를 당하기가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연회에서도 연회에 속한 모든 목사들에게 교인들과의 신체적 접촉을 삼갈 것을 권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교회에서 조차 이러니 직장이나 일터, 일반 사회에서야 더 말할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니 신문에 난 기사를 읽고 허그를 많이 하겠다고 하는 제가 철없는 사람이나 세상모르는 사람쯤으로 비쳐 지는 것도 무리가 아닐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따뜻한 마음으로 안아주는 것을 적극 권해야 마땅한데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렇게 포옹에 대해 마치 부적절한 행위처럼 여기지는 것은 포옹에 대한 본래 의도가 본질이 잘못되어서가 아니라 포옹에 대한 요즘의 현상이 잘못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안아주는 것을 이성간의 성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신체적 접촉으로만 알고 있는 것은 포옹이 본래 사람이 해서는 안되는 부적절한 행위이기 때문이 아니고 포옹을 부적절하게 이해하는 현상 때문입니다. 바로 이러한 부적절한 포옹에 대한 이해 때문에 교회에서 조차 포옹을 이성간의 성적인 행위로 규정하고 이를 자제하는 기준을 만들어서 서로 보듬고 안아주고 살아가는 것이 마땅한 사람들로 하여금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것을 마치 건강한 인간관계인양 유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잘못된 현상 때문에 그 본질이 잘못되었다고 규정하는 것이 옳지 못하듯이 포옹에 대한 잘못된 현상 때문에 포옹에 대한 본질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며, 오히려 현상이 잘못될수록 더욱 그 본질에 충실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포옹이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를 보듬으며 살게 하신 하나님의 본래의 의도를 회복하는 것이고, 서로의 마음속에 생긴 상처를 감싸주며 살아가는 사랑의 치유임을 바르게 알려주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점점 더 포옹이란 마치 사랑에 빠진 연인들이 상대의 육체적인 매력에 빠질 때만 하는 행위로 잘못 알게 될 것입니다.

포옹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려는 거룩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막힘이 없이 더불어 보듬으며 살던 인간의 본래의 모습을 그리워하며, 죄로 인해 사람사이에 생겨진 담을 허물며, 벽을 부수고, 벌어진 사이를 이으려는 아름다운 사랑의 모습이 포옹입니다. 더욱이 살아가면서 생긴 상처를 보듬어 주고, 감싸주므로 하나님의 지으신 본래의 모습을 회복하고자 하는 평화에의 갈망, 바로 이것을 표현하는 것이 포옹입니다.

사람이 사람과 더불어 사랑하며 사는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축복임에도 불구하고 사람과 더불어 사랑하며 사는 것을 훼방하는 사탄으로 인해 사람사이에 사랑이 깨어지고, 그로 인해 상처를 받고 또 상처를 입히곤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마음의 상처들로 인해 사람사이는 점점 더 멀어지게 되고, 그렇게 상처를 받았기에 더욱 더 보듬고 감싸주며 살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사탄은 우리를 서로 안아주고 그래서 서로를 용납하는 것을 무섭게 막고 있습니다. 그러나 몸에 상처가 나면 아픈 부위에 약을 바르고, 붕대로 감싸주듯이 포옹은 우리 마음의 상처를 치료하는 약과 같고, 마음의 상처를 감싸주는 붕대와 같습니다. 포옹은 우리로 다시 서로를 보듬고 감싸며 살아갈 수 있게 해 줍니다.

물론 포옹을 한다고 해서 우리에게 있는 모든 상처들이 다 치유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상대의 마음 안에 있는 갈등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따뜻한 말 한마디와 함께 두 팔을 내밀어 부드럽게 안아주는 포옹은 분명히 아픔을 덜어주는 힘이 있으며 그러기에 사람과 사람사이, 특별히 상처받은 마음에는 그 마음을 끌어안듯이 감싸 안는 포옹이 값진 치유가 됩니다. 사랑과 격려, 그리고 보살핌이 필요한 상대의 마음속에 있는 상처들을 안아주는 포옹은 그 어떤 의학적 치료로도 가능하지 않은 우리의 내적 상처를 치유하는 힘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서로 사랑하며, 함께 보듬으며, 그리고 더불어 보살피며 살아가도록 삶의 동반자를 허락하셨습니다. 한 몸처럼 사랑하며 사는 배우자나 가족은 물론이고, 인생의 여정에서 믿음으로 만난 신앙의 동역자들이나, 한 시대를 같이 살아가는 동행자들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유일 것입니다.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그리고 누구든지 서로를 따스하게 품어주며, 안아주며 살아가는 것을 원하실 것입니다.

/글 이승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