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동네 마을회관 앞에 강아지 두 마리가 있었습니다. 정확하게 누가 주인인지는 몰라도 평상 위에 앉아서 장기와 바둑을 두고 계시는 할아버지들 모두에게 극진한 사랑을 받는 강아지들이었습니다. 할아버지들이 아침, 저녁으로 집에서 소뼈나, 음식 남은 것들을 가져다가 개 밥그릇에 놓아 주면 꼬리를 흔들면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런데 강아지들의 이름이 특이 했습니다. 한 놈은 “유월이”였고, 다른 한 놈은 “구월이”였습니다. 처음에는 이 강아지들이 “태어난 날”이거나, 아니면 마을 회관에 “입양된 날”인 줄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것은 앞으로 “개를 잡게 될 달”의 이름이었습니다. “유월이”는 6월이면 돌아가실 예정이고, “구월이”는 9월 달에 그 명(命)을 다할 운명입니다. 먹을 것이 지질이도 없던 시절, 시간 밖에는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동네 할아버지들이 쌈지 돈을 털어 모아 공동 명의로 강아지 두 마리를 구입한 것입니다. 정말 그 이름대로 시월부터는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매일 음식을 가져다주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할아버지들의 무서운 사랑(?)을 포근한 사랑으로 믿고 졸졸 따르다가 처량한 최후를 맞아야 했을 강아지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찡합니다.

미국에 유학을 와서 언어와 문화적 이질감 때문에 극심한 외로움에 시달리는 유학생들에게 접근해서 진실한 우정인양 살갑게 대해 주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피 눈물을 쏟게 만드는 나쁜 사람들의 이야기를 자주 듣습니다. 세계적인 경기 침체로 인해 굵은 한 숨과 함께 막막한 하늘을 쳐다보는 사람들에게 접근해서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따뜻하게 대해주고 새로운 사업을 제안하고는 무참하게 사기를 치는 냉혈한들에 관한 기사들을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자주 접하게 됩니다.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모질 수가 있을까!” 싶은 일들이 주변에서 비일비재로 일어납니다. “축복 받은 땅”, “기회의 나라”라고 불리우는던 이 미국도 마음의 무장해제를 하고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는 “안전지대”(Comfort Zone)가 아님을 하루하루 절감하게 됩니다. 일이 잘 안 풀리고 어려움을 당할수록 순리(順理)를 따라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부당한 이득이나 일확천금의 한탕주의로 인생 대 반전을 추구하다가는 치명적인 실수를 면치 못할 것입니다. 일용한 양식이 아닌 미끼는 더 달콤하고 자극적일 수는 있을지 모르겠지만, 결국에는 오뉴월 복날의 강아지들과 같은 운명으로 삶을 마감하게 만들 것입니다. 얼떨결에 자신의 속마음과는 달리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정해야 했던 베드로 사도는 훗날 자신의 실수를 곱씹으며 초대교회의 성도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십시오. 여러분의 원수 마귀는 우는 사자처럼 두루 다니며 삼킬 사람을 찾습니다. 그러므로 믿음 안에 굳게 서서 마귀를 대적 하십시오” (벧전 5:8~9)

현실을 순수하게 살 수 있는 지혜와 악한 영의 유혹을 분별할 수 있는 식별력이 어느 때 보다도 절실히 요청되는 시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