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최근 열린 세계CEO전문인선교회(대표 박형렬, 이하 WCPM) 주최 ‘세계CEO전문인선교회 2010 전문인 선교대상 시상식’에서 김태연 박사(한국로잔 총무, 전 명지대 교수)가 발제한 “로잔 1차에서 3차까지에 대한 선교적 해석학 - 로잔과 전문인 선교의 상관성을 향하여” 내용이다.

1. 들어가는 말

로잔 1차 운동이 스위스 로잔에서 1974년에 열려서 “Lausanne Covenant”라는 복음명령(Evangelical Mandate)을 제시했다. 그 당시로 말하면 전통적인 교회에서는 큰 충격으로 받아들였다고 한다. 그리고 1989년에 필리핀의 마닐라에서 “마닐라 선언문”을 탄생시켰다. 언제든지 국제적인 선교대회의 주제는 화해와 연속성의 문제라고 본다. 복음과 사회적 관심에 대한 연속성과 연결성 그리고 진정성에 대한 검증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2010년 남아공의 케이프 타운에 이르러서 1부 10개항으로 구성되어진 “케이프타운 헌신”을 채택함으로써 우리는 명실공히 이 시대 가운데 복음주의자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향해 나아갈 수가 있게 됐다. 그 내용은 우리의 사랑에 대한 표현이다. 1) 하나님이 먼저 사랑하셨기에 우리는 사랑한다. 그 대상은 아래와 같다; 2) 살아계신 하나님, 3) 하나님 아버지, 4) 아들 하나님, 5) 성령 하나님, 6) 하나님의 말씀, 7) 하나님의 나라, 8) 하나님의 복음, 9) 하나님의 백성, 10) 하나님의 선교이다.

한국 선교사의 입장에서 36년 동안의 복음주의 선교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은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조국은 아직도 286개 이상의 개신교 교단으로 분열되어 있고, 이슬람은 2020년까지 한반도를 이슬람화 한다고 허언을 일삼고 있다. 또 새벽 교회에 참석하는 성도들의 발길은 선택과목이 되었기 때문이다.

화해(Reconciliation)에 대한 접근

비록 사람간의 화해를 위한 민중신학의 시도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화해를 추구하는 개인구원의 진돗개 전도법과는 사뭇 차원이 다르지만, 화해를 염원하는 복음주의자들의 마음 속에서의 열망은 언제나 화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픔과 동경으로 가득 차 있다. 집안의 탕자의 마음이 아니라 아버지의 마음으로 대하면 되는 것을 아버지의 마음을 갖지 못하는 피조물의 한계점을 하나님이 친히 화해자로 오셔서 우리로 화목케 하심으로 우리는 화해의 대사가 이미 된 것이다. 이제는 화해를 실천하는 자가 되는 것이 중요하다. Christian Peace Reconciliator Koreana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한다.

한국의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이 평화를 가져오는 화해의 촉진자가 될 수 있다면 동서남북으로 나누인 불협화음과 갈등은 본디 우리의 것이 아님을 우리는 깨닫게 될 것이다. 집안의 탕자는 아버지가 죽고 그 유산을 소유하게 되었을 때 아버지가 말하신 “내 것은 다 네 것”이라는 의미를 실감할 수 있었다. 왜, 살아 있을 때는 실감할 수 없고 죽고 나서야 실감하는 다음 세대의 지도자들의 한계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화해하지 못하는 데는 제한된 비전(limited vision) 때문이다. 제한된 속죄론(limited atonement)을 믿는 칼빈의 후손들에게 뱀처럼 지혜로운 조심성이 그들을 예수의 군대에서 조금은 소극적인 후방 지원부대원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리더는 한 눈은 2개월 뒤를, 한 눈은 2년 뒤를 보라고 하는 피터 드러커의 말을 귀담아 볼 필요가 있다. 조금만 기다리면 차세대 리더가 리더가 되는 시간이 오는데 부모가 죽으라고 사모곡을 열린 음악으로 부르는 신 고려장의 세대들처럼 우리는 너무나 화해하기에 게으른 자들인 것이다. 복음을 가진 자들인 우리가 빨리 화해하지 못하는 사이에 가난한 자와 불의, 굶주림 그리고 폭력에 시달리는 자들은 더욱 고통을 당하기 때문이다.

로잔 1차 대회와 화해

존 스토트(John Stott)의 리더십 하에 로잔 1차 대회는 개인적이고 사회적이고 범세계적이고 그리고 우주적인 완전한 회복의 구원을 제시한 것이 로잔 언약이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과의 화해에만 머물고 있는 것이 전통적인 한국교회의 실상이기도 하다. 계속해서 우리의 나눠진 사회를 보아야 한다. 만일, 탕자에게 누나가 있었다면 집안의 탕자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리고 돌아온 탕자에 대해서 어떤 배려를 했을까. 무조건 용서하시는 아버지를 보면서 그녀도 자신의 삶이 아버지와 같이 무조건 용서하는 아가페의 사랑을 실현하고자 했을 것은 자명하다. 로잔 대회의 동력원이 되었던 Billy Graham의 딸이 열정적인 전도자가 된 것과 마찬가지이다. 말씀의 권위에 대한 진정성을 믿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독특성과 전도를 삼위일체로 소중하게 생각하게 한 것이 1차 대회의 중요한 키워드이다.

로잔 1~2차 대회 사이의 화해

사회에 대한 관심을 표명한 다음에 복음주의 진영에는 Evangelical EarthQuake이 이뤄지게 됐으며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듯이 코끼리에 대한 정의를 위해서 많은 장님들이 여러 모임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의무 차원에서 진단을 한 기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로잔의 리더십들은 이러한 것을 공개적으로 토론하는 것을 주저한 것인데 이는 서구적 제국주의에 기초한 자문화 우월주의에서 비롯된 것으로 토론 속도를 조절하면서 백인들이 저지른 다양한 대륙에서의 과오를 어떻게 하나님의 정의의 입장에서 정리할 수 있을지에 대한 결단의 준비가 충분하게 되지 않았기 때문인 것이다. 라인홀트 니버의 말과 같이 더 큰 악(more evil)과 더 작은 악(less evil) 사이에서 선택하며 사는 자와 같이 저도 모르게 WCC와 로잔의 사이에서 갈짓자를 긋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WCC를 대변하는 장신대의 한 선교학 교수는 로잔 대회에 처음 참석하고서는 로잔과 WCC가 거의 같은 것 같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종교적 혼합주의 서구 기독교 사상적 혼합주의로 변형을 하고 선교사의 생활과 실제의 경험이 일천한 지도자의 경우에는 다 같다고 하는 말을 할 만도 하다. 주변에 칼빈주의와 웨슬레 주의가 크게 차이가 안 난다고 말하는 목사들이 있는 것과 같다. 저들은 기독교 천재 아니면 선교적 바보일 것이다.

우리는 더 큰 악과 더 작은 악 사이를 선택하며 사는 명목적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지고의 선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의 제자이고 하나님 나라의 대사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래서 정치적, 경제적 상황에 대한 사회적 책임만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소외 당하는 자들을 위한 복음적인 열정이 제시되기 시작했다. 무문자 구음 종족에게 복음을 증거하는 orality와 같은 운동이 새롭게 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선교라는 용어는 필요 없는 용어이다. 공연히 ‘선교’(mission, missions, missiology)라는 용어를 만들어서 복음주의와 자유주의 간의 싸움으로 만들어 버린 듯하다. 그 칼을 모두 모아서 보습을 만들라는 이사야 선지자와 마찬가지로 오늘의 시대는 양파 간의 밥그릇이 아니라 그 언어의 진정성을 살펴보아야 할 때이다. 복음주의는 청년 천사가 예수의 살아나심을 달려온 예수 따르미들에게 ‘그가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너희가 거기서 그를 뵈리라’라는 말씀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는 축복의 창고(the storage of blessings)와 같은 개념이며 우리는 복음주의를 오늘 사회의 여러 영역에 실천하는 개념으로 되돌아가서 기억을 해야 한다. 반면에 선교는 복음주의를 오히려 후퇴시킨 개념으로 보인다. 소유의 창고(the storage of belongings)로 바뀐 듯 하다. 복음주의자가 한 진영이었는데, 이제 둘로 분리가 되어서 서로가 가시나무 새와 같이 자신을 찌르고 자학하는 예비군으로 전락을 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사단의 전술이다. 대한민국 육사생의 50%가 북침설을 믿고 있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선교’라는 용어는 집안의 탕자와 같은 용어가 되어버린 것이다. 마치 미국의 남북전쟁 당시에 윗옷은 북군 옷을, 바지는 남군 바지를 입고 전쟁에 나간 군사처럼 두 진영에서 다 총을 맞고 벌집이 되는 것이 오늘날의 이반젤리칼 그리고 에큐메니칼이 칼 싸움을 하고 있다고 한다. 최근에는 한기총과 전기총이 총싸움을 하기에 이르렀다. 심지어는 대한민국은 그리스도와 예수가 서로 싸우는 나라라는 말까지 듣는 실정이 됐다.

목사와 평신도로 나누인, 가진 자와 없는 자로 나누인, 병든 자와 건강한 자로 나누인, 그러나 우리가 책임을 져야 할 이 세상에는 자발적인 의지로 스스로가 미래의 삶을 개척하는 지식근로자와 같은 전문인(professional)들이 이 양자 사이에서 화해의 다리, 평화의 다리 역할을 해야 할 때가 도래한 것이다. 복음과 사회적 관심을 모두 아우르는 왕국화의 비전으로 화해를 모색하는 통합적 선교가 탄생할 때가 도래한 것이다. 둘 사이의 막힌 담을 헐기 위해서 win-win partnership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맨송맨송한 마음을 가진 서구 제국주의 선교학자들과 과거의 식민지 경험을 당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로 대변되는 Global South의 해석은 다를 수가 있을 것이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정의를 행하는 우리(justification by faith and doing justice)가 총체적인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서는 전신도 전도자주의(every believer’s evangelisthood)에 기초해 모든 성도가 다 전도자가 되어야 한다. 십자가 두 막대기가 존 스토트의 주장처럼 50:50이 되어서는 십자가가 될 수 없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지옥이 존재하지 않으며 죄인이 죽는 즉시 기체로 산화한다는 영혼 멸절설을 주장하는 그의 주장과 같이 너무나 인간의 입장을 고려할 때, 율법 불폐기론자의 입장에서의 확고한 하나님의 공의는 수정을 하게 될 위험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전도가 우선적이라고 하는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G-20 의장국가인 한국이 같은 가난 자들을 대변하는 나라의 입장을 취하며 가난한 자들을 위한 복음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데 매료가 되게 되면 우리 대한민국의 복음주의 크리스천들은 화해자(reconciliatory)로서의 그리고 촉진자(facilitator)로서의 우리의 사명을 감당할 수가 없을 것이다. 세속적 인본주의가 창궐하는 포스트모던사회 속의 복음주의자들은 라인홀트 니버의 “더 큰 악(more evil)과 더 작은 악(less evil) 사이에서 선택하며 산다”고 하는 하나님의 의(the righteousness of God)가 아닌 자기의 의(self- righteousness)에 사로잡혀 있는 형국이다. 인간의 마음과 사회구조가 모두 선을 추구하는 것이 목적임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는 변화의 단계들을 거쳐 나가야 하는 것이고 가치관의 변화가 아닌 세계관의 변화가 반드시 이뤄져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 중심의 세계관(God-centered worldview)이라는 말에는 전도의 우선순위와 함께 변혁되어야 할 영역들을 보여주고 있다:

1. 변화가 아니라 변혁이다.
2. 문화의 변혁자의 자세이다.
3. 선교적 교회로의 변혁이다.
4. 선교단체의 변혁이다.

따라서 전신자비속성의 원리에 기초한 전신자복음전도자주의가 우리의 살 길이다. 이 일을 위해서 우리는 순결을 회복해야 한다. 순결한 신부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