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께서는 3년의 공생애 기간 동안 많은 일들을 하셨습니다. 그중에 12제자를 양육하는 일에 집중하셨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지시는 바로 전날까지 세족식을 베푸시며 제자들에게 섬김을 당부하셨습니다. 이 땅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성만찬을 베푸시면서 주님을 기념하라고 하셨습니다. 어찌 보면 예수님께서도 많은 프로그램을 하셨습니다. 쉴 새 없이 제자훈련과 치유사역과 귀신을 내쫓고, 제자들과 믿는 사람들의 가정을 방문하시고,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와는 특별한 우정을 맺으셨습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주님께서 Event에 집중하셨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직 복음이었습니다. 말씀으로 오신 주님께서는 오직 하나님나라에 집중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위해서 많은 Event를 하셨습니다. 사람을 많이 모으기 위한 Event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많은 교회들이 Event를 잘하면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올 것을 기대합니다. 이것을 저는 Eventlism(행사중심) 이라는 단어로 설명하고자 합니다. 물론 이 단어는 제가 만든 단어지만 오늘날의 행사중심 교회를 설명하기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적지 않은 교회가 Eventlism Church(행사 중심의 교회)가 되어버렸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한 Event가 아니라, 교회부흥, 사람을 모으기 위한 Event를 하고 있습니다. 목적과 수단이 바뀌면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는 법입니다. 선행은 자체가 목적이 되어야지, 칭찬을 위한 수단이 되면 겉모양은 똑같아도 내용이 달라지고, 의미가 퇴색되며, 상급이 없어집니다. 다시 말해서, 선행에 따른 칭찬은 당연하지만, 칭찬을 위한 선행이 되면 그 선행은 착한 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목적과 수단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목적이 선할 때 착한 일이라고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처럼 귀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복음을 전하는 것에는 분명히 상급이 있습니다. 그러나 상급을 위한 복음전파가 된다면, 의미가 퇴색되기 쉽습니다. 더군다나, 그 복음이 교회에 사람을 모으기 위한 수단이 되는 순간 예수 없는 복음이 되기 쉽습니다. 다시 말해서 Evangelism(복음)이 아니라 Eventlism(행사중심)이 되기 십상입니다. 기도가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일부러 유태인의 기도시간이 될 때 즈음이면 시장 어귀에 가서, 무릎을 꿇고 하늘을 보며 기도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하늘의 언어, 기도가 인정을 받기 위한 수단이 되었을 때 주님께서는 그것을 기도가 아니라 외식이라고 단언하시고 꾸짖으셨습니다.

마파두부 요리의 유래를 아시나요? 1874년 중국 서남부의 쓰촨성 청두 북문 근처에는 예전부터 식당들이 많이 있었답니다. 그 이유가 짐을 날라주는 짐꾼들이 많다보니 식당들이 짐꾼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유채기름을 날라주는 짐꾼중의 한 사람이 작은 쇠고기 덩어리를 하나 들고는 평소 잘 알고 지내던, 천푸춘이란 식당주인을 찾아와 그의 부인 천리우에게 “죄송하지만 오늘은 돈이 없어서 요리를 주문할 수는 없고 이 쇠고기와 유채기름으로 두부를 좀 지져주실 수 없나요?” 부탁을 하더랍니다. 워낙 마음 좋기로 소문난 천리우라는 여인은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맵고 뜨거우면서도, 부드러운 맛을 내는 두부요리를 즉석에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부요리가 소문이 퍼져 사람들 사이에서 엄청난 호응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천리우라는 부인의 얼굴에 곰보자국이 있다고 해서 이 요리의 이름을 일명 ‘곰보부인 두부’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중국어로 곰보라는 뜻의 ‘마(麻)’란 글자에다가 부인이라는 ‘파’(麻)를 붙여서 ‘마파두부’, ‘곰보부인 두부’ 요리라고 불리게 되었고 1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식당에는 원조 마파두부를 먹어보려는 손님으로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마파 두부요리 이야기가 13년도 아니고 130년 동안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한 여인의 작은 선행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여인의 선행이 가게의 장사를 위한 수단이었다고 한다면, 아무런 감동을 줄 수 없었을 겁니다.

짐꾼에게 베풀어준 마파두부 한 접시에 관한 이야기가 130년이 넘는 지금까지 전해내려오고, 2천년이 넘는 세월동안 변함없이 기록과 함께 이어지는 십자가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착함’이 주는 감동입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빌1:6)” 무조건적인 희생의 복음이 주는 감격입니다. 그래서 Eventlism(행사중심)에는 이런 감동이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Evangelism)에는 무한한 감동이 있습니다. 사람을 움직입니다. 세상을 움직입니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 분명합니다. 복음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삶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움직입니다. 하늘나라로 인도합니다. 한인교회와 한국교회가 Eventlism Church(행사중심의 교회)가 아니라 오직 Evangelism Church(복음중심의 교회)가 되기를 소원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