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무(無)라는 말은 기독교적 용어가 아닌 불교에서 자주 사용하는 말이다. 기독교의 창조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 무(無-공허함:Emptiness)와 혼돈과 흑암가운데서 유(有), 곧 천하 만물을 존재하게 하였다. 기독교의 가난한 마음이나 겸손은 있는 그 자체를 없애버리는 무의 개념이 아니라 세상의 것들을 버리고 다른 것, 곧 하나님의 신령한 것들로 다시 입고, 채우는 충만한 삶이다.
이렇게 되려면 우리는 도대체 세상의 끝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인생의 지혜는 크고, 많고, 높고, 넓은데 있지 않다. 그래서 고려시대 송도삼절의 한 사람이었던 황진이도 당대의 실력자인 벽계수(碧溪水)에게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하리”라고 했던 것이다.
‘쉬어가는 것’은 바로 인생의 지혜이다. 성경 시편은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편90:12) 라고 말씀한다. 인생의 쉼은 단지 여행이나 휴가가 아니라 우리위에 또 다른 존재, 곧 인생보다 더 영원하신 분, 이름하여 ‘무상(無上)의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어야 한다. 이것만큼 인생의 가장 큰 지식과 깨달음이 없는 것이다.
그 무상(無上)의 하나님이 우리 사람들에게 무상(無償)으로 주신 은혜를 생각해 보면 감사할 뿐이다. 땅바닥에 지나가는 개미를 보며 가소로이 여기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내려다보시며 가소롭게 보실 때가 한 두 번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이 한번 입기운을 발하시면 그 어느 누구도 이 땅에 남아 날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 옛날 사람들이 자기의 손으로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바벨탑을 쌓아 살아계신 하나님보다 더 높아지려고 했으나 결국 그 탑은 무너지고 말았다.
예수님은 현재 시가로 비교할 때 1억의 채무를 탕감 받은 사람이 자기에게 10만원의 채무를 갚지 않는다고 옥에 가두는 사람을 비유하면서 우리 사람들이 그렇게 옹졸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꾸짖으셨다. 이민 생활하면서 이 사람, 그리고 저 교회에서 받은 마음의 아픔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해서 자기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셨는가를 생각하며 미움과 아픔, 그리고 다툼과 허영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하신 말씀처럼 그 어느 누구에게도 기대하거나 대가를 바라지 않고 그냥 바라보고 기다리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이렇게 살면 결국 무상(無常)의 단계에 오르게 된다. 이 무상(無常)은 솔로몬이 전도서에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1:2)라고 하신 그 ‘헛됨“이 무상(無常)이다. 그렇다고 이 헛됨은 단지 의미가 없고, 소망이 없다는 허무주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 헛됨은 결국 사람이나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은 잠깐이고,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만이 사람의 본분임을 깨닫는 것이다.
이 무상(無常)의 뜻을 잘못 이해하면 자살이나 세상에 대한 비판, 염세주의로 빠지게 된다. 진정한 무상(無常)은 나를 찾고, 이웃을 알고, 세상을 이해하여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아 가게 된다. 이것이 사울이 바울이 되었고, 요한의 아들 시몬이 베드로가 된 커다란 변화를 갖게 하는 것이다.
무상(無常)을 알면 마지막으로 무상(無想)의 단계에 이른다. 이 무상(無想)은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버리는 것이다. 쓸데없는 생각을 버리고 필요한 생각을 찾는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에베소서4:31) 욕심을 버리면 자기를 찾게 되고, 자기를 찾으면 우리를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무상(無想)이다. 무상(無想)은 겸손을 낳고, 겸손은 기쁨을 낳고, 기쁨은 행복을 누리게 한다.
무상(無上)의 하나님을 믿고, 무상(無償)의 은혜에 감사하고, 무상(無常)의 삶으로 만족하고, 무상(無想)의 생각으로 인격을 만들어 갈 때 안보이던 하나님, 무(無) 하나님이 유(有)의 하나님으로 더 가까이 다가오게 될 것이고 잃었던 자기를 찾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려면 우리는 도대체 세상의 끝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인생의 지혜는 크고, 많고, 높고, 넓은데 있지 않다. 그래서 고려시대 송도삼절의 한 사람이었던 황진이도 당대의 실력자인 벽계수(碧溪水)에게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마라 일도창해하면 돌아오기 어려우니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하리”라고 했던 것이다.
‘쉬어가는 것’은 바로 인생의 지혜이다. 성경 시편은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의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편90:12) 라고 말씀한다. 인생의 쉼은 단지 여행이나 휴가가 아니라 우리위에 또 다른 존재, 곧 인생보다 더 영원하신 분, 이름하여 ‘무상(無上)의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어야 한다. 이것만큼 인생의 가장 큰 지식과 깨달음이 없는 것이다.
그 무상(無上)의 하나님이 우리 사람들에게 무상(無償)으로 주신 은혜를 생각해 보면 감사할 뿐이다. 땅바닥에 지나가는 개미를 보며 가소로이 여기는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내려다보시며 가소롭게 보실 때가 한 두 번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이 한번 입기운을 발하시면 그 어느 누구도 이 땅에 남아 날 사람이 없는 것이다. 그 옛날 사람들이 자기의 손으로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바벨탑을 쌓아 살아계신 하나님보다 더 높아지려고 했으나 결국 그 탑은 무너지고 말았다.
예수님은 현재 시가로 비교할 때 1억의 채무를 탕감 받은 사람이 자기에게 10만원의 채무를 갚지 않는다고 옥에 가두는 사람을 비유하면서 우리 사람들이 그렇게 옹졸하게 살아가고 있음을 꾸짖으셨다. 이민 생활하면서 이 사람, 그리고 저 교회에서 받은 마음의 아픔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사랑해서 자기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셨는가를 생각하며 미움과 아픔, 그리고 다툼과 허영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하신 말씀처럼 그 어느 누구에게도 기대하거나 대가를 바라지 않고 그냥 바라보고 기다리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이렇게 살면 결국 무상(無常)의 단계에 오르게 된다. 이 무상(無常)은 솔로몬이 전도서에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1:2)라고 하신 그 ‘헛됨“이 무상(無常)이다. 그렇다고 이 헛됨은 단지 의미가 없고, 소망이 없다는 허무주의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 헛됨은 결국 사람이나 세상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은 잠깐이고,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만이 사람의 본분임을 깨닫는 것이다.
이 무상(無常)의 뜻을 잘못 이해하면 자살이나 세상에 대한 비판, 염세주의로 빠지게 된다. 진정한 무상(無常)은 나를 찾고, 이웃을 알고, 세상을 이해하여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아 가게 된다. 이것이 사울이 바울이 되었고, 요한의 아들 시몬이 베드로가 된 커다란 변화를 갖게 하는 것이다.
무상(無常)을 알면 마지막으로 무상(無想)의 단계에 이른다. 이 무상(無想)은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버리는 것이다. 쓸데없는 생각을 버리고 필요한 생각을 찾는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에베소서4:31) 욕심을 버리면 자기를 찾게 되고, 자기를 찾으면 우리를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무상(無想)이다. 무상(無想)은 겸손을 낳고, 겸손은 기쁨을 낳고, 기쁨은 행복을 누리게 한다.
무상(無上)의 하나님을 믿고, 무상(無償)의 은혜에 감사하고, 무상(無常)의 삶으로 만족하고, 무상(無想)의 생각으로 인격을 만들어 갈 때 안보이던 하나님, 무(無) 하나님이 유(有)의 하나님으로 더 가까이 다가오게 될 것이고 잃었던 자기를 찾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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