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어느 마을에 한 지혜로운 현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지혜로운 말을 듣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찾아왔습니다.
어느 날 그는 강가에서 사람들에게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습니다. 일순간 그는 자신의 옷을 무릎까지 걷어 올렸습니다. 그리고는 첨벙첨벙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는 허리를 숙이고 강바닥을 더듬었습니다. 잠시 뒤 강가로 다시 올라온 그의 손에는 제법 큼지막한 조약돌 하나가 쥐여져 있었습니다. 그는 그 조약돌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이 돌을 깨뜨린다면 이 돌 속이 젖어있을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말라있을 것 같습니까?"
사람들 중 어떤 이는 말라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어떤 이는 방금 강에서 끄집어내었으니까, 또 강속에 오랫동안 담겨져 있었으니까 그 속도 젖어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현자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돌을 깨뜨렸습니다. 물론 그 속은 하얗게 말라 있었습니다. 현자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이러한 가르침을 베풀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이 세상에서 사랑이라는 말처럼 흔하게 쓰이는 말은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사랑이라는 말이 강물처럼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이 돌처럼 겉만 젖어있고 속은 메말라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조약돌에서 물을 짜낼 수 없는 것처럼 우리에게서도 결코 사랑은 나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랑 없는 마음으로 하는 친절이나 선행은 기껏해야 외식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외식이라는 말은 마스크를 쓰는 삶입니다. 가면을 쓰고 사는 삶- 마치 연극배우가 배역을 연기 하는 것과 같은 삶- 이것이 외식하는 삶입니다. 사랑은 항상 마음으로부터 먼저 우러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질 때 희생이 담겨 있어야 비로소 참사랑의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아무리 사랑이 좋은 것이로되 우리 마음속에만 갇혀 있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질 때 비로소 사랑은 의의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일3:18의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사랑에는 두 가지 요소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밖으로는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안으로는 진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겸비될 때 우리는 비로소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오늘 본문 속에서 같은 맥락 속에서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는 은사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해 주었습니다. 은사는 다양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는 각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은사는 소중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사는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은사는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은사를 주셨습니까? 우리 자신을 드러내라고 주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며, 지체들을 섬기라고 우리에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은사 다음에 사랑이 나오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고전12장에서 각양 은사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었습니다. 곧 이어서 그 유명한 사랑장인 고전13장에서는 사랑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을 해 주었습니다. 왜 은사에 대해서 먼저 말씀을 하고 이어서 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었겠습니까? 은사를 활용할 때 그 바탕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사를 활용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고, 다른 지체들을 섬길 때, 그 근본정신은 반드시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사랑으로 섬기는 삶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사랑의 원리입니다. 사랑은 안으로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밖으로는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해야 합니다. 9절 말씀입니다. 둘째로, 형제에 대한 사랑입니다. 형제에 대한 사랑은 안으로는 우애, 곧 형제의식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고 밖으로는 존경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10절 말씀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그리스도 몸에는- 교회 안에서는 열심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고 충성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11절 말씀입니다.
첫째로, 사랑의 원리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9절 말씀입니다.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사랑은 안으로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겉으로는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해야 합니다. 우선 사랑에는 거짓이 없다는 사실부터 살펴보십시다. 사랑은 동기가 순수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기를 마치셨을 때입니다. 그때 가룟 유다가 큰 무리를 이끌고서 그곳으로 왔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다가오더니 이렇게 인사를 했습니다.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께 다가와서 입맞춤을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룟 유다의 인사와 입맞춤을 결코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동기가 불순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거짓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동기가 순수해야 합니다. 마음에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사랑은 의롭게 나타나야 합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의 말씀을 기록할 당시에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큰 핍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서로 열심히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를 핍박하는 자들은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사랑이라는 미명 하에 기독교인들이 함께 모여서 남녀 간에 성적으로 부도덕한 행실을 하고 있다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핍박을 했습니다.
요즘도 천주교에서는 미사를 드릴 때 여자 성도들이 머리에 흰 수건을 쓰고 있습니다. 그 근본의 뜻이 무엇인지 압니까? 그들은 예배드릴 때 부도덕한 행실로 인해서 자신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는 일은 결코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그와 같은 오해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는 사랑은 무엇입니까?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타락한 세상 사람들이 육신을 즐기기 위해서 나누는 에로스가 결코 아닙니다. 아가페는 거룩한 사랑입니다. 의로운 사랑입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고 그 대상이 싫어하는 것을 같이 싫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좋아 하시는 것을 우리도 좋아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을 우리도 싫어해야 하는 것입니다.
(잠 6:16)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 칠 가지니
(잠 6:17)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잠 6:18)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잠 6:19)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
그런데 우리가 막연한 사랑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으면 감상적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을 두둔하고 오히려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과 교제를 단절한 사람을 비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선 사랑을 하되 거룩한 사랑을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윤리적으로도 흠이 없어야 합니다. 여러 해 전에 "쉰들러 리스트"라는 제목의 영화가 상영된 적이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 보면 감동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독일군이 연합군에게 무조건적으로 항복을 했습니다. 드디어 전쟁이 끝났습니다. 쉰들러는 자기 공장에서 일하는 유대인들을 모아놓고서 마지막 작별 연설을 했습니다. 그 공장에서 일하는 유대인들은 쉰들러의 도움으로 생명을 건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쉰들러를 위해서 한 장의 편지를 써 주었습니다. 가다가 행여라도 연합군에게 체포될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편지 속에는 그동안의 일을 소상하게 다 기록을 했습니다. 그들은 그 편지에 일일이 서명을 했습니다.
아울러 그들은 쉰들러에게 고마운 뜻을 표하기 위해서 자기들의 이에 씌운 금을 빼내서 하나의 기념 반지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기념반지에는 이러한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한 자는 온 세상을 구한 것이다.' 탈무드에 나오는 글귀를 인용한 것입니다. 그것을 받아들고서 쉰들러는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더 살릴 수도 있었는데, 더 구할 수도 있었는데…"
그의 말을 듣고 유대인들의 대표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닙니다. 당신은 충분히 살렸습니다. 당신 덕분에 천명이 넘는 유대인들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 덕분에 우리 유대인들은 대를 이어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쉰들러가 오열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당신은 모릅니다. 나는 너무나 많은 돈을 쓸데없는 곳에 허비했습니다. 이 차, 이 차가 무엇이라고 붙들고 있었단 말입니까? 이 차로도 얼마든지 열 사람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이 금핀, 이것으로도 얼마든지 두 사람을 더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의 말대로 그가 일천 명의 유대인들의 목숨을 구했다는 것만으로는 사랑이 아닐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술꾼이었습니다. 호색꾼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돈을 자신의 육신을 위해서 허비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가 지금까지 많은 유대인들의 목숨을 구했다는 것은 자기만족을 위한 자기 유희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순간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더 살릴 수도 있었습니다. 더 구할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진정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은 안과 밖, 속과 겉, 이 두 가지 요소가 언제나 겸비해야 합니다. 사랑은 안으로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밖으로는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해야 합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이러한 사랑이 우리의 삶 속에 늘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어느 날 그는 강가에서 사람들에게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습니다. 일순간 그는 자신의 옷을 무릎까지 걷어 올렸습니다. 그리고는 첨벙첨벙 강물 속으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그는 허리를 숙이고 강바닥을 더듬었습니다. 잠시 뒤 강가로 다시 올라온 그의 손에는 제법 큼지막한 조약돌 하나가 쥐여져 있었습니다. 그는 그 조약돌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이 돌을 깨뜨린다면 이 돌 속이 젖어있을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말라있을 것 같습니까?"
사람들 중 어떤 이는 말라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어떤 이는 방금 강에서 끄집어내었으니까, 또 강속에 오랫동안 담겨져 있었으니까 그 속도 젖어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현자는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 돌을 깨뜨렸습니다. 물론 그 속은 하얗게 말라 있었습니다. 현자는 그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이러한 가르침을 베풀었습니다.
"여러분! 지금 이 세상에서 사랑이라는 말처럼 흔하게 쓰이는 말은 없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사랑이라는 말이 강물처럼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이 돌처럼 겉만 젖어있고 속은 메말라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조약돌에서 물을 짜낼 수 없는 것처럼 우리에게서도 결코 사랑은 나올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사랑은 언제나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언제나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사랑 없는 마음으로 하는 친절이나 선행은 기껏해야 외식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이 외식이라는 말은 마스크를 쓰는 삶입니다. 가면을 쓰고 사는 삶- 마치 연극배우가 배역을 연기 하는 것과 같은 삶- 이것이 외식하는 삶입니다. 사랑은 항상 마음으로부터 먼저 우러나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다른 사람들에게 베풀어질 때 희생이 담겨 있어야 비로소 참사랑의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부뚜막의 소금도 집어넣어야 짜다'라는 속담이 있습니다. 아무리 사랑이 좋은 것이로되 우리 마음속에만 갇혀 있으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베풀어질 때 비로소 사랑은 의의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요일3:18의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사랑에는 두 가지 요소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밖으로는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안으로는 진실함이 있어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요소가 겸비될 때 우리는 비로소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오늘 본문 속에서 같은 맥락 속에서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 바로 앞에서는 은사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씀을 해 주었습니다. 은사는 다양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사는 각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은사는 소중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은사는 결코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은사는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은사를 주셨습니까? 우리 자신을 드러내라고 주신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며, 지체들을 섬기라고 우리에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사랑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은사 다음에 사랑이 나오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은 먼저 고전12장에서 각양 은사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었습니다. 곧 이어서 그 유명한 사랑장인 고전13장에서는 사랑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을 해 주었습니다. 왜 은사에 대해서 먼저 말씀을 하고 이어서 사랑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었겠습니까? 은사를 활용할 때 그 바탕은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사를 활용해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고, 다른 지체들을 섬길 때, 그 근본정신은 반드시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을 통해서 사랑으로 섬기는 삶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사랑의 원리입니다. 사랑은 안으로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밖으로는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해야 합니다. 9절 말씀입니다. 둘째로, 형제에 대한 사랑입니다. 형제에 대한 사랑은 안으로는 우애, 곧 형제의식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고 밖으로는 존경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10절 말씀입니다. 셋째로, 예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교회의 머리되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은 그리스도 몸에는- 교회 안에서는 열심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고 충성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11절 말씀입니다.
첫째로, 사랑의 원리에 대해서 살펴봅니다.
9절 말씀입니다.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사랑은 안으로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겉으로는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해야 합니다. 우선 사랑에는 거짓이 없다는 사실부터 살펴보십시다. 사랑은 동기가 순수해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기를 마치셨을 때입니다. 그때 가룟 유다가 큰 무리를 이끌고서 그곳으로 왔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다가오더니 이렇게 인사를 했습니다. "랍비여 안녕하시옵니까?" 그러면서 그는 예수님께 다가와서 입맞춤을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가룟 유다의 인사와 입맞춤을 결코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동기가 불순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에 거짓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입맞춤으로 예수님을 팔아넘기고 말았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동기가 순수해야 합니다. 마음에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사랑은 의롭게 나타나야 합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의 말씀을 기록할 당시에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큰 핍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서 서로 열심히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를 핍박하는 자들은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사랑이라는 미명 하에 기독교인들이 함께 모여서 남녀 간에 성적으로 부도덕한 행실을 하고 있다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 핍박을 했습니다.
요즘도 천주교에서는 미사를 드릴 때 여자 성도들이 머리에 흰 수건을 쓰고 있습니다. 그 근본의 뜻이 무엇인지 압니까? 그들은 예배드릴 때 부도덕한 행실로 인해서 자신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리는 일은 결코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그와 같은 오해를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본문에서 말하는 사랑은 무엇입니까?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타락한 세상 사람들이 육신을 즐기기 위해서 나누는 에로스가 결코 아닙니다. 아가페는 거룩한 사랑입니다. 의로운 사랑입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이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고 그 대상이 싫어하는 것을 같이 싫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좋아 하시는 것을 우리도 좋아하는 것이고 하나님이 싫어하는 것을 우리도 싫어해야 하는 것입니다.
(잠 6:16)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 칠 가지니
(잠 6:17)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잠 6:18)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잠 6:19)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
그런데 우리가 막연한 사랑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으면 감상적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오히려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을 두둔하고 오히려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과 교제를 단절한 사람을 비난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선 사랑을 하되 거룩한 사랑을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은 윤리적으로도 흠이 없어야 합니다. 여러 해 전에 "쉰들러 리스트"라는 제목의 영화가 상영된 적이 있습니다. 마지막 부분에 보면 감동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독일군이 연합군에게 무조건적으로 항복을 했습니다. 드디어 전쟁이 끝났습니다. 쉰들러는 자기 공장에서 일하는 유대인들을 모아놓고서 마지막 작별 연설을 했습니다. 그 공장에서 일하는 유대인들은 쉰들러의 도움으로 생명을 건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쉰들러를 위해서 한 장의 편지를 써 주었습니다. 가다가 행여라도 연합군에게 체포될 경우를 대비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편지 속에는 그동안의 일을 소상하게 다 기록을 했습니다. 그들은 그 편지에 일일이 서명을 했습니다.
아울러 그들은 쉰들러에게 고마운 뜻을 표하기 위해서 자기들의 이에 씌운 금을 빼내서 하나의 기념 반지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기념반지에는 이러한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의 목숨을 구한 자는 온 세상을 구한 것이다.' 탈무드에 나오는 글귀를 인용한 것입니다. 그것을 받아들고서 쉰들러는 흐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더 살릴 수도 있었는데, 더 구할 수도 있었는데…"
그의 말을 듣고 유대인들의 대표가 이렇게 말합니다. "아닙니다. 당신은 충분히 살렸습니다. 당신 덕분에 천명이 넘는 유대인들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당신 덕분에 우리 유대인들은 대를 이어 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쉰들러가 오열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닙니다! 당신은 모릅니다. 나는 너무나 많은 돈을 쓸데없는 곳에 허비했습니다. 이 차, 이 차가 무엇이라고 붙들고 있었단 말입니까? 이 차로도 얼마든지 열 사람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이 금핀, 이것으로도 얼마든지 두 사람을 더 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의 말대로 그가 일천 명의 유대인들의 목숨을 구했다는 것만으로는 사랑이 아닐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술꾼이었습니다. 호색꾼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돈을 자신의 육신을 위해서 허비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가 지금까지 많은 유대인들의 목숨을 구했다는 것은 자기만족을 위한 자기 유희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순간에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더 살릴 수도 있었습니다. 더 구할 수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진정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사랑을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랑은 안과 밖, 속과 겉, 이 두 가지 요소가 언제나 겸비해야 합니다. 사랑은 안으로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밖으로는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해야 합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이러한 사랑이 우리의 삶 속에 늘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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