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째로, 모든 은사는 소중성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사를 주실 때 마구잡이로 무턱대고 주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라고 했습니다.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가장 적합한 직분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직분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가장 적절한 은사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따라서 어떠한 은사라도 우리는 결코 소홀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
모든 은사는 다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일곱 가지 은사를 어떻게 사용해야 되는가를 일일이 설명해 주었습니다.
첫째,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이상이면 거짓 예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하이면 자기가 맡은 소임에 불충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왜 사도 바울이 똑같은 단어를 반복했습니까? 설명할 말이 얼른 생각나지 않아서 그렇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섬김의 정신이 변질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섬긴다고 하면서 자기가 드러난다든지, 또는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려는 자세를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섬김은 어디까지나 섬김으로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바르게 가르쳐야 합니다. 자기의 잘못된 생각을 가르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가르치는 자가 잘못 행하는 것처럼 배움을 받는 자도 역시 잘못된 길로 행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넷째,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욥의 세 친구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의 잘못이 무엇이었습니까? 욥이 어려운 곤경에 처했습니다. 그를 위로하러 왔습니다. 위로하러 왔으면 위로해 주어야지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히려 욥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말았습니다. 권위하는 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권위하는 일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다섯째,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해야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물질의 주인이 아닙니다. 물질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청지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뜻대로 성실한 자세로 임해야 합니다. 마치 자기가 물질의 주인인 것처럼 받는 사람을 깔본다든지, 또는 인색한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여섯째,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다스리는 자는 본이 되어야합니다. 다스리는 자가 부지런해야지 함께 일하는 사람도 역시 부지런할 수 있습니다. 그저 팔짱만 낀 채 말로서만 지시하려고 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신이 먼저 앞장서서 솔선하는 본을 보여야 합니다.
일곱째,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 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악 가운에 있는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높고 높은 별을 넘어서 낮고 낮은 이 땅으로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억지로 하신 것이 아닙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언제나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책임감 때문에 마지못해서 하는 듯하다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사도 바울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로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를 일일이 설명을 했습니까? 은사는 하나같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여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고가 없습니다. 똑같이 소중합니다.
어느 괘종시계에 달려서 움직이는 시계추의 이야기입니다. 오래 전에 그 시계추가 다른 부품들과 함께 조립되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책상 위에는 여러 부품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때마침 그 시계추 옆에는 그와 함께 일하게 될 큰 톱니바퀴가 서 있었습니다. 시계추는 그 큰 톱니바퀴를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 큰 톱니바퀴가 다 달아서 없어질 때까지 내가 계속해서 움직여야 할 텐데. 도대체 내가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해야 될까? 일 분이면 60번, 한 시간이면 3,600번, 한 달이면 그것의 24배, 일 년이면 또 그것의 365배… 아이고, 끔찍해! 나는 도무지 지겨워서 그런 일은 못 할꺼야!' 그러면서 시계추는 한숨을 쉬었습니다. 시계주인은 시계추의 한숨소리를 듣고서 시계추의 마음을 헤아렸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위로해 주었습니다.
"시계추야, 너무 끔찍하게 생각하지 말아라. 내가 네게 한 가지만 물어보겠다. 할 수 있는지 한번 대답해 보아라. 네가 움직일 때마다 그저 딱 한 번씩만 똑딱거리는 소리를 내 줄 수 있겠느냐?" 시계추는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시계주인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물론,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시계 주인은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래, 네가 하는 일은 그것만 하면 돼. 그러면 너의 일로 인해서 시계 전체가 언제나 활기차게 움직일 수 있을 거야."
그래서 그 때부터 시계추는 괘종시계에 달려서 움직일 때마다 딱 한 번씩만 똑딱거리는 소리를 내었습니다. 시계추의 똑딱거리는 소리에 시계 전체는 언제나 활기차게 움직일 수가 있었습니다. 시계추도 그 즐거움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금도 변함없이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서 충성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괜스레 이것저것 생각하면서 지레 짐작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은사를 주셨든지 간에, 맡은바 소임에 충실하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하는 일로 인해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전체가 언제나 활기차게 움직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맡은 소임에 충실하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어딘가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은사를 주셨든지 받은바 은사대로 각자가 맡은 소임에 충성을 다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은사의 섬길 때에 제 기능을 발휘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것은 우리 자신의 유익을 도모하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 은사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기라는 것입니다. 다른 지체들을 섬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일곱 가지 은사들을 살펴보면 다 섬기는 것입니다. 예언은 말씀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섬기는 일이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가르치는 일도, 권위하는 일도, 구제하는 일도, 다스리는 일도, 긍휼을 베푸는 일도 궁극적으로는 모두 다른 지체들을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어느 농가 집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농가의 주인이 칠순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잔치를 며칠 앞두고서 집안에 있는 모든 동물들이 모여 회의를 했습니다. 주인의 잔칫상에 올라갈 동물을 뽑기 위함이었습니다. 순교할 동물은 과연 누구인가? 그것이 그 날의 의제였습니다. 의장 동물이 먼저 개에게 물었습니다. "얘, 멍멍아! 요즈음 들어서 주인의 기력이 몹시도 쇠하여진 것 같은데, 네가 주인의 보신을 위해서라도 탕으로 올라가 주면 어떻겠느냐?" 그 소리를 듣고 개가 가만히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내가 주인을 위해서 희생을 하는 것은 좋은데, 내가 없으면 누가 이 집의 재산을 지켜 주겠니? 주인을 도둑으로부터 보호해 줄자가 누구겠어? 그러니 내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아." 의장 동물은 개의 말을 듣고 일리가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닭에게 의향을 물어보았습니다. "얘, 닭아! 네가 삼계탕으로 주인을 좀 대접해 드리면 어떻겠느냐?" 그러자 닭이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무슨 소리야? 내가 없으면 누가 매일 알을 낳아서 주인의 영양을 보충해 줄 수 있겠어? 그리고 내가 없으면 누가 주인에게 일어날 시간을 가르쳐 줄 수가 있겠어? 나는 안 돼!" 어쩔 수 없이 의장 동물이 이번에는 소를 향해서 말했습니다. "얘, 소야! 아무래도 네가 갈비로 주인을 대접해 드려야 하겠다. 그래도 잔칫상에는 소고기가 제일이지 않느냐?"그러자 소도 역시 변명을 들어놓았습니다. "내가 없어봐. 이 집의 이 많은 농사를 누가 짓겠어? 나는 안 돼!"
다른 동물들 역시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희생을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동물은 돼지밖에 없었습니다.
의장 동물은 마지막으로 돼지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얘, 돼지야! 네가 삼겹살로 주인을 대접해 드리면 어떻겠느냐?"
그러자 돼지가 가만히 생각하더니 비장한 각오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꿀꿀, 알겠다. 죽을 놈은 나밖에 없네. 알았으니까 가마솥에 물이나 끓여라." 그리곤 물이 끓자 옆에 있던 닭을 집어 던져 넣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모습을 어떠합니까? 우리도 이런 저런 변명을 늘어놓으며 섬김의 자리를 피하려고 들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것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자신을 희생하는 일, 섬기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칭찬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상급이 있을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은사와 관련해서 세 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은사의 다양성입니다. 은사는 모두 다르게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둘째로, 은사의 소중성입니다. 은사는 소홀히 여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 똑같이 소중합니다. 셋째로, 은사의 섬김성입니다. 은사는 우리 자신의 유익을 도모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젠가 우리는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하나님 앞에 서야합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처럼 은사를 소홀히 여기지 마십시다.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책망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은사를 주셨든지 간에, 받은바 은사대로 맡은 소임에 충성합시다. 그리해서 하나님 앞에 서는 날 "착하고 충성 된 종"이라는 칭찬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사를 주실 때 마구잡이로 무턱대고 주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라고 했습니다.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가장 적합한 직분을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직분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가장 적절한 은사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따라서 어떠한 은사라도 우리는 결코 소홀히 생각할 수 없습니다.
모든 은사는 다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일곱 가지 은사를 어떻게 사용해야 되는가를 일일이 설명해 주었습니다.
첫째,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이상이면 거짓 예언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이하이면 자기가 맡은 소임에 불충실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왜 사도 바울이 똑같은 단어를 반복했습니까? 설명할 말이 얼른 생각나지 않아서 그렇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섬김의 정신이 변질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섬긴다고 하면서 자기가 드러난다든지, 또는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려는 자세를 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섬김은 어디까지나 섬김으로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바르게 가르쳐야 합니다. 자기의 잘못된 생각을 가르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가르치는 자가 잘못 행하는 것처럼 배움을 받는 자도 역시 잘못된 길로 행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넷째,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욥의 세 친구들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의 잘못이 무엇이었습니까? 욥이 어려운 곤경에 처했습니다. 그를 위로하러 왔습니다. 위로하러 왔으면 위로해 주어야지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오히려 욥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말았습니다. 권위하는 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권위하는 일로 이루어져야만 합니다.
다섯째,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해야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물질의 주인이 아닙니다. 물질의 주인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청지기에 불과할 뿐입니다. 청지기는 주인의 뜻대로 성실한 자세로 임해야 합니다. 마치 자기가 물질의 주인인 것처럼 받는 사람을 깔본다든지, 또는 인색한 태도를 취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여섯째,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다스리는 자는 본이 되어야합니다. 다스리는 자가 부지런해야지 함께 일하는 사람도 역시 부지런할 수 있습니다. 그저 팔짱만 낀 채 말로서만 지시하려고 들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자신이 먼저 앞장서서 솔선하는 본을 보여야 합니다.
일곱째,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 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죄악 가운에 있는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높고 높은 별을 넘어서 낮고 낮은 이 땅으로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억지로 하신 것이 아닙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언제나 즐거운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책임감 때문에 마지못해서 하는 듯하다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사도 바울의 의도가 무엇입니까? 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로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를 일일이 설명을 했습니까? 은사는 하나같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여길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고가 없습니다. 똑같이 소중합니다.
어느 괘종시계에 달려서 움직이는 시계추의 이야기입니다. 오래 전에 그 시계추가 다른 부품들과 함께 조립되기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습니다. 책상 위에는 여러 부품들이 널려 있었습니다. 때마침 그 시계추 옆에는 그와 함께 일하게 될 큰 톱니바퀴가 서 있었습니다. 시계추는 그 큰 톱니바퀴를 보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 큰 톱니바퀴가 다 달아서 없어질 때까지 내가 계속해서 움직여야 할 텐데. 도대체 내가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해야 될까? 일 분이면 60번, 한 시간이면 3,600번, 한 달이면 그것의 24배, 일 년이면 또 그것의 365배… 아이고, 끔찍해! 나는 도무지 지겨워서 그런 일은 못 할꺼야!' 그러면서 시계추는 한숨을 쉬었습니다. 시계주인은 시계추의 한숨소리를 듣고서 시계추의 마음을 헤아렸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위로해 주었습니다.
"시계추야, 너무 끔찍하게 생각하지 말아라. 내가 네게 한 가지만 물어보겠다. 할 수 있는지 한번 대답해 보아라. 네가 움직일 때마다 그저 딱 한 번씩만 똑딱거리는 소리를 내 줄 수 있겠느냐?" 시계추는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시계주인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물론, 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자 시계 주인은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래, 네가 하는 일은 그것만 하면 돼. 그러면 너의 일로 인해서 시계 전체가 언제나 활기차게 움직일 수 있을 거야."
그래서 그 때부터 시계추는 괘종시계에 달려서 움직일 때마다 딱 한 번씩만 똑딱거리는 소리를 내었습니다. 시계추의 똑딱거리는 소리에 시계 전체는 언제나 활기차게 움직일 수가 있었습니다. 시계추도 그 즐거움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지금도 변함없이 자기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해서 충성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괜스레 이것저것 생각하면서 지레 짐작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은사를 주셨든지 간에, 맡은바 소임에 충실하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의 하는 일로 인해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전체가 언제나 활기차게 움직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맡은 소임에 충실하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어딘가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떠한 은사를 주셨든지 받은바 은사대로 각자가 맡은 소임에 충성을 다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은사의 섬길 때에 제 기능을 발휘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것은 우리 자신의 유익을 도모하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 은사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기라는 것입니다. 다른 지체들을 섬기라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일곱 가지 은사들을 살펴보면 다 섬기는 것입니다. 예언은 말씀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섬기는 일이야 말할 것도 없습니다. 가르치는 일도, 권위하는 일도, 구제하는 일도, 다스리는 일도, 긍휼을 베푸는 일도 궁극적으로는 모두 다른 지체들을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어느 농가 집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그 농가의 주인이 칠순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잔치를 며칠 앞두고서 집안에 있는 모든 동물들이 모여 회의를 했습니다. 주인의 잔칫상에 올라갈 동물을 뽑기 위함이었습니다. 순교할 동물은 과연 누구인가? 그것이 그 날의 의제였습니다. 의장 동물이 먼저 개에게 물었습니다. "얘, 멍멍아! 요즈음 들어서 주인의 기력이 몹시도 쇠하여진 것 같은데, 네가 주인의 보신을 위해서라도 탕으로 올라가 주면 어떻겠느냐?" 그 소리를 듣고 개가 가만히 생각하더니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내가 주인을 위해서 희생을 하는 것은 좋은데, 내가 없으면 누가 이 집의 재산을 지켜 주겠니? 주인을 도둑으로부터 보호해 줄자가 누구겠어? 그러니 내가 없으면 안 될 것 같아." 의장 동물은 개의 말을 듣고 일리가 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닭에게 의향을 물어보았습니다. "얘, 닭아! 네가 삼계탕으로 주인을 좀 대접해 드리면 어떻겠느냐?" 그러자 닭이 말도 안 된다는 듯이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무슨 소리야? 내가 없으면 누가 매일 알을 낳아서 주인의 영양을 보충해 줄 수 있겠어? 그리고 내가 없으면 누가 주인에게 일어날 시간을 가르쳐 줄 수가 있겠어? 나는 안 돼!" 어쩔 수 없이 의장 동물이 이번에는 소를 향해서 말했습니다. "얘, 소야! 아무래도 네가 갈비로 주인을 대접해 드려야 하겠다. 그래도 잔칫상에는 소고기가 제일이지 않느냐?"그러자 소도 역시 변명을 들어놓았습니다. "내가 없어봐. 이 집의 이 많은 농사를 누가 짓겠어? 나는 안 돼!"
다른 동물들 역시 다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저런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희생을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남은 동물은 돼지밖에 없었습니다.
의장 동물은 마지막으로 돼지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얘, 돼지야! 네가 삼겹살로 주인을 대접해 드리면 어떻겠느냐?"
그러자 돼지가 가만히 생각하더니 비장한 각오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꿀꿀, 알겠다. 죽을 놈은 나밖에 없네. 알았으니까 가마솥에 물이나 끓여라." 그리곤 물이 끓자 옆에 있던 닭을 집어 던져 넣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모습을 어떠합니까? 우리도 이런 저런 변명을 늘어놓으며 섬김의 자리를 피하려고 들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것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물론 자신을 희생하는 일, 섬기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칭찬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상급이 있을 것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은사와 관련해서 세 가지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첫째로, 은사의 다양성입니다. 은사는 모두 다르게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둘째로, 은사의 소중성입니다. 은사는 소홀히 여길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 똑같이 소중합니다. 셋째로, 은사의 섬김성입니다. 은사는 우리 자신의 유익을 도모하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언젠가 우리는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하나님 앞에 서야합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사람처럼 은사를 소홀히 여기지 마십시다.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책망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은사를 주셨든지 간에, 받은바 은사대로 맡은 소임에 충성합시다. 그리해서 하나님 앞에 서는 날 "착하고 충성 된 종"이라는 칭찬을 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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