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하나님의 뜻을 아는 원리는 바로 세상과 거룩한 구별됨의 삶입니다.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여기서 말하는 세대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풍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세속의 가치관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가치관의 특징은 내가 주인입니다. 내가 왕입니다. 어떤 사물이 아니라 생각의 경향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경향의 기본 골격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합니다. 그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육신의 정욕은 몸이 시키는 대로 편하고 향락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안목의정욕은 보이는 대로 다 가지고 싶고 다 취하고 싶은 것 그것을 위해서 동분서주하며 애달파하고 좌절하고 고민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모두가 자기 자랑입니다. 모이면 자식 자랑이요 집자 랑이고, 남편자랑 아내자랑 삼척동자 자랑, 아는 척, 있는 척, 잘난 척 전부가 자랑인 이런 세상 속에서 사는 그 모습을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고의 필터를 설치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적인 가치관이며 물질관이고 윤리관입니다. 이러한 가치관을 가져야 이러한 것에 대한 유혹이 와도 걸러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지배해서 그 속에 샌드위치가 돼서는 안 됩니다. 세속적이 가치관이 얼마나 우리에게 알게 모르게 강요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특히 TV를 보면 그렇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전화하기를 내가 당신 집에; 가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정말 눈으로 생생하게 볼 수 있도록 간음 장면, 강도, 살인 폭력 등에 관한 얘기를 들려 드리겠다면 여러분은 펄쩍 뛸 것입니다. 그러나 TV에서는 매일 아마도 10분에 한 번씩 이러한 장면들이 나옵니다.
그렇다고 TV를 끊고 살수는 없고 아이들에게도 TV를 보지 못하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바로 성경적인 가치관을 필터로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 완전히 차단할 수는 없어도 이러한 필터를 우리의 심령 가운데 두면~우리는 영향을 최소화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은둔을 하면서 살수도 없습니다. 고립은 우리의 가치관이 아닙니다. 예전에 이런 가치관이 높이 숭배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생긴 것이 수도원이고 광야의 고행입니다.
지금도 어느 교단에서는 TV를 보지 않습니다. 물론 영화나 어떤 세속적인 오락도 안합니다. 그들의 눈에 우리가 타락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그들은 수도원의 수도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가 문화의 번화자가 되시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세상을 따라가는 그런 성도가 되라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라는 대로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되 세상에 속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평생을 바다에서 살아온 동태를 보세요. 그냥 잡아서 먹으면 너무 싱겁지 않습니까? 우리 생각에는 평생을 소금물 속에서 살았으니까 간이 짭짤하게 배여야 하는데 먹어보면 너무 싱겁단 말이죠. 바로 이러한 원리로 살라는 것입니다. 죄악 된 세상에 살지만 우리의 삶속에는 이러한 세속의 원리가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구분을 의미입니다.
‘본받다’라는 단어는 영어에 Scheme, schizo 의 어원입니다. 끊임없이 가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옥을 원어로는 스올 이라고 말합니다. 그 뜻도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요구하다의 뜻입니다. 받기만 하려고 끈임 없이 요구만 하는 곳. 마찬가지로 이 ‘본받다’라는 단어는 당시에 연극배우가 마치 연극을 하듯이 그때는 마스크를 쓰면서 여러 역할을 했는데 이 마스크에서 저 마스크로 끊임없이 마스크를 바꾸면서 역할을 하듯이 세상에 맞추기 위해서 자신을 매일 바꾸며 허덕이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본받는 한 우리 자신의 진실 된 모습은 없어집니다. 허구만 남을 뿐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거룩한 구별된 삶을 살 때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바로 변화해야 하는 것입니다.
(롬 12:2)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변화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오는 변화를 말합니다. 누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합니까? 네 바로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지난 로마서 8장 강해에서 변화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변화할 수 있는 근거 3가지 첫째는 새로운 속성이 내안에 있기 때문인데 이 새로운 속성으로 우리는 생각을 다르게 할 수 있고 생각을 바꾸면 모습도 달라지며, 두 번째는 우리를 다스리는 매니저가 바로 성령님이시고 세 번째는 바로 하나님이 아버지 되기시 때문에 우리는 변화 할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우리의 인성이 3-4살이면 벌써 정착이 되어서 변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역사 하시면 달라집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우리를 과거에 가두어 두시지를 않고 풀어 자유케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과거 속에는 상처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무시하고, 배신당하고 배신했던 잘못된 기억들 하나님은 우리를 고치십니다. 마치 애벌레처럼 이리저리 기어 다니던 저급한 우리를 하나님은 찬란한 빛을 가진 나비처럼 창공을 훨훨 날도록 변화시키신 것입니다.
(요일 3: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성경은 밝히 말씀합니다. 언젠가 우리는 주님을 볼 것이라고 주님이 재림 하시면 그때 살아 있는 자는 살아서 볼 것이고 우리가 죽었더라도 바로 그 순간 홀연히 번화해서 주님과 같은 영화로운 몸을 입을 것이라고 이것이 완전한 변화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헌신하고 세상을 향해서 구별되며 변화를 향해서 몸부림친다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선합니다. 그리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그리고 온전하신 뜻 을 우리는 추구해야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말은 아라비아 말이라고 합니다. 이 말의 종자가 어떻게 만들어 졌나 하며는 모하메드라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말의 종자를 기르기로 결심하고는 온 세상을 다 돌아다니면서 우수한 암 말을 사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 말들을 높은 산봉우리에 있는 목장에서 길렀습니다. 그 바로 밑에는 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말들은 보고 냄새만 맡지 물은 마실 수 없게 해놓았습니다. 그는 말들로 하여금 갈증으로 심한 고통을 받아 거칠게 될 때가지 기다렸습니다.
그리곤 때가 되자 문을 열어주고 물가로 가게 했습니다. 말들이 미친 듯이 물가로 달려가는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그런데 이 말들이 뛰어나간 직후에 모하메드는 나팔을 힘껏 불었습니다. 이것은 말들에게 돌아오라는 신호입니다. 거의 말들이 돌아오라는 나팔 소리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뛰어 갑니다. 그러나 그중 네 마리의 말만이 자리에 멈추어 서서 다음 지시를 기다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는 바로 그 네 마리의 말들을 종자로 해서 아라비아 말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누가 주님이 쓰시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달려가던 길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멈춰 서서 다음 지시를 기다리는 사람일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다 이런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헌신된 자들이고 구별된 자들이며 변화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서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여기서 말하는 세대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풍조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세속의 가치관을 말하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가치관의 특징은 내가 주인입니다. 내가 왕입니다. 어떤 사물이 아니라 생각의 경향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경향의 기본 골격은 예나 지금이나 동일합니다. 그것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입니다. 육신의 정욕은 몸이 시키는 대로 편하고 향락적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안목의정욕은 보이는 대로 다 가지고 싶고 다 취하고 싶은 것 그것을 위해서 동분서주하며 애달파하고 좌절하고 고민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모두가 자기 자랑입니다. 모이면 자식 자랑이요 집자 랑이고, 남편자랑 아내자랑 삼척동자 자랑, 아는 척, 있는 척, 잘난 척 전부가 자랑인 이런 세상 속에서 사는 그 모습을 본받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고의 필터를 설치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적인 가치관이며 물질관이고 윤리관입니다. 이러한 가치관을 가져야 이러한 것에 대한 유혹이 와도 걸러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지배해서 그 속에 샌드위치가 돼서는 안 됩니다. 세속적이 가치관이 얼마나 우리에게 알게 모르게 강요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특히 TV를 보면 그렇습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전화하기를 내가 당신 집에; 가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정말 눈으로 생생하게 볼 수 있도록 간음 장면, 강도, 살인 폭력 등에 관한 얘기를 들려 드리겠다면 여러분은 펄쩍 뛸 것입니다. 그러나 TV에서는 매일 아마도 10분에 한 번씩 이러한 장면들이 나옵니다.
그렇다고 TV를 끊고 살수는 없고 아이들에게도 TV를 보지 못하게 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바로 성경적인 가치관을 필터로 사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 완전히 차단할 수는 없어도 이러한 필터를 우리의 심령 가운데 두면~우리는 영향을 최소화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은둔을 하면서 살수도 없습니다. 고립은 우리의 가치관이 아닙니다. 예전에 이런 가치관이 높이 숭배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그래서 생긴 것이 수도원이고 광야의 고행입니다.
지금도 어느 교단에서는 TV를 보지 않습니다. 물론 영화나 어떤 세속적인 오락도 안합니다. 그들의 눈에 우리가 타락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그들은 수도원의 수도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가 문화의 번화자가 되시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세상을 따라가는 그런 성도가 되라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라는 대로 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되 세상에 속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평생을 바다에서 살아온 동태를 보세요. 그냥 잡아서 먹으면 너무 싱겁지 않습니까? 우리 생각에는 평생을 소금물 속에서 살았으니까 간이 짭짤하게 배여야 하는데 먹어보면 너무 싱겁단 말이죠. 바로 이러한 원리로 살라는 것입니다. 죄악 된 세상에 살지만 우리의 삶속에는 이러한 세속의 원리가 지배하지 못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성경적인 구분을 의미입니다.
‘본받다’라는 단어는 영어에 Scheme, schizo 의 어원입니다. 끊임없이 가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옥을 원어로는 스올 이라고 말합니다. 그 뜻도 마찬가지로 끊임없이 요구하다의 뜻입니다. 받기만 하려고 끈임 없이 요구만 하는 곳. 마찬가지로 이 ‘본받다’라는 단어는 당시에 연극배우가 마치 연극을 하듯이 그때는 마스크를 쓰면서 여러 역할을 했는데 이 마스크에서 저 마스크로 끊임없이 마스크를 바꾸면서 역할을 하듯이 세상에 맞추기 위해서 자신을 매일 바꾸며 허덕이는 모습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본받는 한 우리 자신의 진실 된 모습은 없어집니다. 허구만 남을 뿐입니다. 우리는 세상과 거룩한 구별된 삶을 살 때에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바로 변화해야 하는 것입니다.
(롬 12:2)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변화는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오는 변화를 말합니다. 누가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합니까? 네 바로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지난 로마서 8장 강해에서 변화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변화할 수 있는 근거 3가지 첫째는 새로운 속성이 내안에 있기 때문인데 이 새로운 속성으로 우리는 생각을 다르게 할 수 있고 생각을 바꾸면 모습도 달라지며, 두 번째는 우리를 다스리는 매니저가 바로 성령님이시고 세 번째는 바로 하나님이 아버지 되기시 때문에 우리는 변화 할 수 있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심리학자들은 우리의 인성이 3-4살이면 벌써 정착이 되어서 변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역사 하시면 달라집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우리를 과거에 가두어 두시지를 않고 풀어 자유케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과거 속에는 상처가 있습니다.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무시하고, 배신당하고 배신했던 잘못된 기억들 하나님은 우리를 고치십니다. 마치 애벌레처럼 이리저리 기어 다니던 저급한 우리를 하나님은 찬란한 빛을 가진 나비처럼 창공을 훨훨 날도록 변화시키신 것입니다.
(요일 3: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성경은 밝히 말씀합니다. 언젠가 우리는 주님을 볼 것이라고 주님이 재림 하시면 그때 살아 있는 자는 살아서 볼 것이고 우리가 죽었더라도 바로 그 순간 홀연히 번화해서 주님과 같은 영화로운 몸을 입을 것이라고 이것이 완전한 변화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헌신하고 세상을 향해서 구별되며 변화를 향해서 몸부림친다면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뜻은 선합니다. 그리고 기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그리고 온전하신 뜻 을 우리는 추구해야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말은 아라비아 말이라고 합니다. 이 말의 종자가 어떻게 만들어 졌나 하며는 모하메드라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말의 종자를 기르기로 결심하고는 온 세상을 다 돌아다니면서 우수한 암 말을 사 모았습니다. 그리고 그 말들을 높은 산봉우리에 있는 목장에서 길렀습니다. 그 바로 밑에는 물이 흐르고 있었지만 말들은 보고 냄새만 맡지 물은 마실 수 없게 해놓았습니다. 그는 말들로 하여금 갈증으로 심한 고통을 받아 거칠게 될 때가지 기다렸습니다.
그리곤 때가 되자 문을 열어주고 물가로 가게 했습니다. 말들이 미친 듯이 물가로 달려가는 모습을 상상해보세요. 그런데 이 말들이 뛰어나간 직후에 모하메드는 나팔을 힘껏 불었습니다. 이것은 말들에게 돌아오라는 신호입니다. 거의 말들이 돌아오라는 나팔 소리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뛰어 갑니다. 그러나 그중 네 마리의 말만이 자리에 멈추어 서서 다음 지시를 기다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는 바로 그 네 마리의 말들을 종자로 해서 아라비아 말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누가 주님이 쓰시는 사람이 되겠습니까? 달려가던 길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멈춰 서서 다음 지시를 기다리는 사람일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다 이런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헌신된 자들이고 구별된 자들이며 변화 받은 자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서 지금도 일하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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