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비를 잘하는 것은 성격일까? 아니면 의지일까?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 준비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을까마는 사람마다 준비하는 방법이나 태도는 저마다 다르다. 우리 모두도 일의 결과가 잘못 나오면 ‘좀더 철저히 준비할 것을...’하는 후회를 하면서도 마음먹은 대로 잘 되지 않는 것이 준비성이다. 살면서 제대로 준비하지 않아 낭패를 보게 되면 ‘준비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된다. 언제나 철저한 준비로 소문난 김호식 목사님(예닮교회 공로목사)밑에서 함께 배운 동료 목사의 칠순찬하 회고글을 읽은 적이 있다.

“(전략) 한번은 교인 중에 첫 아기를 임신한 젊은 부인이 갑자기 암 선고를 받고 수술을 하게 되었다. 온 교인들의 충격과 안타까움은 이만 저만이 아니어서 많은 교인들이 병상으로 달려와 수술 직전에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적절한 성경도 읽었고, 간단한 설교와 온 교우들의 한마음으로 드리는 기도 모두가 간절한 분위기에서 진행되었다. 예배 끝에 그 분위기를 모아 기도하는 마음으로 ‘예수가 거느리시니’라는 찬송을 불렀다. ‘예수가 거느리시니 즐겁고 평안하구나 주야에 자고 깨는 것 예수가 거느리시네(1절)’ ‘주 날 항상 돌보시고 날 친히 거느리시네…’ (후렴) ‘때때로 괴롬 당하면 때때로 기쁨누리네 풍파 중에 거느리고 평안할 때 거느리네(2절)’

이 얼마나 은혜가 넘치는 가사인가? 모두 몰두해서 찬송을 부르는데 갑자기 3절에 넘어가서 약간 민망한 가사가 나오기 시작한다. ‘내 주의 손을 붙잡고 천국에 올라 가겠네…’ 아뿔싸, 지금 목숨이 경각에 달린 사람의 수술을 앞두고 천국에 올라가겠다는 것은 아닌데,,, 앞으로 먼 장래의 일이면 몰라도 지금 당장은 안 된다. 그런데 4절로 넘어가니 사태는 더욱 심각해진다. ‘이 세상 이별 할 때에 지옥의 권세 이기네 천국에 있을 때에도 예수가 거느리시네’

숫자부터가 444장, 좀 거슬리는 숫자였지만 그 앞부분에 그렇게 은혜가 넘치는 가사가 후반부에 이렇게 변절을 할 줄이야!?? 그러나 어떡하랴? 부르던 찬송을 도중에 멈출 수는 없고, 모두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찬송을 부르는데 3절과 4절에 가서는 우렁차던 찬송소리가 갑자기 쭈뼛쭈뼛해지며 개미소리만 해졌다. 그냥 앞부분 가사만 보고 찬송을 고른 것이 이렇게 분위기를 망칠 줄이야? 그 가족들에게 그렇게 미안할 수가 없었다. 목사님께서 평소에 하시던 말씀이 생생하게 가슴을 파고 들었다. ‘듬성 듬성이’인 나의 이 진땀나는 경험 이후로 목사님의 자상하심과 빈틈없이 준비하시는 모습을 더더욱 우러러 뵙게 되었다(후략).” 환자에게 ‘희망’이라는 중요한 목표를 준비가 제대로 넘질 못한 결과였다.

어쩌면, 우리네 인생도 준비의 연속이 아닐까 싶다. 짧게는 내일의 약속을 준비하며 길게는 영원을 준비하며 산다. 물론 이것은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국가에도 미래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고 교회도 마찬가지다. 현재 우리 한국민에게는 평화와 복음 안에서의 철저한 통일 준비가 필요하다. 이 일은 우리 모두가 ‘목표를 따라잡는 준비’없이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만약 준비도 안된 상태에서 어느 날 인위적으로 통일이 된다면 큰 혼란이 올 것이다. 또한 온전한 준비 없이 하면 ‘퍼주기’가 되고, 더운 햇볕에도 모자를 벗지 않고 고마움도 모르는 ‘교활한 자’에 농락당하는 꼴이 될 것이다. 그래서 준비하는 사람이 누구냐가 중요하다(마태 25장의 지혜로운 다섯 처녀의 비유를 보면 등잔의 기름은 하나님께서 목표하시는 구체적인 준비행위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 민족에게 주신 오랜 “목표(한 민족복음화를 통한 세계선교)를 따라 잡을 준비”를 할 이들을 꾸준히 찾고 있는 중이다. 과연 우리는 진정 통일을 바라고 있으며 올바로 준비하고 있는가? 이러쿵 저러쿵 말들은 많은데, 구체적인 준비는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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