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위를 보면 누려야할 자유를 누리는 자유인들로 넘쳐나고 있습니다. 옷을 입는 것과 행동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까지 정도이상의 자유를 누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자유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도 속을 들여다보면 사실은 실패와 두려움, 불안과 죄의식, 사회적인 압력으로 인하여 눌려서 사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이런 눌림이 우울증으로 연결되기도 합니다. 없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다 있는 것 같은데 허전하고 텅 빈 느낌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성경에 나오는 삭개오 입니다. 그는 돈도 벌었습니다. 세리장이니 출세도 했습니다. 그런데 로마의 앞잡이라는 사회적 배척이 그를 누르고 있었습니다. 이런 우울한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밝은 사람으로 변화가 됩니다. 무엇이 그를 밝음으로 변화시켰는가? 입니다.
자신의 삶의 자리를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삭개오는 지나가는 예수님을 보고자 뽕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키가 작아서나? 사람이 많아서가?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노출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삭개오는 다른 사람들과의 목적과 의미가 있는 관계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사람들과 떨어진 자리만 찾아 다녔습니다. 이런 삭개오에게 예수님께서는 “나무에서 속히 내려오라, 오늘 내가 네 집에 유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눌린 사람은 자기는 드러내지 않고 남만 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엿보기 심리가 주를 이룹니다. 항상 뒷자리를 좋아합니다. 들키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에 집중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에게 앞에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삶의 자리”를 바꾸라고 말씀하십니다. 삶의 자리를 바꾸어 앞자리로 가야합니다.
주님 주신 영광을 내 그릇에 담았기 때문입니다. 삭개오는 참으로 보잘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영광스런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들어가시자 삭개오의 집에 영광이 가득했습니다. 말단 직원이라도 그 집에 회장님이 머무르면 회장님의 영광이 임하듯이. 보잘 것 없는 자라 할지라도 예수님을 마음의 그릇에 담으면 영광스런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영광은 내가 내 안의 것을 개발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광은 모시는 것이요 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의 허락도 없이, 남의 이름을 도용해서 명예를 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합법적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살도록 허락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주어진 권리도 행사하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주어진 영광으로 일하는 법과 주어진 권위를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합니다.
예수님께 인정을 받았기 때문 입니다. 삭개오는 주님의 말씀에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했다.” 했습니다. 예수님께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집에 유숙하겠다고 했습니다. 교제 권을 인정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삭개오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다 해도 양심의 자유가 없으면 어두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조롱하고 공격한다 해도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떳떳한 양심의 자유가 있으면 밝아집니다.
우리는 숨은 죄와 양심과 충돌하는 것은 없는가를 살펴야합니다. 회개하고 예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면 밝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성도가 될 것입니다. 영혼이 웃는 밝은 모습을 자주 보아야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눌림이 우울증으로 연결되기도 합니다. 없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은 다 있는 것 같은데 허전하고 텅 빈 느낌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성경에 나오는 삭개오 입니다. 그는 돈도 벌었습니다. 세리장이니 출세도 했습니다. 그런데 로마의 앞잡이라는 사회적 배척이 그를 누르고 있었습니다. 이런 우울한 삭개오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밝은 사람으로 변화가 됩니다. 무엇이 그를 밝음으로 변화시켰는가? 입니다.
자신의 삶의 자리를 바꾸었기 때문입니다. 삭개오는 지나가는 예수님을 보고자 뽕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키가 작아서나? 사람이 많아서가? 아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노출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삭개오는 다른 사람들과의 목적과 의미가 있는 관계를 맺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사람들과 떨어진 자리만 찾아 다녔습니다. 이런 삭개오에게 예수님께서는 “나무에서 속히 내려오라, 오늘 내가 네 집에 유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눌린 사람은 자기는 드러내지 않고 남만 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엿보기 심리가 주를 이룹니다. 항상 뒷자리를 좋아합니다. 들키지 않는 행동을 하는 것에 집중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사람에게 앞에 나오라고 말씀하십니다. “삶의 자리”를 바꾸라고 말씀하십니다. 삶의 자리를 바꾸어 앞자리로 가야합니다.
주님 주신 영광을 내 그릇에 담았기 때문입니다. 삭개오는 참으로 보잘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영광스런 예수님께서 자기 집에 들어가시자 삭개오의 집에 영광이 가득했습니다. 말단 직원이라도 그 집에 회장님이 머무르면 회장님의 영광이 임하듯이. 보잘 것 없는 자라 할지라도 예수님을 마음의 그릇에 담으면 영광스런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영광은 내가 내 안의 것을 개발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광은 모시는 것이요 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남의 허락도 없이, 남의 이름을 도용해서 명예를 누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합법적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살도록 허락을 받은 존재들입니다. 그러므로 주어진 권리도 행사하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음입니다. 주어진 영광으로 일하는 법과 주어진 권위를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합니다.
예수님께 인정을 받았기 때문 입니다. 삭개오는 주님의 말씀에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했다.” 했습니다. 예수님께 인정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집에 유숙하겠다고 했습니다. 교제 권을 인정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삭개오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인정해 주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다 해도 양심의 자유가 없으면 어두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조롱하고 공격한다 해도 하나님 앞에서 인정받는 떳떳한 양심의 자유가 있으면 밝아집니다.
우리는 숨은 죄와 양심과 충돌하는 것은 없는가를 살펴야합니다. 회개하고 예수님께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면 밝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성도가 될 것입니다. 영혼이 웃는 밝은 모습을 자주 보아야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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