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본지에 보도된 바 있는 ‘무신론 버스 광고’ 논란과 관련, 성결대학교 배본철 교수가 특별기고를 보내왔다. 그가 글에서 비판하고 있는 ‘무신론 버스 광고’는 주로 인터넷 상에서 반기독교 운동을 벌이는 반기독교시민운동연합이 5일부터 서울 시내 버스에 싣기로 한 것. 여기에는 물리학자인 앨버트 아인슈타인 박사의 말이 인용되고 있는데, 배 교수는 “이 문구는 원 저자인 아인슈타인의 저술 동기하고도 거리가 먼, 문맥과는 상관없는 ‘자의적’(自意的) 해석”이라고 일축했다. 다음은 배 교수의 기고 전문.


▲ 배본철 교수(성결대학교)
특정 종교를 반대하는 모임들이 주축이 되어 서울 시내 버스 광고에 무신론적 홍보를 시작했다. 그 문구는 “나는 자신의 창조물을 심판한다는 신을 상상할 수가 없다”라고 하면서 엘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의 글을 인용한 것으로 표현하였다. 나는 이 홍보의 동기나 목적은 차치하고라도, 우선 이 문구가 서울 시내에 돌아다닐 때 한국인이 지닌 영어 문장에 대한 이해가 이처럼 저급하다는 점에 대해 온 세상 앞에 드러내는 격이 될까 매우 우려가 된다. 이것은 영문의 직역도 아니고 그렇다고 본래 의미를 충분히 살려낸 의역도 아니다.

왜냐하면 함께 사용된 영문은 ‘I cannot conceive of a God who rewards and punishes his creatures’이기 때문이다. ‘rewards and punishes’를 어떻게 ‘심판한다’는 말로 번역할 수 있는가? 더군다나 우리 말에서 ‘심판’이라는 말의 어감은 ‘rewards’의 편보다는 ‘punishes’에 비중이 쏠려 있다는 점이다. 누구도 심판이라는 말을 대할 때 밝고 긍정적인 이미지를 받을 한국인은 없을 것이다. 아무리 특정 종교나 유신론적 체계를 부정하기 위해 홍보를 한다손 치더라도 좀 상식에 맞는 근거와 자료를 사용해야 할 것이 아닌가? 더군다나 아인슈타인이 이런 말을 했다면 어떤 배경 하에서 이런 말을 했는지 과연 이해나 하고서 이런 문구를 인용하는지 정말 안타깝다.

그저 홍보 목적 달성에만 급급한 나머지 대중들의 반감을 끌어 모으기에만 헐떡거리는 이들의 모습이 세계인들 앞에 또 하나의 못난 한국인(ugly Korean)의 모습으로 비칠까 우려가 된다. 문맥상 진의를 표현하는 것은 고사하고 지금이라도 인용된 단 한 문장만큼이라도 올바르게 번역을 해 주었으면 한다.

그리고 아인슈타인에 대해서도 그렇다. 아인슈타인은 누구나 아는 바와 같이 인류사에 기억될 위대한 물리학자이다. 그의 신앙의 핵심은 물리학의 신비 속에서 발견되는 우주적 법칙에 대한 경외감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는 이런 점에서 볼 때 자신을 깊은 신앙의 사람이라고 스스로 표현했다.

It is this knowledge and this emotion that constitute the truly religious attitude. in this sense, and in this alone, I am a deeply religious man.

물론 우리가 말하는 복음적 신앙과 그의 신앙과는 많은 차이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는 자기 나름대로의 신앙을 표현한 것이기에 우리는 그의 신앙을 따르지는 않는다 할지라도 그대로를 존중해 줄 수는 있어야 하겠다.

그런데 항상 진의에 대한 오해와 문제는 원 저자들보다는 후대의 해석자들이 일으키는 것 같다. 아인슈타인이 자신의 세계관과 윤리 그리고 자신의 내면 활동에 대해서 표현한 글이 어떻게 저자의 동기와는 관계도 없는 방향으로 재해석될 수 있을까? 아인슈타인의 ‘The World As I See It’의 원문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문제의 글귀는 기독교를 폄하하거나 반대하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지닌 물리학적 개념의 신론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1954년에 아인슈타인이 한 철학자에게 자신의 무신론적 견해를 밝혔다고 하는 편지 한 통이 갑자기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편지 한 통만으로 그의 전 생애에 걸친 사상의 흐름을 뒤엎을 수는 없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신앙이 어떤 구조를 지닌 것인지는 이미 서양철학사를 통해 잘 소개된 바 있다. 더군다나 필자에게는 이 편지의 내용조차도 철저한 무신론적 경향보다는 오히려 쉴라이엘마허(Schleiermacher)의 절대의존감정(absolute dependance feeling)으로서의 신론에 더 가까운, 말하자면 냉랭한 무신론보다는 오히려 더욱 낭만적인 자유주의적 신론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어떻게 원 저자의 저술 의도와는 연관도 안 되는 반기독교적 운동에, 그것도 전체 문장에서 단 한 구절을 뽑아 문맥과는 연관 없이 부적절하게 번역할 수 있을까?

나의 요지는 다음 두 가지다.

첫째, 이 문구는 번역이 적절하지 못하기에 사람들에게 기독교에 대한 숱한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유해한 것이다.

둘째, 이 문구는 원 저자인 아인슈타인의 저술 동기와 거리가 먼, 문맥과 상관없는 ‘자의적(自意的)’ 해석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홍보의 방법이나 내용은 하루 속히 근절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배본철(성결대학교 교회사 교수, 성령운동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