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미소에서 희망을 발견한다. ⓒ조항석 목사 | |
뉴저지에 위치한 늘푸른장로교회 조항석 담임 목사는 지난 2년간 후원해오던 아이티에서 지난달 12일 지진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14일 오전 6시 비행기로 도미니카 공화국 산토도밍고로 향했다.
산토도밍고에서 조항석 목사는 한국기독교연합봉사단(대표 조현삼 목사)와 아이티 선교사 박병준 선교사팀과 합류해 15일 밤 아이티 포토 프랭스에 도착해 16일, 17일 구호품을 전달했다. 이어 조 목사는 18일 불안한 치안 문제로 일찍 아이티를 떠나 도미니카공화국에 밤 늦게 도착해 19일 저녁 뉴저지로 돌아왔다.
조항석 목사가 시무하는 뉴저지 늘푸른장로교회는 2년 전부터 아이티 미션 유에스에이(대표 장기수 목사)을 통해 아이티를 소개받아 현지 고아원 세 곳을 기도하며 돕고 있었다.
조 목사는 "아이티에 지진이 났다는데 연락은 전혀 안되고, 고아원도 궁금하고 마음이 몹시 불편하던 터에 마침 박병준 선교사와 한국기독교연합봉사단이 들어간다고 해서 동행하게 됐다."고 전했다.
이어 조 목사는 "미션 트립은 사실 지난 가을부터 계획되어 있던 것인데 지진으로 인해 상황이 많이 달라진 가운데 다녀오게 됐다."고 말했다. 한편 조항석 목사는 오는 15일 고아원에 전달할 텐트와 구호품을 가지고 다시 아이티로 들어간다.
<조항석 목사가 현지에서 작성한 편지>
1월 16일(토)
저는 지금 아이티에서 이틀째 밤을 지내고 있습니다. 한국기독교연합봉사단과 함께 사역하고 있습니다.
엊저녁 아이티에 도착했을 때는 심각한 피해를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모든 것이 어둠 속에서 평온해 보였고, 전에 봤던 것과 별로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습니다.
신문에는 약탈, 치안부재 등의 불안한 소식뿐이었지만, 막상 와보니 그대로 괜찮았습니다. 그저 가져온 트럭 4대분의 구호품을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부지런히 풀 수 있을까가 숙제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새벽 트럭이 보관된 공단에 다시 도착해서 현실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현재 소나피 공단이 자원봉사자 등 NGO의 집합체로 쓰이고 있습니다. 소나피 공단은 아이티 정부가 담장을 크게 두르고 특별히 만든 자유무역 공단 구역으로 치안이 안전한 곳입니다. 이곳에 한국분이 하는 큰 공장도 있는데 모든 공단이 자원봉사자들로 채워져 있고, 유엔군이 지키고 응급 치료실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아침에 모여 식전에 현지를 돌아본다고 해서 오전 6시 밝아오는 해를 따라 피해 지역으로 떠났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공원이나 길거리에서 잠을 잡니다. 건물 안에 들어서는 자체를 두려워합니다. 우리 비전센터의 관리인 가족들도 모두 마당에서 잡니다. 건물이 피해를 보지 않은 동네에서도 사람들이 다 바깥에서 잡니다. 건물 자체를 두려워하는 것 같았습니다.
가장 심하게 피해를 본 지역 중의 하나라는 델마 지역의 언덕길을 올라서면서부터 주저앉은 건물들을 보았습니다. 정말 살아날 수 없었겠구나 했습니다. 삼성전자 대리점이라는 곳은 그대로 주저앉았는데 안내하시는 분(이곳 현지 선교사님)의 말씀으로는 거의 100명이 넘는 사람이 그대로 묻혔답니다. 가장 크다는 까라비안 마트 등 최고급 마트들이 그대로 주저앉은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냥 건물 하나가 무너진 곳마다 수백 명씩 매몰되어 있으리라 짐작이 되고도 남습니다.
대부분의 건물들이 잔해 제거 작업이나 구호작업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구호작업 손길도 모자랍니다. 민간이 긴급구호팀은 우리가 처음이랍니다.
처음 아이티에 들어오는 길에 피해가 10만 명 선이라는 아이티 정부의 호소에 과장이 있다고 생각했지만 오늘 저녁에는 모두들 20만 명 아닐까 하고 염려하고 있습니다. 손을 대기가 엄두가 나지 않을 듯합니다. 대통령 궁도 무너졌고, 궁 앞 광장은 이재민 천막 천지가 되었습니다.
시민들은 무덤덤합니다. 대통령이 이취임식 선서를 하는 곳이라는 대성당도 무너졌고, 그 대성당 앞길에서 그동안 사진으로만 보았던 나무 등걸처럼 버려진 시신들도 보았습니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장면들이었습니다.
그 시신들을 쌓아놓고 사람들은 아침을 짓습니다. 그 시신들은 오후에 중장비가 쓰레기 치우듯 치워갔습니다. 국립병원에서, 그리고 공동묘지에서 끊임없이 연기가 타오르며 시신들을 태우고 있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방법 밖에는 지금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1천명이 깔렸다는 종합학교(카다일 종합학교)는 밤에 건물잔해를 치우기 시작했습니다. 시신 수습은 더 이상 의미가 없어보였습니다. 아무도 그 현장에서 울부짖거나 애통해 하지 않습니다. 시민들이 평온해 보였던 것은 어쩌면 패닉상태였는지 모릅니다.
오후에 박병준 선교사님과 잠시 우리가 후원하던 빌 고아원(남자아이들 고아원)에 들렸습니다. 아이들은 여전히 맑았고, 빌 선교사는 여전히 불편해 보였지만, 전보다 약간 야위어보였습니다.
다행히 담이 한쪽으로 무너지고, 금간 것 외에는 피해가 없답니다. 하지만 물가가 오르고 식수나 식량을 구하기 어려워지면서 모든 시민들이 조금씩 조금씩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합니다.
주유소는 문을 연 곳이 전 시내에서 두 곳이랍니다. 길에서 통에 넣고 개스를 파는데 갤런당 미화 10불입니다. 박 선교사님도 그 개스를 6갤런이나 넣었습니다.
은행도 문을 닫았고, 전화도 부분적으로만 쓸 수 있는 전화들이 있답니다. 그런데도 환율은 1달러당 42굴드에서 1달러당 30굴드로 절상되었답니다.
오후에 자원봉사 캠프의 응급실을 찾아보았습니다. 전쟁이 나도 이보다 심할까 싶었습니다.
수술용 장갑이 없어 갈아 쓰지 못합니다. 대부분 문짝이나 다 헤진 매트리스에 들려온 환자들은 건물 사이의 공터에 눕혀져서 망연한 표정으로 순서를 기다렸습니다. 아우성도 없었고, 누가 소리치지도 않는데 엄청난 소음이 그 속에서 돌고 있는 듯했습니다. 말없이 누워 있는 환자나 그보다 더 비참한 몰골의 환자 가족들 사이로 절망과 체념이 파도처럼 넘실거렸습니다.
의료진들이 지쳐 쓰러지지나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로 숨 가쁜 전쟁이 그 응급실에 있었습니다. 뭐든지 모자랍니다. 주사바늘도 모자라고 장갑도 모자라고 거즈도 모자랍니다. 깁스를 해야 하는 환자들이 많은데 그냥 두꺼운 포장용 상자들을 자르고 접어서 깁스처럼 하고 있습니다. 가져간 의료용품 중 일부를 그곳 응급실에 기증했습니다.
오후 늦게 쁘종빌(피해가 난 지역의 일부로 부촌)에 있는 병원으로 또 의료용품을 전달하러 갔습니다. 경찰의 에스코트를 받고 도미니카에서 온 자원봉사단 트럭에 실었습니다. 수용할 수 없는 환자들이 더 많았습니다.
그래도 오늘 저녁에는 이곳 아이티에서 선교 사역을 하시는 선교사님이 하시는 교회(아이티 사랑의 교회)에서 한식으로 저녁식사를 하고 대충이지만 샤워도 했습니다.
내일은 주일입니다. 아침 일찍 예배를 드리면 오전 9시부터 유엔군의 경호 아래 대통령 궁 근처에서 식품 배급을 실시합니다. 물 2만병, 과자 1만개, 쌀 5톤, 생리대 5천개 등이 분배될 예정입니다. 나머지 의료용품은 아이티 보건장관대행에게 직접 전달합니다. 기증된 의료용품만 링러 1만3천 세트를 비롯해서 장갑, 주사기, 솜, 거즈 등 큰 트럭 두 대분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쟌 목사님 고아원도 박 목사님과 방문합니다. 특히 잔 목사님 고아원은 방문하여 쌀 구입 등 구호품을 전달하고, 2월 15일 비전 트립시 페인트칠 할 내용을 점검하게 됩니다. 저와 제 아내가 자주 얘기하는 비빈(아이티 소녀)이 사는 하우스 오브 홉(희망의 집)은 괜찮아 보입니다. 건물도 멀쩡하고 피해지역은 아닙니다. 시간이 되면 한 번 들려보려 합니다.
모자라는 것 투성이입니다. 살아가는 일에 필요한 모든 것이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신발도 없고 옷도 없습니다. 밥그릇도 없고 정말 아무것도 없습니다. 워낙 없었지만 이제 더 없습니다.
치안은 알려진 것처럼 불안하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1년 반 전에 왔을 때와 다름이 없습니다. 한 가지 현지에 들어와 보니 언론에 보도된 내용들이 때로는 너무 과장되거나 황당한 것들이 많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이티 얘기에 꼭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도미니카에서 이곳에 오기까지 절대적인 역할을 한 도미니카 주재 아이티 대사관의 제럴드 영사입니다.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닥터(의사)출신 외교관입니다. 흔히 보기 힘든 애국자입니다.
우리가 구입하려는 의약품 목록을 만든 사람입니다. 우리가 도미니카에서 아이티로 들어올 때 동행하고 국경을 넘을 때 모든 외교 역량을 동원하여 아무 점검 없이 트럭 네 대와 버스 등을 그냥 통과시키고 끝까지 자신의 약혼녀와 함께(금년 2월에 결혼한답니다.) 모든 분배에 함께 한 사람입니다. 길을 가다가 자기 국민이 아픈 것을 보면 꼭 한 번 더 들여다봅니다. 우리 일행이 만장일치로 다음 아이티 대통령으로 추대하자고 한 사람입니다. 헌신적으로 열정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신이 나서 우리와 함께 일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있어서 아직 아이티에 소망이 있다고 믿습니다. 그래도 길에서 만나는 천진한 아이들이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아이티는 지금 많이 아픕니다. 시민들은 신음소리를 가슴 깊이 감추고 큰 눈망울을 굴리며 여전히 길거리를 헤맵니다. 아무도 울지 않습니다. 오늘 저녁에도 여전히 모든 이들이 건물 밖에서 잠을 잡니다. 공포는 그들의 일부가 되어 어둠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더 많은 기도, 더 많은 후원, 더 많은 위로, 더 많은 도움이 필요합니다.
제 아내와 제게 허락하신 성령의 감동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곳에 온 것이 참으로 잘 한 일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제가 이곳에 와서 작지만 사랑을 품고 기도하며 도울 수 있도록 제 자리를 감당해준 아내와 가족, 그리고 교회의 모든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긴급 구호활동이어서 곧 돌아가겠지만, 지진을 겪은 사람들이 트라우마에 시달린다는데 나도 이곳의 일들이 오래도록 가슴을 누를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래 오래 감사하며 살려고 합니다.
돌아가서 뵙겠습니다.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도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풍성하신 은혜를 누리시기 원합니다. 이 메일을 쓰는 동안 벌써 밤 12시가 되었습니다. 좋은 주일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이티에서 조항석 목사 드림
1월 18일(월)
어젯밤 11시 40분경 박 선교사님이 잠든 저를 깨웠습니다. 지진이 느껴진다는 것이었습니다. 부스스 일어나 아래층으로 내려가 보니 일간지 특파원 다섯 사람은 아직도 기사 작성 중이었습니다. 저는 잘 모르겠는데 여러 사람이 진동이 느껴진다고 하였습니다. 서둘러 짐들을 챙기고 비전센터의 마당으로 나갔습니다. 전기도 없어 깜깜한 마당에는 벌써 관리인의 가족들이 잠들어 있었습니다. 마당의 빈자리로 노트북을 든 기자들과 나왔습니다. 마당에 작은 매트를 깔고 간신히 눈을 붙인 것이 오전 1시쯤이었습니다. 아이티의 1월 밤바람은 차가웠습니다. 머리 위에는 거의 5분 간격으로 항공기와 헬기가 번갈아 날았습니다. 비전센터는 공항과 유엔본부 바로 근처입니다.
어제 오후 시간이 나서 들린 House of Hope의 여자 아이들은 잡초로 덮인 폐허 위에 잠자리를 정하고 있었습니다. 원래 고아원 건물에 금이 가서 아예 들어가지 않고, 식사도 날라다 했습니다. 모든 시간을 그 잡초 더미의 폐허 위에서 지내고 비닐로 얼기설기 엮은 더럽고 불결한 잠자리에서 잠을 잡니다.
제가 무척 보고 싶어 했던 아이 비빈은 미국으로 입양이 되었답니다. 한편으로 참 잘 되었다 싶으면서도 서운했습니다. 그때 강력히 주장해서 입양을 확 해버릴걸 하면서 잠깐 후회했습니다. 돌아서려는데 벌거벗은 아이들의 흙투성이 발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지진에 대한 두려움으로 누웠던 잠자리에서 오전 3시가 좀 넘어 너무 추워서 깼습니다. 아이티가 춥다니.... 깨보니 기자들과 조현삼 목사님이 실내에서 컵라면에 물을 붓고 있었습니다. 그 와중에도 먹을 복이 넘치다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기도가 절로 됐습니다. 전기가 나간 센터에서 촛불을 켜고 아이티의 이런 저런 상황을 이야기 하면서 조금씩 불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길거리의 사람들 숫자가 자꾸 늘어나고 있었습니다. 창고로 쓰고 있는 소나피 공단은 유엔군이 지키는데 그 안에서는 봉사자들을 위한 무료배식이 실시되고 있습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아이티인들이 공단 정문 앞에 모여 있는데 그 숫자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습니다. 시간마다 달라지는 숫자를 보고 모두들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곧 폭동이 날거라는 소문도 꼬리를 물고 들려왔습니다. 식량 공급이 전혀 되지 않고 있습니다. 먹을 것이 없습니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사람들은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어제 오전 내셔날 스타디움에서 배분하려던 구호품은 창고에서 기관별, 선교사별로 배분되었습니다. 에스코트를 담당했던 유엔군도 도망치듯 돌아갔습니다. 전달할 길이 없었습니다. 나중에 들으니 개별적으로 식량을 분배하다 여러 가지 불상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배분받은 식량을 약탈하려 칼을 휘두르고, 폭력이 벌어진답니다. 우리도 배분하려다 몰려드는 인파에 큰 사고를 염려한 바 있습니다.
오전 6시 좀 넘어서 박병준 선교사님과 쟌 목사님 고아원 (Shalom Orphanage)에 쌀과 후원헌금을 가져다주려고 출발했습니다. 거리에 사람들의 숫자는 상상이 어려울 정도로 늘어나 있었습니다. 차 문을 모두 꼭꼭 잠그고 될 수 있는 대로 서지 않기로 하고 달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시골로 떠나기 위해 남루한 보따리나 가방을 머리에 이고, 등에 지고 손에 들고 걷거나, 트럭이라도 얻어 타려고 아우성인 모습들이 두렵게 다가왔습니다.
북쪽으로 30여분을 가야한다는데 어렵겠다 싶었습니다. 15분쯤 달렸을 때 다리를 막아 놓은 곳에 도달했습니다. 갈 길이 막혔습니다. 급하게 돌아섰습니다. 고아원 방문을 포기하고 공항으로 향했습니다. 일반에게는 폐쇄된 공항에서 미국 시민권자들을 위한 특별 수송기가 떠난다는 이야기를 기자들을 통해 들어서였습니다. 고아원에 가져다주려던 쌀은 밖에서 보이지 않게 차 바닥에 깔았습니다.
차를 몰고 공항에 들어서니 긴 줄이 보였습니다. 반은 백인이고 반은 흑인이었습니다. 다 미국 여권 소지자들이었습니다. 반가운 마음에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물어보니 미국 대사관에 신고를 먼저 해야 한다는 사람도 있고, 일단 서 있다가 사인을 하고 기도해야 한다는 메노나잇 신자도 있었습니다. 화물기가 화물을 내려놓고 돌아갈 때 빈자리에 사람을 태운답니다. 자국민 소개 작전이었습니다.
따져보니 시간이나 일행, 여러 형편으로 볼 때 비행기를 기다리기 보다는 도미니카로 서둘러 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의 경우에 그래도 제일 빠른 교통편인 고속버스를 탈 수 있을까 알아보려고, 비전센터로 돌아가기 전에 먼저 터미널에 갔습니다. 7시가 좀 넘었는데 여러 사람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일단 좌석을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비전센터로 돌아왔습니다. 7시 30분쯤이었습니다.
함께 들어왔던 일간지 특파원들 중에 네 사람은 유엔 항공기 편으로 도미니카로 떠나기로 했습니다. 아침 9시 비행기랍니다. 준비를 하는 동안 도미니카에서 온 선교사님들이 세계은혜선교회 25인승 버스를 가지고 왔습니다. 이분들은 아이티 사랑의 교회(백삼숙 선교사)에서 잤습니다. 전부 서둘러 떠나기로 했습니다. 거리가 흉흉해지고 있다는데는 의견의 일치가 되었습니다.
기자들을 내려주고 아이티 사랑의 교회에서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라면과 맨 식빵으로 아침을 서둘러 마치고 나머지 일행을 태우고 떠났습니다. 우선 소나피 공단에 있는 트럭을 가지러 갔습니다. 도미니카로 가는 길의 반대편이었지만 평소대로라면 15분쯤 거리였기에 들렸다 가기로 했습니다.
공항을 지나쳐야 하는데 공항 앞에서부터 심상치 않았습니다. 모여 있는 군중들의 숫자가 평소보다 너무 많았습니다. 한 두 배 정도가 아니라 대여섯 배는 되는 듯했습니다. 차가 밀리기 시작했습니다. 버스 안에 탔던 일행들이 돌아가자는 의견과 트럭을 가지고 가야한다는 의견으로 나뉘었습니다.
그리고 아주 천천히 소나피 공단 앞에 이르렀을 때 과연 제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했습니다. 소나피 공단 입구는 이제 엊그제 보았던 인파의 열 배쯤 되는 인파가 몰려있었습니다. 일단 우리 일행 중에 도미니카에 거주하는 아이티 출신 사역자가 트럭 열쇠를 가지고 소나피 공단으로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주민들은 들여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히 한국기독교연합봉사단 조끼를 입혀 들여보냈습니다. 현지인은 안전합니다. 그리고 차는 공단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도미니카 방향을 향했습니다.
군데군데 많은 사람들이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고 몇 차례 막히기는 했지만 순조롭게 도미니카를 향했습니다.
우리 일행이 탄 버스는 낮 열두 시경에 드디어 국경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 국경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우리 탄 버스 뒤에 우리 트럭이 붙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하던지. 차가 밀려서 아주 천천히 진행했지만, 아이티 쪽에서도, 도미니카 쪽에서도 검문이나 입국 절차는 없었습니다. 완전히 도미니카에 들어선 이후 깊은 안도와 미안함과 슬픔이 밀려들었습니다.
도미니카 국경도시 히마니에서 한국 선교사님이 관계하시는 현지 고아원에 들러 점심식사를 했습니다. 떠들고 웃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걱정했습니다. 어떻게 하나. 어떻게 하나.
하나님께서는 무슨 뜻으로 우리를 이곳에 보내셨는지 모릅니다. 나도 무슨 용기와 정신으로 이곳에 왔는지 모릅니다. 지진이 나서 피해가 심하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냥 고아들이 보고 싶었고,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가서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슬픈 마음을 안고 있을 때, 박병준 선교사님이 한국기독교연합봉사단과 함께 도미니카를 경유해 아이티로 들어간다고 하시기에 무작정 따라 나선 길이었습니다. 가다보니까 한국기독교연합봉사단과 합류하였고, 도미니카의 세계은혜선교회의 도움을 받았고, 박병준 선교사님을 비롯한 아이티 주재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작지 않은 양의 의료용품과 식품을 싣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했습니다. 합력하여 선한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절실히 느끼는 시간이었습니다. 등 떠밀어 보낸 아내도 용감하였고, 마지못한 척하면서 휘파람 불며(적어도 떠날 때는 기쁜 마음이었습니다) 비행기를 탄 저도 무식했습니다. 이게 그렇게 가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얼마나 위험한지를 떠나오는 아침에 절감하면서 안도의 한숨과 함께 피식 웃음이 났습니다. 적절한 시간에 떠나올 수 있었습니다. 적절한 일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함께 하시고 지키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우리가 한 일이 참으로 작은 점 하나에 지나지 않을 지라도 하나님께서 그 씨앗을 크게 키우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점점 폭도화 되기 시작하는 시민들의 배고픔을 누군가 빨리 달래주어야 합니다. 아이티에는 지금 정부가 없습니다. 아직도 미국의 손길을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유엔군은 허약하고 아이티 경찰은 무력했습니다. 수많은 물자가 공급되어도 배분이 제대로 되지 않아 분노가 하늘을 찌를 듯합니다.
아이티는 하나님의 땅입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돌보라고 맡기신 어려운 형제인지 모릅니다.
밤 8시가 훨씬 넘어서야 도미니카 산토 도밍고의 좋은 호텔에 도착하였습니다. 오랜만에 참 좋은 고기와 생선, 그리고 아이스크림으로 저녁식사를 했습니다. 10시가 넘도록 웃고 떠들었습니다. 그러나 모두들 아이티의 어두운 그림자에서 아직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방에 돌아와 CNN을 보니 폭력이 난무하고, 의료진 문제가 집중적으로 부각되고 있었습니다. 현지의 용감한 기자의 따뜻한 마음을 만나면서 이 밤 하나님의 위로를 빌었습니다. 하나님 우리를 위로하소서. 하나님 아이티의 눈물을 닦아주소서.
내일이면 돌아갑니다. 무슨 해갈되지 않는 갈증 같은 것과 크고 해결되지 않은 무엇인가가 목에 걸려 마음을 힘들게 합니다.
아이티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저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십시오. 돌아가면 그냥 잊어버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어서 일상으로 교회로 가정으로 회복하고 싶습니다.
지난 닷새간이 아주 오래된 시간 같습니다. 여러분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더 많이 기도해주십시오.
헬핑핸드로 후원헌금은 더 이상 받지 않으려 합니다. 우선 제가 전달할 방법이 없습니다. 보내주신 헌금 중 잔액이 정리되지 않은 것들은 다시 한 번 아이티 미션 유에스에이를 통해서나 비전트립을 통해서 전달하여 귀하게 쓰임 받도록 하겠습니다. 여러 기관에서 모금하는 줄 압니다. 아이티를 위해 아낌없이 후원하실 수 있기 바랍니다.
1월 18일(월) 밤. 도미니카에 산토 도밍고에서 조항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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