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율법에서 자유를 얻은 결과
그러면 율법을 향해서 죽었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 결과가 무엇이냐가 중요 합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4가지 놀라운 결과를 발견 하게 됩니다.

1. 우리는 새로운 자유를 가지게 됩니다.
3절에 보면 (롬 7:3)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남부에 큰 농장을 소유한 한 부부가 있었습니다. 둘 사이에 금실이 좋기로 소문이 났습니다. 그러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을 못 잊어서 남편의 시신을 박재로 해서 AIR TIGHT 된 유리관에 넣어서 집 거실에 두고 살았던 것입니다. 그것을 보다 못한 친구들이 그녀를 권해서 한 2년 동안 Vacation을 떠났습니다. 그러던 중 이 여인이 새로운 남자 친구를 만나게 되었고 사랑에 빠지게 되고 결혼을 했습니다. 그녀가 집에 돌아와서 한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옛 남편의 시신을 내어 버리는 일입니다. 미련도 주저도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과 새로운 결합을 하는데에 이 율법은 더 이상 우리를 주장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새로운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2.우리는 새로운 관계를 가지게 됩니다.
4절에 보면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율법과의 관계는 정죄와 속박의 관계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는 사랑의 관계입니다. 여러분 사랑의 관계는 자유와 자발성이 특성입니다. 행복이 있습니다. 기쁨이 있습니다.

3. 새로운 목적을 갖게 됩니다.
우리가 크리스천이 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4절에 보면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크리스천이 되는 목적은 바로 열매를 맺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맺어야 할 열매는 어떤 것일까요? 성령의 열매- 사랑, 희락(joy) 화평(Peace), 오래 참음(patience), 자비(gentleness),양선(goodness), 충성(faithfulness), 온유(meekness),절제입니다.

율법으로 부터의 자유는 방종이 아닙니다. 죄지을 자유가 아닙니다. 이 자유로 우리로 열매를 맺게 하려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신앙생활 하려는 사람은 결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성령의 열매를 맺으려면 율법주의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생산적인 크리스천이 되기 위하여서는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가져야 됩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이유는 바로 이 열매를 맺기 위함인 것입니다. 율법의 열매는 좌절과 정죄입니다.
(롬 7: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롬 7:6)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

4. 율법으로부터의 자유함은 우리로 새로운 동기를 품게 합니다.
신앙생활의 동기가 다릅니다. 율법적인 신앙생활을 하면 모든 것이 의무입니다. 율법에 기록 되어 어 있는 코드와 조항에 따라야 합니다. 오늘 결혼에 대한 예가 많은데 자! 율법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결혼 생활입니다. 만날 아내를 노예처럼 부리는 남편 밑에서 밥하고 빨래하고, 누구 때문에 먹고 사는데..하는 식으로 이거해라 저거해라..매일 매일 무엇을 해야 할지 지시를 당하고, 여러분 남편은 상관이 아닙니다. 직장처럼 아내에게 상사가 아닙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기쁨이란 없습니다. 자율이란 없습니다. 어느 날 이 여인이 자신을 돌아다보았을 때 느끼는 것은 바로 절망, 그 자체일 것이고 증오만 남을 것입니다.

그러다 이 옛 남편이 죽고, 새로 결혼을 했는데 이 남편은 다릅니다. 아내를 존중해 주고, 사랑해 주며, 오히려 아내가 뭘 필요로 할까 뭘 원할까? 도와주려고 하고 배려해 줄 때 똑 같이 밥하고, 집안 청소 하고 허드렛일 하는데도 그 마음이 다릅니다. 예전엔 죽지 못해서 했는데 이제는 기쁨으로 자원해서 하는 것입니다. 그전엔 공포와 의무감과 죄책감으로 했는데 이제는 사랑과 기쁨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태도가 완전히 다릅니다.

율법주의적인 신앙생활에서 벗어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이 한층 즐겁고, 행복할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율법의 목적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율법에서 자유 하였다는 말을 잘못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이제 십계명은 안 지켜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전히 십계명은 살아 있고 어기면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십계명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 동기가 달라진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안 지키면 하나님께서 나를 안 사랑하실 것이라는 공포심이 아니라 ‘내가 이것을 지킴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이다’라는 변화를 의미 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를 원해서이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의무에서 자원하는 마음..I Should에서 I Want to로의 변화입니다.

왜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까? 그것은 바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 이고 이것은 우리의 캐릭터, 즉 인격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을 크리스천으로 부르신 것입니까? 우리를 지옥에서 꺼내서 천국으로 데려 가시는 것만이 목적일까요? 그러면 우리가 믿자마자 죽이셔서 천국으로 데려 가실 것입니다. 그게 최상 책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를 이 땅에 남겨 놓으셨을까요?

죄 지으라고요? 아니지요. 천국에 죄가 없는데 왜 여기서 죄지으라고 남겨 두시겠습니까? 두 가지 이유입니다, 하나는 우리의 인격이 예수님을 닮아가도록 더 자라게 하기 위해서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을 섬기라는, 즉 사역을 하라는 것입니다. 만약에 우리가 지금 이러한 것을 하고 있지 않다면 우리는 우리를 이 땅에 남겨 두신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있지 않은 것이 됩니다.

제가 목회자로서 만약에 이런 것을 하지 않는 성도들에게 “당신이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진노(wrath)를 살 것입니다”라고 설교를 한다면 저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 오늘 본문이 그런 것을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앞으로도 할 수만 있다면 죄의식을 여러분에게 심어서, 죄책감이라는 동기로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자원하는 것이고 사랑의 관계에서 나오는 자연적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이 주님을 섬기는 것을 회피 합니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처음에는 자원해서 하다가 왜 쉽게 포기를 할까요? 그것은 그 동기가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들이 죄책감에서 일을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아니면 주님이 상을 주실 줄 알고 했는데 축복이 안내려 졌기 때문일 것입니다. 상벌로 섬기는 것입니다. 아니면 사람들이 보면 어떻게 생각 할까? 압력 때문에 혹은 체면이나 의무감이나 아니면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는 마음 그런 잘못된 동기로 섬기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것은 언제나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몸을 사랑하고, 주님이 세운 이 훼드럴웨이 새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