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이슬람화를 우려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이슬람이 세계정복의 투쟁 이념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이슬람 원리주의 집단은 이슬람 세계는 평화의 집, 비이슬람은 전쟁의 집으로 해석하고 비이슬람 세계를 향한 투쟁을 선언한다. 그들은 이슬람과 서구, 이슬람과 마르크스주의 세력, 이슬람과 시온주의 사이에는 전쟁 상태가 존재하며, 이슬람에 대적하는 이 세력은 무슬림을 지배하고 식민지화하며 착취할 것을 추구한다고 말한다. 이 세력들에 대항하는 전쟁은 선포할 필요도 없이 이미 그곳에 있다고 주장한다. 무함마드는 살아있을 때부터 다른 나라의 정복을 지시하고 행동했다. 그래서 칼리프(이슬람 제국의 최고 통치자)들이 칼을 들고 중동과 구라파 일부 및 북아프리카를 정복하였다.
이슬람화를 위해선 폭력도 정당화된다. 마치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공산주의 논리와 같다. 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폭력이라는 불법적 수단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테러가 일어날 때 일부 이슬람 지도자들과 언론들은 이슬람이 한 테러가 아니라는 성명이나 보도를 낸다. 하산 소령의 총기 난사 사건 이후 미국의 한 이슬람단체도 이슬람과 관련된 일이 아니라는 내용의 성명을 냈다. 그리고 언론들은 미국에서 무슬림들에 대한 보복이 일어나지 않을까 불안감을 부추기는 내용의 보도를 했다.
이 성명서에서는 테러가 이슬람을 납치한다고 개탄한다. 그러나 실제로 테러를 강력하게 응징하는 이슬람단체가 없다고 한다. 만약 이슬람 국가에서 테러하는 무슬림을 비난하면 도리어 보복을 당한다고 불안해 한다. 최근 서방에서 이슬람 테러를 연구하는 자들은 이슬람에서 테러가 많이 일어나는 근본적 원인이 코란의 가르침 때문이라고 말한다.
테러가 이슬람 공포증을 일으키는데 무슬림은 테러 세력을 응징하지 못하고 여론으로만 나쁘다고 할 뿐이다. 이유는 코란이 불신자들에게 폭력을 가할 것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이슬람은 여기에 대하여 분명한 답을 해야 한다. 네덜란드의 국회의원이 작년 한 동영상을 제작하여 전세계에 배포하였다. 그 내용은 테러는 코란에 근거한 것이라고 역설하는 이맘의 설교를 편집한 것이었다. 최근 기독교로 개종한 무슬림 출신의 일부 지식인들이 이슬람을 향하여 지하드를 촉구하는 코란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대답해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코란의 일부 내용을 인용하면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위하여 싸우고 믿지 않는 자들은 사탄을 위하여 싸우나니 사탄의 무리와 싸우라. 실로 사탄의 교활함은 허약할 뿐이라’(코란4:76), ‘하나님과 내세를 믿지 아니하며 하나님과 선지자가 금지한 것을 지키지 아니하고 진리의 종교(이슬람)를 따르지 아니한 자들이-비록 그들이 성서의 백성(유대인과 크리스천)이라 하더라도-항복하여 인두세를 지불할 때까지 싸우라. 그들은 스스로 저주스러움을 느끼리라’(코란9:29) 등이다.
이상 인용한 코란 외에도 폭력을 선동하는 코란 구절이 더 있으나 여기서 생략한다. 분명한 사실은 코란이 지하드를 선동한다는 것을 더 이상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형 테러 때는 영향력 있는 이맘이 직접 테러리스트들을 지시하는 것이 녹음되어 얼마 전 CNN이 들려주기도 했다. 예를 들면 작년 11월 하순 인도 뭄바이호텔 폭파 때 이맘이 테러리스트에게 일일이 행동 사항을 지시했다. 중요한 것은 순교하는 것을 하늘이 기다린다고 말한 내용이다. 이것은 지하드 수행을 이슬람 교리가 권장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산 소령도 영향력 있는 이맘의 교육을 받았다고 보도됐다.
우리가 이슬람화를 우려하는 다른 이유는 이슬람에서는 무함마드가 선지자이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인 이슬람 학자들은 공공연하게 기독교와 이슬람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같은 뿌리라고 주장한다. 그러면 왜 이슬람은 기독교 신자들을 박해하고 심지어 기독교인들을 공격하라고 하는가? 이슬람은 신명기 18장의 선지자와 요한복음 14장의 보혜사 성령은 바로 무함마드라고 주장한다. 코란 3장81절을 인용하면 이렇다. ‘하나님이 예언자들과 성약을 하사 성서와 지혜를 주셨노라. 그 후 한 선지자가 진리와 함께 오나니 그를 믿고 그를 도울 것이라. 이에 확신하느뇨. 너희들에게 내린 나의 성약을 지키느뇨. 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확신하나이다. 그러면 증언하라 내가 증인으로써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
기독교와 이슬람의 공존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위 본문에 대한 한국어 코란 주석은 성경의 선지자와 보혜사는 무함마드라는 것을 정확하게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구약 신명기 18장18절에 무함마드가 온다는 것이 예언되어 기록되어 있고 아랍국가의 창설은 이사야서(Isaiah, xlii)에 언급되고 있는데, 케다르(Kedir)는 이스마엘의 아들로 그 이름이 아랍국가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로 요한복음 14장16절, 15장26절, 16장7절(Gospel of St. John xiv 16, xv 26, xvi 7)에서 무함마드가 예언되고 있다.’[성 꾸란:의미의 한국어 번역], (파하드 국왕 꾸란출판청 이슬람역 1417년, 101p).
코란 다른 분문에서는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는 자들에게 저주를 한다. ‘하나님이 마리아의 아들 예수라 말하는 그들에게 저주가 있으리라.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벌을 막지 못하리니 그분의 뜻이라면 마리아의 아들인 예수와 그의 어머니와 세상의 모든 것이 멸망하게 되노라. 천지의 권능이 하나님에게 있으며 그 사이의 삼라만상이 그분의 것이며 뜻이 있을 때 창조하시니 하나님은 모든 일에 전지전능하시니’(코란5:17).
‘하나님이 마리아 아들을 메시아라 말하니 그들은 분명 불신자들이라. 메시아 가로되 이스라엘 자손들이여. 나의 주님이고 너희의 주님인 하나님만 경배하라. 하나님을 불신하는 자, 하나님께서 그들에의 천국을 금하시고 불지옥을 그의 거주지로 하게 하니 죄인들에게는 구원자가 없노라.’(코란5:72-73)
그러나 지금 이슬람 국가에서 꿈과 환상을 통하여 많은 무슬림이 예수님에게 돌아오는 이적이 일어나고 있다. 꿈과 환상에는 정확하게 예수님이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적과 환상을 중시하지 않는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도 이것을 무조건 부정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고 있다. 너무나도 많은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입장
우리는 다른 사람의 종교를 존중해야 한다. 오바마 미 대통령이 카이로 대학에서 한 연설처럼 우리는 이슬람을 적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슬람 테러와 정복적 자세의 이슬람 과격주의를 배제하며 이슬람화를 거부한다. 이슬람화는 이슬람이 정치, 사회 모든 분야 위에 군림하면서 종교다원화를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동시에 비민주적인 사회를 조성한다. 민주주의적이고 다원화된 우리 사회는 결코 민주주의와 다원화를 거부하는 종교를 거부한다. 대 테러 전쟁은 바로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임을 강조한다. 우리들은 다른 여러 나라들에서 일어나고 있는 무슬림 공동체들로 인한 사회적, 문화적 갈등을 예의주시해야 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우리의 입장을 천명한다.
1) 모든 종교는 서로 존중하면서 평화적으로 공존해야 한다.
2) 종교도 상호주의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 이슬람이 한국에서 선교하는 만큼 이슬람 국가도 종교와 선교의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 이슬람만이 절대 진리이기 때문에 자기들만 선교의 자유를 가진다는 사상은 독선이다.
3) 인권과 종교 자유는 인간의 보편적 가치이다. 이슬람 국가도 종교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
4) 이슬람이 다수일 때도 정교분리의 한국 헌법은 존중되어야 한다. 결코 종교가 정치 위에 군림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5) 현실적으로 이슬람이 가는 곳에 문화 충격과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한국의 무슬림들도 한국 시민으로 한국문화에 적응해야 한다.
6) 무슬림 남자들과 한국 여성의 결혼 시 많은 피해사건이 일어난다. 이것은 사회적 문제이다. 이슬람 근본주의는 더 심각하게 여성을 차별한다. 일부다처제도는 우리 사회에 적용될 수 없다.
7) 테러가 이슬람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면 왜 이슬람 국가는 여론이나 법으로 이것을 적극 억제하지 못하는가? 이슬람 테러의 근본적 원인은 정치적 이유가 아니라 코란의 가르침이다. 이슬람은 여기에 답해야 한다.
8) 한국의 이슬람은 알라와 기독교의 하나님이 같은 하나님임을 강조하며 아브라함의 한 자손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같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왜 자신들의 국가에서 기독교 선교는 못하게 하는가?
9) 이슬람은 십자군 전쟁을 이야기하며 기독교와 서구문명의 정복 전쟁과 잔인성에 대해 자주 언급한다. 십자군 전쟁은 로마 가톨릭이 한 실책이라고 본다. 그것을 개신교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이다. 아랍도 먼저 종교전쟁을 수행하였다.
10) 결론으로 이슬람은 비민주적 종교라는 것은 이슬람 국가가 증명하고 있다. 이슬람과 민주주의가 공존이 가능하다는 것으로 실제로 보여주어야 한다.
이슬람화를 위해선 폭력도 정당화된다. 마치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공산주의 논리와 같다. 선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폭력이라는 불법적 수단도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테러가 일어날 때 일부 이슬람 지도자들과 언론들은 이슬람이 한 테러가 아니라는 성명이나 보도를 낸다. 하산 소령의 총기 난사 사건 이후 미국의 한 이슬람단체도 이슬람과 관련된 일이 아니라는 내용의 성명을 냈다. 그리고 언론들은 미국에서 무슬림들에 대한 보복이 일어나지 않을까 불안감을 부추기는 내용의 보도를 했다.
이 성명서에서는 테러가 이슬람을 납치한다고 개탄한다. 그러나 실제로 테러를 강력하게 응징하는 이슬람단체가 없다고 한다. 만약 이슬람 국가에서 테러하는 무슬림을 비난하면 도리어 보복을 당한다고 불안해 한다. 최근 서방에서 이슬람 테러를 연구하는 자들은 이슬람에서 테러가 많이 일어나는 근본적 원인이 코란의 가르침 때문이라고 말한다.
테러가 이슬람 공포증을 일으키는데 무슬림은 테러 세력을 응징하지 못하고 여론으로만 나쁘다고 할 뿐이다. 이유는 코란이 불신자들에게 폭력을 가할 것을 가르치기 때문이다. 이슬람은 여기에 대하여 분명한 답을 해야 한다. 네덜란드의 국회의원이 작년 한 동영상을 제작하여 전세계에 배포하였다. 그 내용은 테러는 코란에 근거한 것이라고 역설하는 이맘의 설교를 편집한 것이었다. 최근 기독교로 개종한 무슬림 출신의 일부 지식인들이 이슬람을 향하여 지하드를 촉구하는 코란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대답해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코란의 일부 내용을 인용하면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위하여 싸우고 믿지 않는 자들은 사탄을 위하여 싸우나니 사탄의 무리와 싸우라. 실로 사탄의 교활함은 허약할 뿐이라’(코란4:76), ‘하나님과 내세를 믿지 아니하며 하나님과 선지자가 금지한 것을 지키지 아니하고 진리의 종교(이슬람)를 따르지 아니한 자들이-비록 그들이 성서의 백성(유대인과 크리스천)이라 하더라도-항복하여 인두세를 지불할 때까지 싸우라. 그들은 스스로 저주스러움을 느끼리라’(코란9:29) 등이다.
이상 인용한 코란 외에도 폭력을 선동하는 코란 구절이 더 있으나 여기서 생략한다. 분명한 사실은 코란이 지하드를 선동한다는 것을 더 이상 부인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형 테러 때는 영향력 있는 이맘이 직접 테러리스트들을 지시하는 것이 녹음되어 얼마 전 CNN이 들려주기도 했다. 예를 들면 작년 11월 하순 인도 뭄바이호텔 폭파 때 이맘이 테러리스트에게 일일이 행동 사항을 지시했다. 중요한 것은 순교하는 것을 하늘이 기다린다고 말한 내용이다. 이것은 지하드 수행을 이슬람 교리가 권장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산 소령도 영향력 있는 이맘의 교육을 받았다고 보도됐다.
우리가 이슬람화를 우려하는 다른 이유는 이슬람에서는 무함마드가 선지자이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인 이슬람 학자들은 공공연하게 기독교와 이슬람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같은 뿌리라고 주장한다. 그러면 왜 이슬람은 기독교 신자들을 박해하고 심지어 기독교인들을 공격하라고 하는가? 이슬람은 신명기 18장의 선지자와 요한복음 14장의 보혜사 성령은 바로 무함마드라고 주장한다. 코란 3장81절을 인용하면 이렇다. ‘하나님이 예언자들과 성약을 하사 성서와 지혜를 주셨노라. 그 후 한 선지자가 진리와 함께 오나니 그를 믿고 그를 도울 것이라. 이에 확신하느뇨. 너희들에게 내린 나의 성약을 지키느뇨. 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확신하나이다. 그러면 증언하라 내가 증인으로써 너희와 함께 있을 것이라.’
기독교와 이슬람의 공존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위 본문에 대한 한국어 코란 주석은 성경의 선지자와 보혜사는 무함마드라는 것을 정확하게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구약 신명기 18장18절에 무함마드가 온다는 것이 예언되어 기록되어 있고 아랍국가의 창설은 이사야서(Isaiah, xlii)에 언급되고 있는데, 케다르(Kedir)는 이스마엘의 아들로 그 이름이 아랍국가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로 요한복음 14장16절, 15장26절, 16장7절(Gospel of St. John xiv 16, xv 26, xvi 7)에서 무함마드가 예언되고 있다.’[성 꾸란:의미의 한국어 번역], (파하드 국왕 꾸란출판청 이슬람역 1417년, 101p).
코란 다른 분문에서는 예수님을 하나님 아들이라고 하는 자들에게 저주를 한다. ‘하나님이 마리아의 아들 예수라 말하는 그들에게 저주가 있으리라.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벌을 막지 못하리니 그분의 뜻이라면 마리아의 아들인 예수와 그의 어머니와 세상의 모든 것이 멸망하게 되노라. 천지의 권능이 하나님에게 있으며 그 사이의 삼라만상이 그분의 것이며 뜻이 있을 때 창조하시니 하나님은 모든 일에 전지전능하시니’(코란5:17).
‘하나님이 마리아 아들을 메시아라 말하니 그들은 분명 불신자들이라. 메시아 가로되 이스라엘 자손들이여. 나의 주님이고 너희의 주님인 하나님만 경배하라. 하나님을 불신하는 자, 하나님께서 그들에의 천국을 금하시고 불지옥을 그의 거주지로 하게 하니 죄인들에게는 구원자가 없노라.’(코란5:72-73)
그러나 지금 이슬람 국가에서 꿈과 환상을 통하여 많은 무슬림이 예수님에게 돌아오는 이적이 일어나고 있다. 꿈과 환상에는 정확하게 예수님이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이적과 환상을 중시하지 않는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도 이것을 무조건 부정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고 있다. 너무나도 많은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입장
우리는 다른 사람의 종교를 존중해야 한다. 오바마 미 대통령이 카이로 대학에서 한 연설처럼 우리는 이슬람을 적으로 간주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슬람 테러와 정복적 자세의 이슬람 과격주의를 배제하며 이슬람화를 거부한다. 이슬람화는 이슬람이 정치, 사회 모든 분야 위에 군림하면서 종교다원화를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동시에 비민주적인 사회를 조성한다. 민주주의적이고 다원화된 우리 사회는 결코 민주주의와 다원화를 거부하는 종교를 거부한다. 대 테러 전쟁은 바로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임을 강조한다. 우리들은 다른 여러 나라들에서 일어나고 있는 무슬림 공동체들로 인한 사회적, 문화적 갈등을 예의주시해야 한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우리의 입장을 천명한다.
1) 모든 종교는 서로 존중하면서 평화적으로 공존해야 한다.
2) 종교도 상호주의 원칙이 적용되어야 한다. 이슬람이 한국에서 선교하는 만큼 이슬람 국가도 종교와 선교의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 이슬람만이 절대 진리이기 때문에 자기들만 선교의 자유를 가진다는 사상은 독선이다.
3) 인권과 종교 자유는 인간의 보편적 가치이다. 이슬람 국가도 종교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
4) 이슬람이 다수일 때도 정교분리의 한국 헌법은 존중되어야 한다. 결코 종교가 정치 위에 군림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5) 현실적으로 이슬람이 가는 곳에 문화 충격과 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한국의 무슬림들도 한국 시민으로 한국문화에 적응해야 한다.
6) 무슬림 남자들과 한국 여성의 결혼 시 많은 피해사건이 일어난다. 이것은 사회적 문제이다. 이슬람 근본주의는 더 심각하게 여성을 차별한다. 일부다처제도는 우리 사회에 적용될 수 없다.
7) 테러가 이슬람에서 하는 것이 아니라면 왜 이슬람 국가는 여론이나 법으로 이것을 적극 억제하지 못하는가? 이슬람 테러의 근본적 원인은 정치적 이유가 아니라 코란의 가르침이다. 이슬람은 여기에 답해야 한다.
8) 한국의 이슬람은 알라와 기독교의 하나님이 같은 하나님임을 강조하며 아브라함의 한 자손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같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왜 자신들의 국가에서 기독교 선교는 못하게 하는가?
9) 이슬람은 십자군 전쟁을 이야기하며 기독교와 서구문명의 정복 전쟁과 잔인성에 대해 자주 언급한다. 십자군 전쟁은 로마 가톨릭이 한 실책이라고 본다. 그것을 개신교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이다. 아랍도 먼저 종교전쟁을 수행하였다.
10) 결론으로 이슬람은 비민주적 종교라는 것은 이슬람 국가가 증명하고 있다. 이슬람과 민주주의가 공존이 가능하다는 것으로 실제로 보여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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