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명 인도아(Dr. Dwight Linton) 선교사님께서 2010년 1월 11일 향년 8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조지아주의 게인즈 빌에 있는 체스넛 마운틴 교회에서 열린 친구목사님의 장례식에 참석한 뒤 승용차 편으로 귀가하시다가 교통사고를 당하신 것이다. 유족으로는 알츠하이머 병을 앓고있는 부인 마지 여사와 3남 2녀가 있다.

인도아 선교사님은 한국에서 4대에 걸쳐 선교사역에 봉사해오시고 한남대학의 설립자이시며 초대 학장이셨던 Linton 박사의 3남이시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구한 말 근대교육과 의료사역을 펼쳤던 유진 벨 선교사(1868-1925)의 외손자이시다. 인도아 선교사님은 한국 전주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선교사로 25년 동안 젊은 시절을 헌신하셨고(1953년부터 1978년까지), 미국에 돌아 오셔서도 한국인을 위한 선교사역으로 1996년 은퇴하실 때 까지 최선과 충성을 다하신 하나님의 사람이시다. 그의 생애는 한국을 위한 생애, 한인을 위한 생애였다고 할 수 있다. 인도아 선교사 뿐만 아니라, 그의 아버지께서도 한국 선교사로 한남대학을 창설하셨고, 그의 형님( Hugh Linton)도 한국 선교사로 가셔서 그의 생명을 거기에 바치셨다. 한인에게는 잊을 수 없는 가문이시다. 그분의 떠나가심을 보면서 과거를 회고해 본다.

지난 28년 동안 내가 그와 함께 하면서 바라본 인도아 선교사님의 성품은 고요하고 잔잔하다. 항상 변함이 없다. 언제 만나도 부담이 없다. 아들 같은 나이의 젊은이에게도 허리 굽혀 인사하신다. 만났다가 해어지면 다시 만나고 싶은 분이시다. 무슨 부탁을 해도 거절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주장하는 자세가 아니다. 들어 주시고 이해하시고 함께 느껴주신다. 내 마음이 심히 괴로울 때 찾아가서 마음을 털어 놓고 이야기 할 수 있고 믿을 수 있었던 분이시다. 그분은 예수님의 마음을 많이 닮은 분이셨다. 인자하셨고 바른 길로만 걸어가신 분이시다.

내가 만난 인도아 선교사님의 사역은, 예수님의 누룩비유에 나오는 누룩의 역할같은 사역이었다. 소리 없이, 고요하고 잔잔하게, 충돌없이, 순조롭게, 그러나 아릅답고 끈기있게 이어나가는 사역이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사람을 중요하게 여기셨다. 우리 교단에서 흑인목사나 한인목사 등, 소수인종 목사들이 마음을 털어 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백인 목사는 인도아 선교사였다. 그는 한국 전주에서 태어나셨다.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셨다. 한국을 사랑했다. 한인을 사랑했다. 한인을 위한 사역을 하셨다. 내가 그분과 함께 사역한 것은 커다란 축복이었다. 나는 그분을 잃었다. 적어도 5년은 더 사셨더라면 좋았을 것을....하나님이 부르셨으니 누가 항거할 수 있을까? 그가 더 좋은 곳에 가신 것을 나는 감사한다.

내가 그에게서 받은 은혜는 대단히 크다. 나 뿐만이 아니다. 수 많은 사람이 있다. 나의 이야기를 하면 다른 사람의 이야기도 될 것이다. 그 분의 아버지께서 창설하신 초기 한남대학교(구 대전대학)에는 미국인 교수들이 대단히 많았다. 나는 미국인 교수들에게서 배우면서 4년 동안 장학금을 받고 졸업했다. 그 대학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평생 대학이라는 곳을 갈 수 없었을 것이다. 거기에서 미국의 꿈이 싹이 솟아났다.

한남대학 졸업생이 세계 여러 나라에 대단히 많다. 한남대 동문이 미국에 대단히 많은 것은 이유가 있다. 초기 미국인 선교사들이 그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준 영향 때문이다. 내가 미국에서 더 공부할 학교를 정하지 못하여 고심하고 있을 때, 인도아 선교사님은 훌러 선교대학원을 제안하셨고, 내가 졸업할 무렵에는 아틀란타에서 친히 California 까지 오셔서 나를 찾아 만나주시고 미국장로교단 본부에서 함께 일하자 하셨다. PCA 교단 본부에서 함께 일하실 때에 함께 성약교회를 개척하셨고, 또 한인 2세 교회를 개척하기도 하셨다. 그 후 나와 함께 선교대학원을 시작하셨고, 지금까지 함께 교수하는 일을 하시다가 세상을 떠나셨다. 나로서는 잊을 수 없는 분이시다. 그 분은 많은 사람의 마음 속에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심어 주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천국에 가면 꼭 만나보고 싶은 분이시다.

김 대 기 목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