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진리의 위치적인 면과 진리의 경험적인 면의 구분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인고 하면 우리가 경험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진리는 진리로 있는 것입니다. 내가 전혀 느끼지 못하지만 진리로 있는 것이 있습니까? 있습니다. 내가 전혀 이해하지 못해도 존재하는 많은 진리가 있습니다. 어떠한 것은 우리가 믿지 못한다 하더라도 진리로 존재하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많은 부분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가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에서 볼 때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믿든지 말든지, 우리가 느끼든지 느끼지 못하든지에 상관없이 진리로 존재하는 사실 말입니다. 예를 든다면 성경에서 우리가 믿는 순간에 우리의 죄가 완전히 용서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크리스천들은 죄의식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위치적으로는 용서를 받았지만 경험적으로는 아직도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용서 받았다는 사실이 실감이 안 나는 것입니다.

위치적인 진리-Positional Truth란 우리의 신앙생활에 대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 이것이 위치적 진리입니다. 그럼 경험적인 진리는 하나님이 나를 보시는 대로 사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 안에서 용서 되었다고 하면, 용서 받은 것으로 믿고 알게 되고, 느끼게 되며, 경험되어지는 진리를 말합니다. 1860년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은 노예 해방을 선포 하였습니다. 이것은 법입니다. 대통령이 문서에 서명을 하는 순간 미국에 사는 모든 노예들은 다 자유를 얻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노예들이 그 즉시 경험을 했습니까? 그 즉시로 자유를 느낄 수 있었을까요? 아니지요. 남북전쟁이 끝나고서야 그 자유를 맘껏 즐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위치적으로는 그들은 이미 주인으로부터 자유인 이었지만 경험적으로는 여전히 노예였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태평양 전쟁이 끝난 후 29년이 지난 후에 필리핀의 한 작은 섬에서 일본군 장교로 있던 오노다라는 일본군 소위가 발견 됩니다. 그는 그동안 "고독한 전투"를 계속해왔었던 것입니다. 그는 매일 전투일지를 적었고 무전기로 미군함정의 이동사항을 타전했습니다. 그의 칼과 소총은 깨끗이 손질되어 있었고, 그를 발견한 일본 청년이 패전을 알렸으나 오노다는 직속상관의 명령이 없다는 이유로 투항을 거부 했습니다.

수소문 끝에 찾은 옛 상관 다니쿠지 소좌의 공작중지명령을 받고서야 오노다는 29년 만에 무장을 해제했던 것입니다. 그는 전쟁이 끝났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비행기가 뜨고 내리니까 밤에는 나와서 음식을 구해서 들어가고 낮에는 동굴 깊은 곳에 숨어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위치적으로는 이미 전쟁이 끝났지만 경험적으로 오노다에게는 아직 이 전쟁은 끝난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위치적 진리와 경험적 진리의 차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놀라운 사실을 말씀하셨는데, 내가 그것을 어떻게 사실로 경험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죄에 대해서는 죽었다고 말씀하시면서 자유를 주신 것. 그러면 그것을 어떻게 경험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의 실제 삶속에서 어떻게 그것을 누리며 사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3가지 과정이 필요 합니다.
첫째는 먼저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 하셨는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르는 것을 어떻게 행동으로 옮기겠습니까? 바울의 관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보십시오 6장3절에도 알지 못하느뇨? 6절에도 우리가 알거니와, 9절에도 앎이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올바른 행동을 하려면 먼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알고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요소는 전적으로 동의하며,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1절에 여길지어다. 죽었다면 죽은 것으로 받는 것입니다.
어느 더운 여름날 한국의 어느 일간지 만화에 이런 내용이 실렸습니다. 공동묘지에 있는 한 무덤에 누워있던 주검이 “아이 더워죽겠네 ” 그러자 옆에 있는 무덤에서 대답하길 “야 임마 너 벌써 죽었어” 그러더랍니다. 우리는 죽었구나. 어디에 대해서요? 네 죄에 대해서 우리는 시체입니다. 느낄 수도 유혹 받을 필요도 없습니다.

세 번째는 그렇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6장 13절에 그런 내용이 나옵니다. 네 몸의 어떤 부분도 죄에게 넘겨주지 마라. 나는 범죄 할 눈이 없도다. 범죄 할 입이 없도다. 범죄 할 손이 없고 발이 없도다. 물질에 대하여 죽었다. 정욕에 대하여 죽었다. 명예에 대하여 죽었다. 죽음을 선포해 버리는 것입니다. 죽은 내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것입니까? 죽었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떻게 죄로부터 자유 함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까? 구원 얻은 특권, 축복, 승리를 확보할 수 있는 것일까요?

죄에 집중하면 결코 승리를 얻을 수 없습니다. 하지 말아야지 결심한다고 죄가 없어지는 것 아닙니다. 율법에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더욱 더 율법은 나를 옭아매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율법을 하나 만들어 볼까요? 이 시간 절대로 신 것을 먹거나, 신 것을 상상하거나, 신 것을 상상함으로 말미암아 절대로 입에 침이 고이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절대로 레몬을 질근질근 씹는 그런 일을 상상해서는 안 됩니다. 입에다 신 살구를 넣고 식초를 한 수저 퍼 마시면서 입에 침이 고이는 그런 죄를 범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 빙글빙글 웃는 걸 보니까 침이 다 고인 모양입니다. 이게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누가 내 가슴속에 지울 수 없는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원수를 용서해야지, 원수를 묵상하면 묵상할수록 결심하면 결심할수록, 그 원수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가슴에 분노가 더 치밀어 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가슴에 상처가 더 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용서해야지 결심하더라도 용서가 안 되는 것입니다. 이게 죄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쉼을 누리면 승리는 저절로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나의 승리로 받아 누리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인지, 내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신분의 존재인지, 내가 구원 얻고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그 신분에 집중하십시오. 내 값어치가 얼마나 값비싼 존재인지 내 값어치에 집중하십시오.

인도에 전해오는 얘기에 의하면, 한 사람이 현자에게 찾아가서 “사람의 값어치가 얼마나 됩니까?” 물었습니다. 보석 하나를 손에 들려주면서 과일가계를 찾아가고, 감자 가계를 찾아가고, 정육점을 찾아가고, 마지막에 보석가계를 찾아가서 들러서 오시오. 과일가계를 찾아갔습니다. 보석을 내밀었습니다. 귤 2개와 바꾸자고 얘기합니다. 감자가계에 갔습니다. 감자 3개와 바꾸자고 합니다. 정육점에서는 소고기 5근을 주겠다고 얘기했습니다. 마지막 보석상에 들렀더니 “이 보석은 세상에서 구할 수 없는 너무나 값비싼 보석이기 때문에 어떤 돈을 주더라도 바꾸지 마십시오. 온 천하만큼이나 귀중한 보석입니다.” 라고 얘기했습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삶입니다. 구원 얻은 우리의 값어치입니다.

귤 2개에 우리의 인생을 팔아 치울 수도 있고, 쇠고기 5파운드에 팔아 치울 수도 있고, 온 천하보다도 소중한 삶을 살아갈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영광스런 신분에 집중하십시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 소중한 성자입니다. 의인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이 된 것입니다. 그 멋진 승리에 집중하십시오. 이미 이겼습니다. 이겨놓고 싸우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에 집중하십시오.

13절에 ‘드리다’라는 단어가 세 번 연속으로 사용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신을 죄에게 ‘끌려가도록 놔두지 말고 알코올 중독자가 기껏 치료 받고서 괜히 술집 근처를 맴돌며 ’난 안 마셔 난 안 마실 거야‘ 이렇게 하지 말고, 죄의 근처를 서성이며 괜히 고생하지 말고 방향을 바꾸어서 아예 가는 길 자체를 다른 길로 돌아가면서 오히려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향해서 걸어가라는 행동하라! 결단을 실행하라! 그런 뜻입니다.

즉 알고, 마음으로 동의하고 행동하는 이 세 가지를 통해서 우리는 위치적인 진리를 경험적인 진리로 소유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지정의 신앙 우리 모두에게 꼭 있어야할 신앙 성숙의 요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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