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폴란드를 침공한 독일군은 바르샤바로부터 300km 떨어진 작은 도시 ‘오시비엥침’ 인근의 폴란드군 병영을 접수했다. 그리고 나치 독일은 ‘선의에 따라 유대인을 보호 수용하는 장소’라는 말로 아우슈비츠 강제 수용소를 선전했다. 사실상은 친위대 장관인 하인리히 힘러가 주동이 되어 가시철망과 고압전류가 흐르는 울타리, 기관총이 설치된 감시탑을 갖춘 공포의 강제수용소였다. 이곳에서 처형된 사람들은 유대인. 집시. 소련군 포로. 폴란드 정치범, 정신질환을 가진 정신 장애인.동성애자. 기타 나치즘에 반대하는 자들이었다.

나치가 세운 강제수용소 중에서 최대 규모로서, 이 수용소에서 150만 명 이상 죽임을 당했다. 약 600만 명의 유대인이 1940-1945 사이에 살해당했다.(유럽 전체 유대인의 80%) 전 유럽의 유대인, 집시, 소련군 포로, 폴란드 정치범, 정신질환을 가진 정신 장애인. 동성애자. 기타 나치즘에 반대하는 자들을 가축 운반용 화물열차에 태워 이곳으로 운반하였다.

수감자들은 매우 좁은 크기의 방에서 생활했고- 마치 닭장 같은- 이 방은 너무나 좁아서 일어서 있을 수가 없었다.

최초의 수용자들이 아우슈비츠에 온 것은 1940년 6월로, 폴란드 양심수 728명이 첫 수용자들이었다. 이후 아우슈비츠로 보내진 폴란드인 수용자들은 약 15만 명이며 이중 7만 5천명이 죽은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1941년 9월, 소련군 포로와 유대인 수용자들이 처음으로 독가스실에서 학살당한 만행이 아우슈비츠에서의 첫 학살이었다. 독가스실 에서는 한 번에 약 2,000여명의 수용자가 학살당했다. 대부분의 피해자들이 노동력이 없는 노인과 여성, 그리고 어린이들이었는데 수용소 도착 즉시 선별되어 보내졌다.

독가스실은 샤워실의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나치는 학살 피해자들에게 샤워를 하라고 하여 옷을 벗게 한 뒤 가스실에 보내어 학살하였다. 사용된 독가스는 효과가 빨리 나타나는 치클론 B (Zyklon B gas)였다.

학살 피해자들의 시체는 시체 소각로에서 대량으로 불태워졌는데 하루에 약 1,500~2,000구의 시체가 소각되었고 이들의 옷과 신발은 분류되었다. 또한 수용자들의 머리카락을 잘라 카펫과 가발을 만들었다.1945년 1월 27일 소비에트 연방(소련)의 붉은 군대의 진주로 인하여 해방되었다.

▲독일어로 ‘일하면 자유로워진다'(Arbeit Macht Frei)는 구호가 붙은 제1캠프 정문
아우슈비치 캠프는 기차 종착역의 좌. 우를 제1 캠프, 제 2 캠프(55만 평)로 분류했는데, 제1캠프 정문에는 독일어로 ‘일하면 자유로워진다’(Arbeit Macht Frei)라는 구호가 붙어있다.

이곳은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희생자들의 유품들이 보관되어 있었다. 어떤 방에는 희생자들의 안경들이 쌓여있고 어떤 방에는 어린아이들의 신발들이 쌓여있고, 어떤 방에는 구두들이, 어떤 방에는 가방들이, 어떤 방에는 머리카락들이, 어떤 방에는 머리카락을 가지고 짰던 카펫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또한 총살했던 벽, 교수형을 행했던 교수대, 살아있는 사람들을 생체 실험했던 10동, 독가스 실, 화장터, 뼈를 갈아서 뿌렸던 연못…등등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처절함 가운데, 희생자의 유품은 재활용품으로 사용했고, 장신구는 물론 금니까지 뽑아 금괴로 만들어 독일, 스위스 은행으로 보내졌으니… 인간이 이렇게 잔인 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런데 11동 지하 18호실 아사감방에서는 영혼을 감동시키는 사건을 접하게 됐다. 1941년 7월말 수용소 14동에서 포로 하나가 탈출했다. 친위대가 출동해서 도망친 포로를 찾았지만 행방을 찾지 못했다. 14동에 수용된 모든 사람들이 죽음의 공포에 떨어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탈출자가 24시간 안에 잡히지 않을 경우에는 그 사람이 소속된 14동의 수용자중 다른 열 사람이 죽음을 맞아야 했기 때문이다.

다음 날 아침이 되자 수용소 소장이 일렬로 늘어선 수용자들 중에 처형시킬 사람들을 골라냈다.

"너, 너, 그리고 너!" … 수용소장에게 지목된 한 사람 - 전 폴란드군 부사관이었던 –‘프란치세크 가조우니첵크’가 울부짖기 시작했습니다.

“ 오, 제발. 절 살려 주세요!! 내겐 노모가 살아계시고, 아내가 있고. 자식들도 있다구요. 제발..." 잠시 고요한 정막이 흘렀다.

그때 누군가 대열을 벗어나 소장 앞으로 다가와서 소장에게 말했다. "저 사람 대신 제가 죽게 해주십시오." “너는 누구지?” 소장이 그에게 물었다.

"16670번, 막시밀리안 마리아 콜베, 가톨릭 신부입니다. 결혼하지 않았기에 아이도 없습니다. 부디 저 사람과 바꿔주십시오." 이 말이 소장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막시밀리안 마리아 콜베 신부
울고 있는 가조우니첵크의 번호와 이름이 사형수 리스트에서 지워지고 대신 콜베 신부의 번호와 이름이 올라갔다. 막시밀리안 마리아 콜베(Maximilian Maria Kolbe, 1894~1941) 신부를 포함한 10명은 악명 높은 지하 감방, 굶어 죽어야 나올 수 있는 아사감방(餓死監房)으로 향했다.

콜베 신부는 죽음을 기다리는 다른 수감자들을 위로하고 격려했다. 음식은 물론 물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는 아사감방에서 울부짖는 죄수들을 조용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죽음뿐이었다. 그러나 콜베 신부와 함께 있는 죄수들은 누구도 저주하지 않고 비록 힘이 빠진 목소리지만 기도하고 찬송을 할 뿐이었다. 사형장이 사랑의 불꽃이 피는 성당이 되었던 것이다.

3일이 지났을 때 한 사람이 죽었고, 나머지는 허기와 갈증에 야위어가며 주말까지 살았다. 2주가 지나가자 네 사람이 살아남았는데 콜베 신부도 그중 하나였다. "다음 작업을 위해 감방을 치우도록." 소장이 명령했다.

치운다는 말은 배설물과 냄새 제거를 의미했고 또한 뼈가 보일 정도로 앙상하게 말라 겨우 숨만 붙어 있는 상태로 바닥에 누워있는 아직 생존해 있는 수감자들을 제거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콜베 신부에게 독일인 병사가 독약 주사를 놓는 장면
수용소 의사가 감방 문을 열었을 때 9명의 동료를 먼저 다 보낸 후 혼자 남은 콜베 신부는 벽에 기대어 기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준비된 독약주사 앞에 뼈만 남은 팔을 내어 주었다. 1941년 8월 14일, 47세의 막시밀리안 콜베 신부는 그렇게 숨져갔다.

다른 사람을 위하여 제 목숨을 대속의 제물로 내어준 그리스도의 사랑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에서 더 큰 사랑이 없나니’ (요 15:13) -의 말씀을 몸으로 실천한 콜베 신부의 숭고한 사랑 앞에서, 찡한 가슴의 뭉클함과 수천도의 典律(전율)이 온 몸을 감싼다.

콜베(Maximilian Maria Kolbe) 신부는 누구인가?

-나치 희생자들중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시복(諡福)된 최초의 인물

1894년 1월 8일 폴란드 로츠 근처 즈둔스카볼라에서 태어나 라이몬드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고 1907년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회에 입회하여 막시밀리안이란 이름을 얻었다.

1911년 유기 서원을 하였고 1917년 로마에서 성모의 기사회를 조직했다. 1918년 그는 로마에서 서품을 받고 폴란드로 귀향하여 월간 "성모의 기사(Rycerz Niepokalanej)"를 창간했다.

1927년, 그는 와르소에서 25마일 거리가 되는 곳에 무염성모의 마을을 세웠는데, 그는 이와 비슷한 마을을 일본과 인도에도 세웠다. 1939년 나치에 반대한 혐의로 비밀경찰에 체포되었다가 일단 석방된 뒤, 1941년 2월 유대인들과 폴란드 지하조직을 도왔다는 죄목으로 다시 체포당했다.

1941 년 8월 14일 선종. 1971년 10월 17일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복자(福者)로 선포되어 나치 희생자들 가운데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시복(諡福)된 최초의 인물이 되었고, 1982년 10월 10일 교황 요한 바오로 6세에 의하여 시성되었다.

프란치세크 가조우니첵크(Franciszek Gajowniczek,1900~1995)는...

▲1941년 콜베 신부의 희생으로 죽음을 모면한 프란치세크 가조우니첵크는 1972년 콜베 신부를 기념하는 모임에서 "내 안에는 콜베 신부님의 생명도 함께 살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1972년 10월 독일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15만 명 유럽인들이 함께 모였다. 동료 죄수를 위해 대신 목숨을 바친 한 사람을 기념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그 자리에는 백발의 노부부가 있었다. 남편의 이름은 가조우니체크 였다. 그(가조우니체크)는 그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내 생명만을 갖고 살고 있지 않습니다. 내 안에는 콜베 신부님의 생명도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1995년 숨질 때까지 가조우니체크는 콜베 신부가 자기를 위해 죽음으로써 대신 살게 된 자기 자신을 존귀하게 여기면서 한 평생을 감격과 감사함으로 살았던 것이다.

가조우니체크가‘콜베 신부의‘자기를 위한 대속의 제물’로 대신 살게 된 자기 자신을 존귀하게 여기면서 한 평생을 감격과 감사함으로 살았던 것처럼, 우리 성도들도 사도바울의 신앙고백 -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 으로 살아야 함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되었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배경으로 (왼쪽부터)이광희 목사와 이미선 사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