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5:1-11
그리스도인의 특권

때때로 우리들은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미 주어진 특권과 축복들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영적으로 헐벗은 채로 힘들게 지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마음껏 누리면서 살 수 있는 엄청난 축복을 이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다 허락해 주셨습니다.

70년대만 해도 미국으로 이민 간다고 하면 마치 로또를 맞은 것으로 생각 한 때였습니다. 모두다 선망의 대상이 되었던 때입니다. 그때 한 할머니가 딸의 초청으로 이민을 가는데 처음 비행기를 타는 것입니다. 얼마나 긴장이 됩니까? 그런데 North West Airline의 금발의 승무원을 보자 그만 긴장이 더한 것입니다. 영어도 영어이지만 뭐를 먹을 것인지 묻는 것 같은데, 눈치를 보니 비쌀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 오는 내내 눈 딱 감고 자는 척을 한 것입니다. 공항에 내려서 터미널을 빠져 나와서 딸을 만나자마자 얘야 배고파 죽을 것 같으니 뭐 좀 먹게 해달라고 합니다. 딸은 왜? 비행기에서 먹을 것 안줬냐고 물었고 엄마는 비싸서 못 사먹었다고 말합니다. 엄마 비행기 값에는 그 안에서 먹는 음식 값까지 다 포함되어 있었단 말이에요?

우리도 마찬가지로 모르면 이와 같이 굶으면서 여행을 하는 사람과 같이 신앙생활도 힘들고 어려운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구원받은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어떤 축복을 누릴 수 있게 되었는지를 우리에게 알려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Key Word는 바로 우리라는 단어입니다. 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릴 수 있는 특권에 대해서 말씀 하고 있습니다.

1. 그러므로 우리는 받은 구원의 삶을 누릴 줄 알아야 합니다.(1절)

1절 말씀은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어 구원받았을 때 어떠한 일들이 주어지게 되었는지를 자세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죄인으로 멸망 받아 마땅했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원수 되었던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받았다 하는 것은 바로 이 화평의 삶을 누리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믿는 자로서 누리는 특권이며 축복인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께서 부부 싸움을 하면 늘 지곤 했는데 하루는 아무리 생각을 해도 아내가 좀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 만큼은 내가 질수 없지”하는 마음으로 방문을 박차고 나오면서 그 결의를 찬송가로 표현합니다. “믿는 사람들은 군병 같으니 앞에 가신 주를 따라 갑시다~~” 그랬더니 사모님도 목사님 들으라며 찬송가 395장으로 화답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너 시험을 당해 죄 짓지 말고, 너 용기를 다해 곧 물리쳐라~~” 목사님은 문을 박차고 나온 결의는 좋은데 갑자기 갈 곳이 없는 것입니다. 밤은 어둡고 급히 나오느라 옷도 제대로 못 입고 나와서 춥기는 하고 할 수 없이 동네 놀이터 벤치에 앉아 나오는 노래가 “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여 슬프고도 외로워 정처 없이 다니니~~” 그랬더니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멀리서 사모님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돌아와 돌아와 암이 곤 한자여~~”

여러분 부부 싸움을 하고 나면 기분이 어떠하신지요? 혹 내가 이긴 것 같아도 결코 기분이 좋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와 하나님님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일지라도 어떤 것이 옳은지 혹은 그른지는 기본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옳지 않은 삶을 살 때,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지 않을 때 누가 뭐라고 하지 않더라도 어딘가 불안한 마음으로 살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마음이 오래되면 될수록 고질병이 되어 버립니다. 마음이 화인 받아서 돌이킬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러한 삶을 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속히 하나님과 화목하기를 원하십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 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5:20) 그리고는 그 화목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한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희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려 하심이니라”(고후5:21) 왜? 우리 인간은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내 죄에 대한 문책을 받기도 버거운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감당 할 수가 있습니까? 모두가 다 자신의 죄를 짊어지고 사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의 죄까지 책임을 질수가 있습니까?

오직 예수님만이 자신의 죄에서 문책 받으실 필요가 없으시기에 우리의 죄를 담당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만이 흠 없는 제물이 되실 수 있기에 우리의 죄를 위해서 자신을 제물로 드리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님을 통하여 화목을 예비하셨다고 하여도 그러한 화목은 일방적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화목 초청에 응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엘리사벳 브라우닝이라는 여류 시인이 있습니다. 그녀는 15살에 말을 타다가 떨어져서 척추를 다치게 되었고 몇 년 후 가슴 동맥이 터져서 거의 죽다가 살아난 이후 10여년을 식물인간처럼 몸을 움직이지 못하며 살아갑니다. 그러한 자신을 아버지는 끔직하게 간호하고 보호 하였습니다. 그러는 동안 이 여인은 육신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계속 시를 써서 발표를 합니다.

그런 그녀의 시를 가장 사랑하고 알아준 사람이 로버트 부라우닝이라는 시인입니다. 불구의 그녀에게 로버트 부라우닝은 계속 편지를 보냅니다. 찬사의 편지가 결국은 사랑의 편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엘리사벳의 아버지는 자기 딸이 부라우닝과 사귀는 것을 무척이나 반대를 했습니다. 그러나 둘은 아버지를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하여 영국을 떠나 이태리의 플로랜스로 가서 자리를 잡게 됩니다. 극도로 화가 난 아버지는 엘리사벳을 아예 자기의 족보에서 지워 버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사벳은 부모님들에게 매주 한통의 간절한 편지를 보냈던 것입니다. 그러던 십년이 되는 해에 엘리사벳의 아버지로부터 큰 소포 하나가 도착합니다. 그 속에서 엘리사벳은 그 동안 자신이 썼던 편지들이 뜯어보지도 않은 채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바로 이 편지들이 지금도 영국 사람들의 마음속에 명작으로 읽혀지는 엘리사벳 브라우닝의 시들입니다.

만일 그 아버지가 이 사랑의 시들 중 하나만 이라도 읽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와 하나님의 화목도 한쪽의 노력으로만 이루어 질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응답하지 않으면 그러한 화목은 이루어 질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응답하지 않으면 그러한 화목은 아름다운 작품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가 받아들일 때에만이 그 화목은 가치를 발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요한복음 10장 10절에서 밝히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아 영생을 얻어야 합니다. 그러나 단지 구원받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받은 생명을 풍성히 누리면서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께 묻습니다. 여러분은 분명히 구원을 받았습니까?

그러면 받은 구원을 지금도 풍성히 누리면서 살고 있습니까? 구원을 받기는 하였어도 그 받은 구원을 누리지 못하고 살고 있다면 그것은 조금 전 이민 비행기 속에서 쫄쫄 굶던 그 할머니 같은 삶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입니까?

그것은 받은 구원을 마음껏 누리면서 살라고 은혜를 베푸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면 그 구원을 마음껏 누리면서 풍성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특권이자 책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담 안에서 죄인이란 사실만 생각하지 말고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는 의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확신하면서 풍성한 삶으로 나아가시기를 간절히 축원 합니다.